February 2022
(커버이미지 : 설날에 학교에서 보내준 사진. 세은이가 반 친구들에게 한국의 설날을 설명하고 있다. Mrs. Miller는 동생이 제주도에 살고 있어서 한국 문화에 대한 이해와 관심도가 높은 사람이었다.)
미국 내 아시아 문화, Happy Lunar New Year!
미국의 문화라는 것은 마치 모든 이민자들의 문화를 모아놓은 모자이크 같은 느낌이다. 다 뒤섞여서 크게 하나가 된 느낌.
다양성을 추구하는 나라니까 모든 것을 포용하려 하지만 가끔 오해가 있기도 하다.
가끔 마트에 가면 나에게 '니 하오'라고 인사하는 사람이 있었다. 나는 이것이 어떤 의도를 가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친하게 말 걸고 싶은데 알고 있는 아시아 말이 '니 하오'뿐인가 보다.
내가 한국인인걸 알면서 그러면 좀 문제겠지만 저 사람이 볼 때 내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알 도리는 없겠지. 교양 있는 사람들은 인종차별을 하지 않으니, 나 역시도 그들의 실수를 민감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고마워요. 그런데 저는 한국에서 왔어요. 우리는 '안녕'이라고 해요." "Oh I'm sorry for that. 안녕"
학교나 방송을 통해, 때가 되면 Yom Kippur, Kwanzaa 같은 다른 문화의 명절도 알게 된다. 당연히 그중에 는 설날도 있다.
TV에서는 설날 며칠 전부터 누군가에겐 생소할 수 있는 아시아 최대 명절을 소개하고 있었다. 학교에서도 아시아 명절을 맞이해서 간식을 나눠준다고 했다.
그런데 조금 아쉽게 느낀 점은, 설날을 부르는 이름은 미국 공식 명칭이 "Lunar New Year"지만 적지 않은 곳에서 'Chinese New Year'라고 한다. 학교 공지에도 그렇게 적혀있는 곳이 한 두 군데 눈에 띄었다.
아시아 문화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미국인들은 음력 새해가 중국만의 명절이 아니라 한국을 포함한 몇몇 아시아 나라 공통의 명절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그럼에도 Chinese New Year라고 부르는 것은 일종의 습관 같은 거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미국에서 음력설을 쇠는 사람들은 중국인들이 처음이지 않았을까? 그러니 "중국 새해"가 되었겠지.
나중에서야 중국만의 문화가 아닌 걸 알았겠지만, Chinese New Year나 Japanese Sushi처럼 이미 생겨버린 말은 고치거나 없어지기 어렵다.
요즘 뉴욕에서 유행하는 한국 음식, 일본 스시랑 비슷하게 생겼다고 해서 Korean Sushi라고 부르는 이 음식, 이것이 원래 이름인 '김밥'으로 불리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있어야 할까?
뉴스에서 본 뉴욕시티 Lunar New Year 퍼레이드엔 중국 사람들의 행렬로 가득했는데, 이걸 보면 미국인들이 Chinese New Year라고 부르는 것이 이해되기도 한다. 새해 퍼레이드 중국사람들이 대부분이니까.
그럼에도 공식 명칭이 Lunar New Year인 것은, 미국 사람들이 문화의 다양성을 인정하기 위해 꼼꼼히 노력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뭐 아무튼 한국인인 우리는 떡국을 만들어 먹고 한국에 계시는 할머니, 할아버지께 영상통화로 세배를 했다.
설날이 아시아 사람들의 중요한 기념일이지만 학교가 쉬는 날까지는 아니다. 설날 아침 세은이는 꽤나 불만스럽게 학교에 갔다. "한국이면 쉬는 날인데!!"
그런데 세은이가 다녀오고 나니 Mrs. Miller에게서'Happy Korean Lunar New Year'라는 제목으로 이메일이 왔다. 세은이가 오늘 학교에서 설날에 대해 소개한 사진이 있었다.
세은이한테 물어보니 '설날 떡국을 먹고, 한 그릇 먹을 때마다 나이를 한 살 먹는다.', '세배를 하면 할아버지가 용돈을 준다.' 등 선생님이 찾아준 동영상을 보면서 친구들에게 설명해주었다고 한다.
세은이가 영어를 잘하지는 못했겠지만 그래도 Mrs. Miller가 세은이에게 아이들 사이에서 관심받을 수 있도록 기회를 주어서 참 고마웠다. 아마 다른 친구들에게도 다양한 문화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겠지.
나는 Mrs. Miller에게 세은이의 사진을 보내준 것과 메일 제목에 Chinese New Year가 아닌 Lunar New Year라고 적어준 것도 고맙다고 답장을 보냈다. 아내는 이래서 Mrs. Miller를 좋아한다.
반 친구들과 즐기는 밸런타인 데이
2월 14일은 밸런타인 데이다. 한국에서는 여자가 좋아하는 남자에게 초콜릿을 주는 날로 되어 있다.
미국에서 밸런타인 데이는 꼭 여자가 남자에게, 그리고 초콜릿과 연관된 것은 아니다. 그래도 연인 간에 로맨틱한 분위기를 내는 날은 맞는 것 같다.
사실 남녀 간의 연애뿐만이 아니라 가족, 친구 등 주변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날이고 TV에서는 하트가 그려진 선물 광고가 쉴 새 없이 나오고 있었다.
학교에서도 밸런타인데이 이벤트 공지가 왔다. 반 아이들끼리 작은 선물을 주고받는 거라고 한다. 그러면서 반 아이들의 명단도 같이 왔다.
반 친구들과 같이 하는 학급 행사는 아무래도 조심해야 할 부분이 있을 것 같아서 Mrs. Miller에게 설명을 부탁하는 메일을 보냈더니, 정말 아주 친절하게 행사 설명을 해주셨다.
Mrs. Miller에 따르면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까 봐 그림 설명이 있는 메일을 보내셨다. Thanks!)
집에 있을 법한 종이 상자 (보통은 신발상자, Shoebox) 하나를 예쁘게 포장하고 위에 구멍을 뚫는다. 윗면엔 아이의 이름을 적는다.
친구들의 숫자만큼 $1~2 수준의 작은 선물을 준비한다. 학용품이나 장난감도 좋은데 코비드 지침 때문에 먹는 것은 안됨.
밸런타인 데이에 포장한 상자를 가져와서 교실 한편에 놓으면 아이들이 돌아가면서 준비한 선물을 넣는다.
'아. 어린이집 생일 파티 같은 느낌이구나.' 아내는 반 아이들 숫자대로 학용품을 사서 세은이와 같이 하나씩 포장하고 이름도 각각 다 써주었다.
밸런타인 데이에 세은이가 집으로 가져온 상자에는 반 아이들의 작은 선물이 이것저것 들어있었다.
사실 그렇게 대단히 값나가는 것들은 아니지만 나름 선물을 열어보는 소소한 재미가 있다. 삐뚤빼뚤 쓴 아이들의 메모지 사이에 단짝 친구 Liv가 그려준 적어준 '안녕하새오'라는 한글이 눈에 띄었다.
학교는 이런 식으로 뭔가 자꾸 소소하게 아이들이 기분 좋아질 이벤트를 계속 만들어 낸다.
외벌이 & 재택근무로 살고 있는 우리에게 학부모 참여 행사는 즐겁고 재밌는 일이었지만, 만약 서울에서 살던 것처럼 맞벌이로 지내고 있었다면 살짝 부담될 것 같기도 했다.
뉴욕 학부모들은 어떠려나? 이미 어릴 때부터 익숙한 일들이라서 대수롭지 않으려나? 궁금하다.
주말엔 명절(?) 기념으로 주재원 가족 중에 1학년 딸이 있는 에리얼(아이가 인어공주를 좋아해서 Ariel로 했다고) 네가 우리와 헤이니네를 저녁 초대해 주었다.
집들이 선물로 옆집 Lodico 가족에게 받았던 베이커리 가게의 선물을 준비했는데, 동네에 유명한 가게고 우리가 받았던 집들이 선물이라며 주었다.
에리얼의 아빠는 젊을 때 시카고에서 1년 남짓 유학생활을 했던 분이라, 미국으로 다시 오면서 하고 싶은 일이 굉장히 많은 분이었다. 버킷 리스트를 채워가느라 정말 바쁘게 살고 있었다.
아이들은 영어를 잘해도 고민, 못해도 고민
최근에 있었던 밸런타인 데이 얘기를 했는데 어떤 행사인지 잘 몰라서 아이를 그냥 보냈었다고 한다. 내 설명을 듣고서는 내년에 잘 준비해 봐야겠다며 살짝 아쉬워했다.
에리얼은 영어를 이미 잘하는 상태에서 미국에 온 아이였지만 학교에서 벌어지는 일은 생소한 것이 많다 보니 미국 학교 경험이 없는 엄마 아빠가 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확실히, 에리얼은 집에 있을 때도 한국어와 영어를 8:2 정도로 섞어 쓸 정도로 영어가 꽤나 익숙해 보였다.
세은이는 많이 부족해서 우리는 부러운 마음이 컸지만 에리얼네는 영어만 잘하게 되는 게 고민된다고 했다.
왜냐하면 어차피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아이가 영어를 잘하는 만큼 한국어 능력이 부족해지는데 집에서 가르치는 걸로는 같은 나이 또래의 국어 실력을 따라갈 수 없을 것 같아서라고 한다.
물론 '돌아가면 당연히 잘하겠죠. 원래 한국 아이인데요'라고 말해주긴 했지만, 훗날 당사자와 부모가 복귀과정에서 여러 일들을 겪어 나가야 할 테니 충분히 고민이 될 만한 일이라는 생각도 든다.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고, 좋아 보여도 어려움이 있고, 똑같이 한국에서 출발해서 미국 생활 시작했더라도 살아가는 모습은 다 제각각이구나.
그래도 여기서 영어 잘하는 건 좀 부럽다. 세은이도 영어를 잘하면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많을 텐데. 아이가 부모보다 영어를 잘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는데 세은이는 그렇게까지는 안될 것 같다. 아쉽다.
살아남은 것으로 살아있다고 할 수는 없어
우리 모두 미국에 온 지 10개월 정도 된 상황이다. 짧다면 짧을 수도 있고 길다면 길 수도 있는데, 초보티는 벗은 것 같지만 정착이 완성되고 현지인처럼 살고 있다는 생각은 잘 들지 않는다.
우리는 그동안 여행 갔던 곳들, 앞으로 가고 싶은 곳들, 회사 적응 이야기 등을 한참 나눴다. 다들 비슷비슷하게 살고 있음을 듣는 건 상당히 위안이 되었다.
미국으로 오기 전에 정말 모든 사람들이 골프를 배워오라고 했었는데 여기 모인 셋 중에선 에리얼네만 골프를 하고 있었다. 마음이 여유롭지 않으니 선뜻 나설 수가 없다. 원래 큰 흥미가 없기도 했고.
하지만 사실 나는 골프보다는, 동네에서 현지인이 되는 것, 회사에서는 보통의 미국 직원처럼 되는 것이 가장 이루고 싶은 일이었다. 현지인 친구/동료를 사귀는 것이야 말로 미국에서만 할 수 있는 일이니까.
하지만 이민자가 보통의 뉴욕 사람처럼 되는 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다. 영어가 부족한 건 당연하고 사람 만날 시간도 없고 정착 노동(?)을 하면서 피폐해진 마음으로는 누굴 만나고 싶지도 않았다.
회사일은 집에서 일하고 있어도 야근을 해야 하는 때가 많았고, 주말엔 가족과 시간을 써야 하니 평일은 밤늦게까지 해서라도 일을 끝내야 하니 시간 자체가 많지 않다.
모두가 공감했던 것은, 일하고 먹고사는 것에는 지장이 없어졌지만 이렇게 해서는 미국의 껍데기만 맛보고 돌아가게 될 것 같다는 것이었다. 에리얼네는 골프 치는 것으로 방향을 잡은 것 같다만.
골프를 치면 뭐가 좀 채워지려나? 여행을 많이 다니면 뿌듯함이 생길까? 여전히 뭔가 부족하고 허전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아이들도 엄마 아빠들도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앞으로 어떻게 지내야 진정 '미국에서 살아있다'라고 할 수 있는 것인지 살짝 고민이 되었다.
'내가 원하는 건 정확히 어떤 것이고, 어떤 게 부족하고, 어떤 방법으로 부족한 걸 채울 수 있을까?'
고민은 깊어지고 시간은 무의미하게 흘러간다. 편안함이 주는 불안함과 조바심이 생겨난다.
Fondly,
C. Park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