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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lifton Parker Jun 30. 2024

19. 뉴욕 첫겨울의 일상 & 크리스마스

December 2021

(커버이미지 : 우리 집 눈 내린 아침. 사진에서 보이는 나무 건너편 도로까지는 타운에서 보낸 제설차가 치워주었지만 내 차고에서 나가는 진입로는 거주자가 직접 치워야 한다.)


*뉴욕시티(NYC)로 표기하지 않은 "뉴욕"은 뉴욕 주(NYS)를 의미하며 대도시가 아닌 교외지역입니다.


겨울이 온다. (Winter is coming.)


뉴욕은 중국 길림성이나 일본 홋카이도쯤 되는 위도에 있어서 한국보다 겨울이 길고 춥다고 들었다.

막상 12월이 되니 확실히 뉴욕이 한국보다 더 춥게 느껴지긴 했지만 못 견딜 정도까지는 아니다.

나무집에 살고 있는데도 꽤나 따뜻한 편이라 조금 신기했다. 아무튼 한국에서 가져온 전기장판이 아직은 필요하지 않았다. 이것 때문에 변압기도 샀건만... 안 추운 게 좋지 뭐.


고장 난 히터와 미국식 일처리

우리 집 지하실에는 냉방기(Air Conditioner), 난방기(Gas Furnace, Heater), 온수기(Boiler)가 각각 설치되어 있다. 

공기를 이용한 냉난방 시스템이라 한국과는 달리 난방기와 온수기가 분리되어 있다. 지하실에서 1층과 2층에 있는 집안 곳곳의 바닥 환풍구를 통해 바람을 불어넣어 준다. 1층 거실의 온도 조절기로 조절한다.

(온수기는 온수를 데우는 용도로만 사용되는데, 김이 나도록 끓는 물이 나오도록 할 수도 있다. 기름기 많은 음식을 먹었을 때 유용했다)

어느 날 갑자기 난방기가 잘 돌지 않고 자꾸 켜졌다 꺼졌다를 반복하기 시작했다. 지하실에 가서 난방기를 살펴봤지만 생전 처음 보는 물건이라 설명서를 읽어도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지금 당장은 못 견딜 만큼 추운 건 아닌데 날이 점점 추워질 테니 Tim에게 한번 와달라고 부탁을 했다.

저녁에 Tim이 와서 지하실 난방기를 열어 보더니, 가스 공급관 말단의 플라스틱 핀이 부러져서 생긴 일이라고 한다. 부품 교체를 해야 한다고.

그러면서 Tim이 접착제로 핀을 임시로 붙여주고 수리센터에도, 집주인에게도 직접 연락해 주었다.

다행히 Tim의 조치만으로도 온풍은 다시 나오기 시작했고 춥지 않게 되었지만 난방기 수리 미션은 해결해야 했다. 


영어 잘 못하는 외국인에게 이런 일은 '미션'이라고 해야 할 만큼 난도가 높은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서비스 센터에 전화 한번 하는데 얼마나 큰 에너지가 드는지 모른다.

가끔 미국식 일처리는 정말 속 터지게 하는데, 이번 경우처럼 부품 교환 같은 단순한 일에도 수리기사, 콜센터, 부품업체, 집 보험회사 등등 여러 업체와 여러 직원이 관여하게 되어있다.

다들 자기가 맡은 역할만 하기 때문에 소비자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데 관심이 없고 담당자 본인의 일만 처리하는 방향으로 업무를 한다. 

소비자를 열받게 하는 말 : '저는 이제 다 됐고 그건 다른 분께 물어보세요. 그게 누군지 저야 모르죠.'

여기는 남의 나라이고 한국 영어 수업에선 욕설을 가르쳐 주지 않았으니 그저 '알겠다. 고맙다.'라고만 한다.

게다가 온라인 시스템 또는 문자보단 전화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어서, 전화하기 전에 한숨부터 나오는 일이 부지기수다.

전화하고, 노래 들으며 통화대기하고, 간신히 연결되어 설명하면, 또 다른 담당자에게 연결한다고 하고, 또다시 통화대기 또 설명하고... 이런 식이 되어버리니 인내력이 저절로 길러질 수밖에 없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누가 어떤 것을 담당하는지 알 수가 없으니 불만을 토로할 상대도 없다. 미국에서 오래 살면 이게 자연스러워 질까? 그럴 수는 없을 것 같다.

거기에 또 하나 주의해야 할 것은, 전화받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복불복이 심하다.

그나마 친절한 사람들도 있지만 무턱대고 자기 소관이 아니라고 하거나 아예 잘못된 정보를 주는 경우도 있다. 약속을 하고도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더러 있는데, 미국 사람들은 이런 걸 어떻게 참고 사나 싶다.

이번엔 수리기사가 개인 사정으로 작업을 취소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런데 아무도 나에겐 알려주지 않고 새로 배정도 해주지 않은 채로 시간만 지나고 있었다.

고객센터에 다시 전화해서 다시 예약하고 다시 기다리고... 다행히 새로 배정된 기사는 제때 수리를 완료해 주었다. (물론 다시 보여주고, 다시 설명하고, 다시 약속 잡는 것 정도는 웃는 얼굴로 기꺼이 했다. 젠장...)

난방기 커버 교체 소요시간 무려 2주. 하하하... 이것이 미국인의 삶인가? 다들 이러고 사는 거라고?

Tim이 해준 임시 조치가 아니었으면 우리는 2주 동안 냉골에서 자야 했을 거다. Tim에겐 호빵을 선물했다.

Thank you guys, anyway.


뉴욕 업스테이트의 월동준비

뉴욕은 지리적으로 눈이 많이 오는 곳이라서 겨울이 되면 눈과 관련된 것들을 반드시 준비해야 한다. 

북극 찬 기운은 5대 호(Lake Erie, Lake Ontario) 같은 큰 호수를 통과해서 남쪽으로 내려오는데, 상대적으로 높은 온도의 호수의 물이 기온/기압차로 인해 하늘로 빨아올려진다. 

습기가 가득해진 공기는 남쪽으로 내려올 때 육지를 만나게 되면서 또 한 번의 온도차를 겪는데, 이로 인해 눈이 시작되게 된다.

뉴욕 사람들은 이런 현상을 호수 효과(Lake Effect)라고 부르고 TV 일기예보에서 눈 오는 걸 보면 호수 가장자리에서부터 눈이 시작되어 내륙으로 뿌려지는 게 확인된다.

그래서 나이아가라 폭포 근처 버펄로(Buffalo, NY)엔 몇 미터씩 되는 폭설이 거의 매년 반복된다. (버펄로 강설 최고 기록 : 1977년, 199인치 = 5미터)

우리 동네는 그 정도까지는 아닌데, Mark 말로는 작년 겨울에 우리 동네에도 1미터 넘게 눈이 왔었다고 한다. 눈이 본격적으로 오기 전에 월동 준비를 미리 해야 했다.


 1. 집주인에게 연락해서 잔디밭 스프링클러 블로우 아웃(Blow out)을 부탁해야 한다. 마당에 매설된 급수관에 바람을 불어넣어 고여 있는 물을 빼내는 것을 말한다. 물을 빼주지 않으면 배관이 동파되어 못 쓰게 되기 때문에 12월이 되기 전에 세입자가 챙겨야 하는 것 중 하나다.

 2. Lowe's 나 Home Depot 같은 주택 용품 마트에서 눈삽 2개와 40파운드짜리 Salt(제설용 염화칼슘을 말 함, 한 포대에 20kg) 두 포대를 샀다. 차고 앞은 거주자가 직접 치워야 한다.

 3. 눈이 많이 와서 운전을 못할 정도가 되면 생필품 구할 방법은 전혀 없다고 봐야 한다. 식량과 생필품은 미리 비축해 놔야 한다. 그 정도면 마트에도 물건이 채워지지 않기 때문에 살 수도 없다. 폭설에 준비된 게 없으면 그냥 굶거나 구걸해야 한다.

 4. 월세 계약에 눈 치우기 서비스(Snow Removal, Plowing)가 포함되어 있는데 세부내용은 1인치 이상 눈이 예보될 때 제설장비를 이용해서 차고까지 진입로의 눈을 치워주는 것이다. 1인치 미만으로 오면 내가 직접 치워야 한다. 

 5. 눈이 많이 오면 학교에서 버스 지연 또는 휴교 문자를 보내준다. 아침 TV 뉴스에서 날씨 상황과 학군별 등교 여부가 자막으로 계속 알려준다. 그래서 눈 오는 날 아침엔 핸드폰과 뉴스를 잘 보고 있어야 한다.


타운에서 하는 중요한 일 중이 바로 제설 작업이다. 눈이 내리기만 해도 타운에서 보낸 제설 트럭이 아주 신속히 다니면서 고속도로에서 시작해서 동네 도로 구석구석까지 눈을 치워준다. 

(대중교통이 거의 없는 교외 지역에서 도로 관리가 정말 중요하기 때문에, Town 도로 관리자인 Highway Superintendent는 주민 직선으로 선출되는 주요 직책이다.)

제설 트럭의 앞쪽엔 불도저처럼 눈을 한쪽으로 밀어내는 장비가 있고, 트럭의 꽁무니엔 마치 강아지 꼬리처럼 흔들리면서 제설제를 자동으로 흩뿌려 주는 장치가 있다. 

제설차는 수시로 이곳저곳을 반복해서 다니면서 눈을 길 바깥으로 치워내고 동시에 제설제를 뿌린다.

그래서 겨울엔 뉴욕의 거의 모든 도로는 하얀 제설제로 뒤덮이고 차들은 하얀 가루로 범벅이 될 수밖에 없다. 온통 제설제 천지인 데다 날씨도 추우니 세차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그 대신 가끔 비가 오는 날엔, 항상 30분 정도 빠른 속도로 운전을 하고 집에 오자마자 걸레로 닦아주었다. 교외지역이라 비가 깨끗했고 제설제만 씻어내도 어느 정도 봐줄 만했다.


집 앞 도로까지는 타운의 제설차가 치워주지만, 차고와 도로를 연결하는 10여 미터의 진입로(Drive way)는 거주자가 직접 치워야 한다. 

우리는 월세 계약에 눈이 1인치 이상 오면 옆집에 사는 Tim이 제설 장비로 진입로의 눈을 치워주는 Snow Removal(또는 Snow Plowing이라고 함) 서비스를 받게 되어있었다.

제설 장비는 유모차처럼 생겼는데, 손으로 밀고 앞으로 지나가면 바닥의 눈을 길 옆으로 뿌려주는 장비다. 그러면 지나간 길을 따라 잔디밭엔 눈이 산더미처럼 쌓이는데 세은이가 좋아하곤 했다.

하지만 눈이 적게 내리는 경우엔 직접 눈 삽질을 해야 한다. 눈이 적게 왔다고 해서 그냥 드면 안 되는 게, 우리 집은 진입로에 경사가 있어서 밤 동안 얼어붙으면 운전이 위험하기 때문이다.

비록 제설 서비스를 받는다 하더라도, 밤새 눈이 계속 오거나, 장비를 쓸 수 없을 정도로 눈이 얼어버리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결국 직접 해결해야 하는 상황은 반드시 발생하게 된다.

특히 길이 얼어버리는 것이 곤란한 일인데, 눈삽으로는 해결이 안 되고 제설제도 뿌리고 삽으로 때려서 얼음을 깨서 퍼내야 하기 때문이다. 길이 짧아도 꽤나 중노동이다. 아내가 항상 같이 했다.

이런 상황을 몇 번 겪다 보니 꼼수도 생기는데, 눈이 조금만 와도 아예 차를 차고에 넣지 않고 진입로 입구 쪽에 세워두는 방법이다.

이렇게 하면 차로 가려지는 면적만큼 눈을 안 치워도 되고, 길이 얼더라도 차가 입구에 있어서 도로로 바로 뺄 수 있으니까 얼음을 치우지 않고도 차를 쓸 수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세워 놓으면 타운 제설차가 지나면서 뿌리는 제설제, 얼음, 돌조각 같은 것에 맞기도 하니 조심해야 한다. 그리고 제설차가 지나는 경로에 차가 세워져 있으면 교통딱지를 받을 수 있다.)

3형제를 키우는 건넛집 Mia네는 눈 오는 날에 자기 집 차들을 일부러 밖에 꺼내 놓는데, 이 날 만큼은 SUV 만 세 대를 갖고 있는 Mia네가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왼쪽) 타운 제설 차량(출처. 고속도로 관리자 Dahn Bull), (오른쪽) 동네의 눈 내린 풍경, Mia네는 눈 오는 날엔 차를 차고 밖에 주차하곤 했다.
(사진) Tim이 선물해 준 썰매를 마당에서 타고 있는 세은이. Shed(외부 창고) 옆에 서 있는 Mark가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눈이 오면 진입로나 차 관리가 걱정이 되긴 했지만, 그래도 온 동네가 완전히 새하얗게 변해서 동화 속 마을에 사는 것 같은 느낌은 굉장히 특별하게 다가왔다.

아침이 되면 집 앞마당 큰 단풍나무 가지마다 이슬이 송알송알 방울진채로 예쁘게 얼어있고, 처마 끝으로는 고드름이 열린다. 내가 어릴 때 시골 할머니 집에서 봤던 모습들이 똑같이 재현된다.

아이가 있는 집마다 눈사람도 만들어 놓는다. 자기 집에서 눈썰매도 타는 사람들도 있다.

하루는 Tim이 찾아와서, 자기 애들은 12학년(고등학교 졸업학년)이라 더 이상 필요 없다며, 어린이 썰매를 세은이에게 선물로 주었다. 고마워라.

눈 많이 온 어느 날, Mark가 Gavin에게 해줬던 것처럼 눈 삽으로 앞마당의 눈을 다져서 눈썰매 코스를 만들었다. 세은이가 한참을 타고 놀았다. 집에서 타는 개인 썰매. 

상상하지 못했던 즐거움이 어느덧 일상이 되고 있었다. 아내는 이날 사진을 많이 찍었다.


미국 최대 명절 크리스마스의 일상


미국 최대 명절은 뭐니 뭐니 해도 크리스마스다. 

11월부터 크리스마스 느낌으로 장식된 쇼핑몰의 분위기, 추수감사절이 끝나자마자 하루 종일 캐럴만 나오는 라디오 등 어디를 가든 크리스마스가 다가왔음을 알 수 있다.

회사일에도 영향이 있는데, 파트너 직원들이 12월에 휴가를 많이 가기 때문에 필요한 일들은 미리미리 챙겨놔야 했다. 그래서 재택근무 중이지만 11월엔 밤늦게까지 일해야 하는 날도 많았다. 


미국 크리스마스는 절반이 조명빨

크리스마스엔 거의 모든 집에서 예쁜 조명 장식을 한다. 집 앞의 나무, 현관문 등에 전구 장식을 거는 것뿐만 아니라 마당에 산타나 루돌프, 요정 같은 인형을 세워 놓기도 한다.

서울에서 아파트 살던 우리는 당연히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는데, 핼러윈 때도 그랬지만 나는 최대한 동네 분위기에 맞춰서 지내고 싶었다. 

다른 사람들과 어느 정도 비슷하게 하고 살아야 얘깃거리도 생기고 물어볼 말도 있지, 안 해봐서 어색하다고 한국에서 살던 대로만 하면 계속 이방인으로 남게 된다. 뭘 좀 사러 가야겠다.


이때쯤 되면 크리스마스 용품을 파는 곳은 온 사방에 널려 있지만, 집에 뭔가 설치하는 것을 구하려면 홈디포(Home Depot)나 로우스(Lowe's) 같은 전문적인 주택 관리 용품 마트에서 구하는 게 나아 보인다.

크리스마스 장식의 대부분은 작은 전구 조명(Christmas Lights)이 달려 있는 것들인데 전동 펌프로 동작하는 풍선 인형 같은 것도 꽤 많이 있다. 어쨌든 거의 모두가 전원 연결을 해줘야 하는 것들이다.

그런데 미국 전원은 110V인 데다 대개 집 크기에 만큼 큼직하게 만들기 때문에, 서울 아파트에 돌아가면 쓸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몇 번 쓰고 못 쓰게 될 물건을 사려니 살짝 고민이 된다. 그래도 돈보다는 미국에서 두 번이나 맞게 될 크리스마스를 썰렁하지 않게 보내는 게 맞는 거겠지.

우리는 마당의 나무에 설치할 긴 LED line 조명, 현관에 거는 미슬토 리스(Mistletoe Wreath, 빨간 열매가 달린 미슬토 나무도 미국 크리스마스의 상징 중 하나) 그리고 2미터도 훨씬 넘는 크리스마스트리와 장식들을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마당 있는 집들은 대부분 외벽에 전원 플러그가 있다. 이런 식으로 마당에서 전기 쓸 일이 종종 있으니 그럴 법도 하다.

근데 그냥 외부에 노출되어 있는데 누가 몰래 쓰는 건 걱정 안 되나? 하긴, 여기선 밤에 남의 마당으로 몰래 간다는 생각 자체를 안 하겠구나. 목숨이 두 개가 아니라면 말이다.

벽에 있는 전원을 연장선으로 이어서 마당 나무 하나에 LED 조명을 둘러줬고, 현관문엔 작은 전구가 달려있는 미슬토 리스를 걸었고 집안 창문 앞에 크리스마스트리까지 설치하고 나니 밖에서 보기에 꽤 그럴듯했다. 

우리가 해 놓은 걸 Sarah가 보더니 보기 좋게 잘했다고 한다. 나는 Sarah의 칭찬에 생각보다 비용이 많이 들었고 한국엔 가져갈 수 없어서 조금만 했다고 답했다.

"이런 건 오랜 시간에 걸쳐서 조금씩 사서 모으는 거예요. 우리 집이 많아 보이겠지만 우리도 처음엔 다 이렇게 시작했어요."라고 Sarah가 알려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설치한 것들을 보니 전원 길이, 연결선 방수캡 같은 추가로 고려해야 할 만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홈디포에서 고민만 하다가 사지 않았던 것들도 떠오른다.

이런 것들을 매년 조금씩 사다 보면 이 나름대로 한 가족의 역사가 기록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Mark와 Sarah네 집은 마당의 나무들을 꼼꼼히 LED 전구로 둘렀고 귀여운 사슴 두 마리가 꽃밭자리 앞에 놓여 있었다. Grant가 태어나기 전에는 외롭게 한 마리였을까? 


(왼쪽) 옆집 크리스마스 장식. 사슴 두 마리가 귀엽다. (오른쪽) 지역 업체가 만들어 놓은 크리스마스 라이트. 모두가 구경할 수 있도록 개방되어 있었다.

12월에 뉴욕시티나 보스턴 같은 대도시에 가면 사람들이 많이 오는 장소마다 초대형 크리스마스 트리나 라이트 쇼 같은 것들이 많이 있다.

주재원 메신저 방에서는 뉴욕시티에서 록펠러 센터(Rockefeller Center)의 크리스마스 트리나 색스 백화점(Saks the fifth avenue)의 라이트 쇼, 브라이언트 공원(Bryant Park) 같은 곳을 다녀왔다는 얘기가 가득했다. 

뉴욕시티에 가서 밤까지 있으려면 숙박을 해야 하니까 구경은 무료라고 해도, 이 시즌 호텔 비용은 꽤 비싸다. 게다가 우리는 이미 잡힌 일정이 있어서 틈을 만들기도 쉽지 않고 비용면에서도 약간 망설여진다. 

근처에 갈 만한 곳은 없을까? 뉴욕 사람들이 다 뉴욕시티로 가는 건 아닐 텐데...

이래저래 고민하던 차에 운이 좋았던지, 우리 동네 주변의 한 업체(Quick Response)에서 회사 부지에 크리스마스 라이트를 설치해 놓고 지역주민들에게 무료로 공개한다는 TV뉴스를 보았다.

크리스마스 하고는 전혀 관계없는 시설물 관리 대행업체인데 지역 봉사 차원으로 매년 하던 행사라고 한다. 

집에서 그리 먼 곳이 아니라 언젠가 저녁에 찾아가 보기로 했다.


안내원의 유도를 따라 진입로에 들어서니 꽤 넓은 부지에 여러 가지 크리스마스 라이트가 설치되어 있다.

운전하면서 지나가며 보는 방식이다. 입구에 쓰여 있던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면 조명 동작에 맞춰진 음악도 들을 수 있다. 무료라기엔 꽤나 맘에 들었다. 

다 보는데 10분 남짓으로 짧지도 않게 꽤 괜찮았고 무료인데도 전화번호나 이메일을 달라거나 귀찮게 하지 않아서 더 좋다.

Sarah는 Gavin이 좋아해서 요새 거의 매일 밤마다 간다고 했다. 아쉽게도 세은이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고 한다. 엄마 아빠는 계속 가 보고 싶은데 말이다.

다들 알고 있나 해서 주재원 단톡방에도 알려주었는데 딱히 큰 반응은 없었다. 다들 뉴욕시티 같은 곳으로 구경 갔나... 다들 역시 소소한 구경거리보다는 유명한 게 좋았으려나?

올해는 이미 준비한 일정이 있으니, 내년엔 우리도 뉴욕시티로 한번 보긴 해야겠다.


(왼쪽) 우리집 크리스마스 트리. 집 밖에서도 볼 수 있게 블라인드를 항상 열어 두었다. (오른쪽) 이웃이 선물해 준 쿠키와 포토카드.


고마움을 표현하는 크리스마스 선물과 포토카드

12월엔 각종 업체에서 보내는 감사편지를 빙자한 광고 전단지가 하루에도 몇 통씩 우편으로 온다.

한국에선 연하장을 우편으로 보내던 문화는 이제 없어진 것 같은데, 미국은 아직도 아날로그다. 

은행, 카드사, 마트 등등 각종 업체에서 2021년 한 해 나에게 감사하다며 우편을 보내왔다. 


그러던 어느 날 우편함에 작은 쇼핑백이 하나가 들어있었다. 

열어보니 직접 구운 듯한 귀여운 모양의 크리스마스 쿠키와 옆집 Lodico 가족(Mark, Sarah, Gavin Grant)의 사진으로 만든 포토 카드가 들어있었다. "Happy New Year!"

포토 카드는 가족사진 여러 개를 콜라주로 만들었는데, 마감 상태가 직접 오려 붙이거나 프린트한 게 아니고 주문 제작한 것 같다. 이렇게 만들어 주는 곳이 있나 보다.

쿠키는 빨간색 산타, 초록색 크리스마스트리, 하얀 별 모양으로 먹기에 아까울 정도로 예쁘다. 미국에서 이웃에게 받은, 생각지도 못한 크리스마스 선물이라 그런가. 너무 소중해.

그다음 날엔 다른 집(The Schroders)에서도 우리를 찾아와 직접 만든 것 같은 쿠키 선물을 주셨다. 

평소 자주 보지 못했던 집인데 내가 보냈던 편지(참고 : 5. Dear Neighbors, "새로 이사 왔어요")를 기억한다며 계속 좋은 이웃으로 지내자 했다.

이런 관계가 Mark가 예전에 말했던 옛날 방식의 미국 이웃 문화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디지털 이미지나 문자 같은 게 아니라 진짜 편지와 선물을 보내고 감사함을 표현하는...

우리도 한인마트에서 간식거리를 준비해서 답례인사를 했다. 미국 크리스마스 문화를 잘 몰라서 먼저 인사하지 못했는데 이렇게 선물해 주어 고맙다고.

이런 일들을 계기로 조금씩 미국 인간관계가 넓어지니 동네 생활 하는데 점점 자신감도 생긴다.


크리스마스엔 동네 사람들하고만 선물을 주고받는 게 아니고 평소 감사한 사람들 모두에게 선물한다.

학교 선생님께도 선물을 보내도 된다. 기프트 카드 같은 현금성 선물도 많이 한다.

한국 촌지 문화의 폐해를 겪으며 자란 나로서는, 이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 정말 괜찮은 건지 눈과 귀를 의심했다. 이런 선물과 공적인 행동에 서로 상관없는 것이 잘 지켜진다면 괜찮을 것 같기도 하다.

우리는 세은이를 가르쳐주시는 Mrs. Miller와 Mr. Sweet에겐 항상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 있었다. 

아내는 스타벅스 기프트 카드 여러 개를 사서, 선생님들과 스쿨버스 기사에게도 선물했고 매주 쓰레기를 수거해 주는 청소차 직원에게도 선물했다.

이렇게 선물을 한다고 해서 특별한 도움을 더 받는 것도 아니고, 안 했다고 해서 불이익을 받지도 않지만 그저 평소에 상대에게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음을 직접 표현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한국에서 상상했던, 계산적이고 개인주의적이라던 미국인의 이미지는 온 데 간데없었고, 내가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은 정도 많고 선물도 나누고 사람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


우리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크리스마스 주말부터 새해 첫날까지 10일 가까이 쉰다. 이 기간을 통째로 여행을 가는 사람들도 있지만 우리는 크리스마스 날은 집에서 보내기로 했다.

미국에서 맞는 첫 크리스마스니까. 세은이는 커다란 트리 아래 쌓여있는 선물을 기대할 것이고, 아내와 나는 그것을 보고 기뻐하는 세은이의 모습을 기대하고 있으니까. 

아무리 미국에 왔다고 한들 4학년이니 산타를 믿지는 않을 거다. 하지만 세은이는 선물에 대한 믿음은 강력했다. 

마침내 크리스마스 아침. 세은이는 눈을 뜨자마자 소리를 지르며 1층으로 뛰어내려 가서 크리스마스트리를 확인한다.

아내가 전날 밤늦게까지 정성스럽게 싸 놓은 선물 꾸러미를 보고는 해맑게 웃는 세은이의 모습이 그간의 고생을 다 잊게 해 주었다.

행복한 크리스마스 아침을 보냈으니 이제는 여행 떠날 준비를 해야 했다. 휴가가 길어서 조금 더 멀리 갈 수 있다.


우리는 뉴욕의 추위를 벗어나 여름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떠나려 한다.


Fondly,


C. Par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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