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Clifton Parker Oct 10. 2024

30. 여행 8: 동네여행(2/3)-Albany, NY

March ~ May 2022

(커버 이미지 : 뉴욕 주립 박물관에 있는 미국 독립 주요 장면에 대한 대형 벽화 by David C. Lithgow)


*뉴욕시티(NYC)로 표기하지 않은 "뉴욕"은 뉴욕 주(NYS)를 의미하며 대도시가 아닌 교외지역입니다.

** 동네여행 1/3에서 계속


알바니에서 찾아볼 수 있는 미국 & 뉴욕의 역사

아일랜드 이민자들의 축제 : 세인트 패트릭 데이

3월 17일은 아일랜드의 명절 세인트 패트릭 데이(St. Patrick's day)다. 아주 오래전 아일랜드에 기독교를 전파했다는 세인트 패트릭이 세상을 떠난 날을 기념한다고 한다.

유럽의 명절이 미국과 무슨 연관이 있을까 싶지만, 1850년대 대기근을 피해 미국으로 대거 이주해 온 아일랜드 사람들의 '고향의 명절'이라 할 수 있는 날이다. 

영화 '갱스 오브 뉴욕 (2002)'을 보면 가난을 피해 미국으로 온 아일랜드인들이 참고 살아야 했던 거친 삶을 짐작할 수 있는데, 그 와중에 이런 명절을 통해서 이민자들끼리 결속력도 다지고 외로움도 견뎌냈을 거다.

그래서 아일랜드 출신이 많은 동부 지역에는 행사도 많고 그 규모도 대단하다. 특히 시카고에서는 매년 도심을 흐르는 강 전체를 아일랜드의 상징색인 초록색으로 물들이는 행사를 한다는 뉴스를 많이 봤다.


휴일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즐기는 축제 같은 분위기의 날이다. 뉴욕은 아일랜드 이민자의 비중이 높은 곳이라서 뉴욕시티뿐만이 아니라 알바니, 그 외 다른 많은 곳에서 기념행사가 있다.

미국에서 뭔가를 기념하는 행사는 대개 퍼레이드로 진행되는 것 같다. 알바니에서도 주말에 하는 세인트 패트릭 데이 퍼레이드가 메인이다. TV뉴스에선 코비드 이후 퍼레이드가 재개되었다며 반가워하고 있었다.

알바니의 세인트 패트릭 퍼레이드 구간은 2~3km 정도인데, 시내에서 출발해 뉴욕 주 청사를 지나고, 알바니 랜드마크 중 하나인 SUNY (State University of NY, 뉴욕 주립대) 플라자에서 끝난다.

한국에서 해보지 못한 새로운 경험은 당연히 해보고 싶다. 아일랜드 명절도 처음이고 퍼레이드 구경 가는 것도 처음이다. 시민권 수업에서 얘기할 거리 또 하나 생기겠다.


퍼레이드가 지나는 길은 서울로 치면 종로 정도 되는 알바니의 역사와 전통이 있는 길이다. 여러 옛날 건물이 있고 주 정부와 관계된 시설이 모여있다. 

우리는 조금 일찍 가서 퍼레이드 종점 부근에 자리를 잡았다. 사람은 꽤 많았는데 코비드가 아니었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왔을 것 같다. 모두 아일랜드 대표색인 초록색 옷을 입고 있다.

시간이 되니 여러 단체에서 팀을 짜서 행진을 시작한다. 전통 복장을 입은 사람들, 초록색 티셔츠 혹은 포인트 의상을 입은 행렬이 2시간 가까이 끊임없이 행진을 한다.

간단한 댄스 공연도 있고 그냥 행진하며 인사만 하기도 한다. 'Dublin, Limerick, Hibernian'같은 아일랜드 지역 깃발을 들고 나온 팀도 있었는데 아마 증조, 고조할아버지/할머니가 그 지역에서 왔나 보다.

아일랜드 탭댄스를 추는 아이들을 보는 건 참 즐거웠다. 이 공연을 하기 위해 얼마나 연습을 했을까.

방송국에서도 나와서 아나운서, 기상캐스터들이 퍼레이드에 참여하고 있었고, 기자들은 거리의 사람들과 인터뷰도 한다. 2년 만에 하는 것일 테니 그럴 법도 하다.

미국엔 이런 식의 퍼레이드가 참 많은 것 같다. 한국에선 이런 식의 퍼레이드는 거의 하지 않기 때문에 분위기가 궁금했는데 잘 보고 간다. 

(왼쪽) St. Patrick's Day 퍼레이드. 아일랜드 리머릭 지역에서 온 이민자의 후손들이 행진하고 있다. (오른쪽) 방송국에서 참가자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 ABC 방송국의 News10 아침 기상 캐스터 Zill Szwed.(제일 앞 파란 재킷).

퍼레이드 구경을 마치고 집에 와서 저녁을 먹고 TV를 보는데 오늘 퍼레이드에 대한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아까 거리에서 봤던 아나운서가 행사 설명을 하고 사람들 인터뷰가 나오고 있다.

'저기는 우리가 서 있던 자리였는데...'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퍼레이드 현장 영상에 사진 찍고 있던 아내의 옆모습이 살짝 스쳐 지나간다. 

"우와 마누라! 당신 미국에서 TV 데뷔했네."

한참을 서로 낄낄거리다가, 혹시나 해서 방송국 홈페이지에 가봤더니 오늘자 기사에 아내가 나왔던 그 장면이 스틸컷으로 올라가 있었다. 남들은 모르겠지만 아는 사람은 확실히 알아볼 수 있을 정도다. 대박!!

냉큼 기사를 캡처해서 구글 포토 가족 앨범에 저장해 두었다. 도서관 할머니들이 재밌어하시겠네 싶었다.

(알바니는 네덜란드 사람들의 영향도 많이 받은 곳이어서, 5월이 되면 튤립축제를 하는데 네덜란드 버전의 퍼레이드가 같은 장소에서 열리게 된다.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이민자 커뮤니티는 이와 비슷한 행사가 있었다. 참고로 여름에 하던 'Asian Festival'은 중국 이민자들 위주였다.)


트로이(Troy, NY)

알바니에서 동쪽으로 허드슨 강을 건너면 트로이(Troy, NY)라는 오래된 도시가 있다. 알바니에서 매우 가까워서 사실상 한 개의 생활권으로 본다.

알바니 항구를 기반으로 성장한 도시로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철강, 섬유공업으로 크게 번영한 곳이라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많은 것이 바뀌어 쇠락한 도시에 가깝게 느껴진다. 

(사진) 알바니 생활권에 있는 세 도시(Albany, Troy, Schenectady)

미국 사람들은 도시에서 돈을 벌어서 교외에 집을 구해서 나가는 것을 인생의 목표 중 하나로 생각하기 때문에 도심지 아파트 같은 곳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주로 남게 된다.

옆집 Mark와 Sarah가 딱 그런 경우였다. 결혼할 때는 돈도 없고 아이도 없으니 도심지에서 불편함을 참고 살다가, 돈이 모이고 아이가 생기면 마당 넓은 집, 평화로운 동네로 이사 가는 게 미국인들 인생 공식이다.

그런데 도시를 지탱하던 산업이 버티지 못하는 상황이 오게 되면, 주로 저소득자들이 사는 도심지는 슬럼화가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범죄율도 높아지니 도심지는 더욱 낙후된다. '악순환'

자동차 산업이 몰락한 미시간 주의 디트로이트가 그런 사례로 유명한데 뉴욕에서는 알바니, 트로이, 스키넥터디가 그런 곳에 해당한다. (사실 이 세 곳은 Erie 운하로 연결된 하나의 산업권으로 봐야 한다.)

그래서 회사 매뉴얼에 알바니, 트로이, 스키넥터디 도심지에는 집을 구하는 것을 권하지 않는다고 되어있을 정도였다.

특히 트로이가 악명이 높았는데, 주재원들 중에는 트로이에 아예 가본 적 없는 사람도 있었고, 밤에 트로이 다운타운을 가는 걸 권하는 현지인도 없었다. 

가끔씩 뉴스에서는 트로이의 총기 사고 또는 무단 침입 같은 사건이 보도되기도 했다.


트로이 : 1) 렌슬러 공과대학 RPI

그렇다고 해서 트로이의 모든 곳이 & 하루종일 그런 모습인 것만은 아니다. 번영했던 역사가 있고 여전히 유효한 영광이 남아있다. 그리고 현재의 사람들이 여전히 살아가고 있는 곳이다.

트로이의 화려했던 명맥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 중 가장 중요한 것은 1824년에 설립된 기술 공학 대학 RPI(Rensselaer Polytechnic Institute, 렌슬러 폴리텍 대학)라고 할 수 있다.

한국에서는 잘 모를 수도 있지만, 200살이 된 RPI는 현재도 미국 4년제 대학 2600여 개 중에 50위 안에 드는 그야말로 명문 대학이다. 

RPI 설립 당시에는 이리 운하의 건설이 미국 최대의 과제였기 때문에 학교는 자연스럽게 토목공학 중심으로 시작하였다. 

지금은 공학 다양한 분야에서 큰 업적을 쌓고 있는데, 이메일 체계, 디지털카메라, 상업용 TV 등을 발명한 사람들이 RPI출신이라고 하고 유명한 기술 업체 설립자들도 많다.

최근에 있었던 일은, 미국 정부가 코비드 관련 국책과제를 배정하는데 선정된 연구소들 중에 대학은 단 두 곳이었다고 한다. 하나는 보스턴에 있는 MIT, 또 하나는 바로 여기 트로이에 있는 RPI다.


RPI는 알바니 건너편, 허드슨 강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에 있다. 도로변에 주차하고 가파른 계단을 통해 캠퍼스에 들어서면 트로이 시내가 한눈에 보인다.

미국 학교치고는 캠퍼스가 그리 큰 편은 아니다. 충분히 걸어 다닐 만하다. 잔디밭을 중심으로 한쪽은 옛날 건물들이 반대편에는 현대식 건물들이 있다. 잔디밭 한가운데엔 미술 조형물도 있다.

입구에서 가까운 쪽에 있는 RPI 100주년 기념관은 토목공학과가 사용하고 있는 것 같다. 근데 연혁을 보니 이 건물도 100살짜리다. 백주년 기념관이 또 다른 백 살. 현대 학문의 역사가 부럽기도 하다.

RPI 출신의 유명한 반도체 업계 사업가(Erik Jonsson, class of 1922)의 동상이 벤치에 앉아서 후배들을 기다리고 있다. 이 사람은 RPI 전자공학과 건물의 이름 주인이다. (Jonsson Engineering Center)

옛 교회를 닮은 컴퓨팅 센터, 강 건너에서도 보이는 최신식 건물인 아트센터 등... 오랜 시간 지나면서 옛날과 최신의 것이 섞여있는 모습이다. 

학생회관에서 기념품으로 머그컵을 하나 샀다. 세은이가 이런 곳에서 공부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도 인연인데 말이지...

(왼쪽) RPI입구. 학교는 언덕 위에 있다. (오른쪽) 유명한 반도체 업체 Texas instrument의 설립자 에릭 존슨의 동상. 코비드라 마스크를 쓰고 있다.
(왼쪽) Troy 강변에 있는 엉클 샘의 석상. (오른쪽) 1차 세계대전 미국 모병 포스터의 엉클 샘
트로이 : 2) 엉클 샘(Uncle Sam), "I Want You!"

매사추세츠 주 출신인 '새뮤얼 윌슨(Samuel Wilson, 1766~1854)'은 젊은 시절에 가난함을 벗어나고자 트로이까지 걸어와서 정착하여 정육사업을 시작했다.

새뮤얼 윌슨의 사업은 다행히 번창하여 소매 수준의 정육점을 넘어서 꽤나 큰 규모로 하게 되었고 군대에 납품하는 위치까지 되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신문에 새뮤얼 윌슨과 관련된 재밌는 기사가 하나 나게 된다.

윌슨이 군대에 납품한 육류는 미국 정부의 물품이니 'U.S.'라는 도장이 찍히게 되는데, 이것을 받은 병사들은 이 도장을 보고 'U.S. 가 United State를 말하는 게 아니라 고기 장사하는 트로이 Uncle Sam 아니냐.'라며 농담을 한다는 내용의 기사였다. 

그 이후로 새뮤얼 윌슨은 엉클 샘이라는 애칭을 얻게 되고, 엉클 샘은 미국, U.S. 를 대표하는 마스코트처럼 사람들 사이에 이야기가 전해졌다고 한다.

그런데 이렇게 이야기로만 전해지던 '엉클 샘'은 새뮤얼 윌슨이 죽고 난 이후인 미국이 1차 대전에 참전하면서 그 이미지가 구체화되기 시작한다. 모병 포스터에 엉클 샘을 활용하게 된 것이었다.

사실 새뮤얼 윌슨이 죽은 지 60년도 넘게 지난 시점이라 그 모습을 정확히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에, 그 당시 모병 포스터의 화가는 자신의 모습을 살짝 변형하여 엉클 샘의 이미지를 창조하였다고 한다. 그것이 우리가 많이 봐온 엉클 샘의 'I Want You' 모병 포스터이다. 

이렇게 '창조된' 엉클 샘은 미국의 상징이 되어 지금까지도 언급되고 미국, 특히 미국 정부를 대표하는 마스코트가 되었다.


트로이는 엉클 샘이 어려운 상황에 찾아와서 사업으로 재기하고 죽을 때까지 살았던 곳이다. 그래서 허드슨 강이 보이는 트로이 다운타운에는 엉클 샘의 석상이 있다. 다운타운이지만 조금 썰렁한 느낌이 든다.

막상 가보니 역시 다니는 사람이 별로 없다. 엉클 샘의 석상 사진만 찍고 강가 공원이나 구경하려는데, 엉클 샘 뒤에 있던 허름한 옷차림의 두 명의 아저씨가 우리에게 다가오며 인사를 한다.

"하이, 너네 여기 여행 왔니? 엉클 샘이 누군지는 알고 왔니? 내가 좀 알려줄까?"

내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덩치 큰 아저씨가 나는 이미 다 알고 있는 엉클 샘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술을 먹어서인지 치아가 빠져서인지 좀 웅얼거리는 느낌이라 다 알아듣기는 어려운데, 욕설을 섞어서 말하고 있다는 것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5분 정도? 부탁하지도 않은 얘기를 길에 서서 듣고 있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내 맘을 읽었는지, 얘기를 그만 마치고 우리에게 엉클 샘 이야기를 해준 진짜 이유를 말해주었다.

"재밌는 얘기 들었으니 나한테 팁을 좀 줘야 하지 않겠어? 너네한테 긴 얘기 해주는 것도 힘들었다고"

차라리 다행이다. '돈을 주면 가겠구나. 이 밝은 대낮에, 이 큰길에서 삥을 뜯기고 있다니...'

나는 $5달러를 건네주며 고마움(?)을 전했다. 더 달라면 더 줄 생각이었다. 여길 빠져나갈 수만 있다면야. 액수가 애매해서인지 약간 뚱한 표정으로 쳐다보더니 손을 들어 고맙다고 한다.

그들을 뒤로 한채,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발걸음으로 잽싸게 차에 올랐다. 휴, 이제 다행이다. 말로만 들었지 동네 분위기가 진짜 이 정도 일 줄이야...


다녀와서 DyAnn에게 이 얘기를 했더니, 다치고 오지 않아서 잘했다면서도 자기라면 한 푼도 안 줬을 것이란다. 하긴 그 놈들도 미국 할머니는 어쩌지 못했겠지.

잊지 못할 엉클 샘, 그저 관람비 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5짜리 미국 무용담이다. 싸게 샀다.


Continued... (3편에서 계속)


C. Parker

매거진의 이전글 30. 여행 8: 동네여행(1/3)-Albany, NY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