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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정 Nov 27. 2024

다행과 불행과 불운과 무운

@Daniel Olah by Unsplash


불운은 내 인생에 꽤 자주 얼굴을 내비쳤다고 생각한다. 아니, 어쩌면 운은 그럭저럭 괜찮았지만 불행의 침투가 잦았던 것 같다고도 생각한다. 열과 성을 다것치고 온전히 만족스러웠던 결과는 별로 없었다. 맞다, 이것은 내가 욕심 많아도 한 몫 한다. 적당한 집에서 가족들과 이런 저런 일로 다투며 지내고, 걸어다닐 수 있는 거리의 학교를 다니고, 같이 번화가로 놀러다닐 수 있는 친구들이 있었지만 마음 한 켠은 오랫동안 춥고 외로웠. 자존심이나 체면 따위의 문제로 누구에게 드러내보인 적은 없는 상처도 있었다. 밝고 명랑했던 나로서도 잦은 이사 때문에 친구들이 매번 사라지는 현상은 아무리 겪어도 적응이 되지 않았고, 유일하게 즐거웠던 미술 학원에 다닐 때조차 주말까지 통째로 납한데다 매번 바깥 음식을 사먹느라 뼈빠지게 바쁘고 아팠다. 그렇다고 항상 우울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니 누군가에게는 배부른 투정과 쓸데없는 자기연민으로 비칠지도 모른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20대에도 기쁘거나 행복하다는 생각을 하고 산 적은 많지 않았다. 부러 아픈 기억더 오래 남아 끊임없이 되새기게 되는 탓일까.


어쩌면 과거의 기억이 그리 행복하지 않게 느껴진 것은 내가 가지고 있었던 이상이 그저 아름답기만 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목표는 높았고, 그걸 성취하기에 내 능력은 역부족이었으며, 어쩌면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린 끝에야 겨우 도달할 수 있을 것이기에. 내가 있고 싶은 곳은 그저 무지개가 뜬 꽃밭같은 곳이었고, 취향이 비슷한 친구들과 함께 돗자리를 펴고 차를 나눠마시며 언제까지고 하하호호 농담이나 주고받으며 지내고 싶었다. 그게 나의 이상이었다. 스무살부터그것이 환상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닫곤 충실하게 욕심을 따철저히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따라갔다. 욕심이 나를 발전시키고 이상으로 데려다줄 것이라, 좋아하는 사람들과는 좋은 관계가 유지될 것이라고, 싫은 사람은 언제까지고 싫기만 할 것이라는 생각에 갇힌 채. 어린 날의 집은 스스로과거를 곱씹는 미련이라는 벌을 내렸다. 대에 못미치는 현실에 우울에서 쉬이 헤어나올 수 없는 시간들이 있었다. 어렵고 복잡한 일도 쉽고 단순하게 생각하던 내가 모든 일을 한 번 더 비틀어서 생각했고 모든 일의 이면을 의심했다. 사람을 좋아해서 많은 기대를 하고 있었고, 타인 잘못되었다기보다 기대감 자체가 깨지면서 마음에 생채기를 낸다는 것을 알았다. 대인관계에서 실패를 맛보고 한계를 경험한 이후부터 삶이 뜻대로 풀리지 않는다고 느껴온 것 같다. 작은 일 하나로도 오랫동안 생각하고 다시 숙고하고, 매번 두 번씩 생각하며 사니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스트레스가 늘어났다. 언젠가 이 세상에 사과나무 한 그루라도 심고 가는 게 아름다운 일이라고 생각했었지만, 그건 작아보이면서도 생각보다 아주 어려운 이상이라는 걸 깨달았다. 앞가림 하나만으로도 삶은 녹록치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확실한 것은, 우울, 불안, 부정적인 감정들과 이 세상의 모든 고통은 분명 무언가를 준다. 개개인이라는 원석은 아픈만큼 더 많이 또 더 섬세하게 조각된다. 모든 것을 가질 수도 없지만, 모든 것을 잃은 것 같은 절망도 영원하지 않다. 창조와 파괴는 서로가 있어야만 가능하듯이 무언가를 얻으면 무언가를 잃게 되고, 좋기만 한 일도 나쁘기만 한 일도 없다. 매일 나쁜 일이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설령 하늘이 무너질 듯 느껴지는 일이 생기더라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 모든 게 결국은 다 지나간다는 것이다. 역경은 오를 때는 힘들지만 정상에 깃발을 꽂으면 내 것이 되는 산 같은 존재다. 오르는 동안 이따금씩 흐르는 땀방울은 실낱같은 바람을 통해 의외로 행복이 멀리 있지 않다는 사실도 일깨워준다. 우리가 다른 곳에 정신이 빼앗겨 알아보지 못할 뿐, 행복은 이미 우리 곁에 산재해있다고 말이다. 우울은 내게 딱 한 가지, 삶에 대한 통찰력의 눈을 뜨게 해주었다. 그것은 한때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뒤틀린 마음이기도 했지만, 세상이 차려주는 먹음직스러운 점심에 독이 있는지 의심하고 먼저 확인해볼 수 있는 은수저와 같은 도구가 되었다. 사람들이 편하게 적은 문장 저변에 감춰진 굴곡과 평범한 생활 이면의 냉랭함, 혹은 보이지 않는 실낱같은 균열 따위를 헤아릴 수 있게 되었다. 빛이 강할수록 그림자도 짙고 선명하며, 추울수록 양말 한 켤레에도 온기를 느끼는 법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니 생각이 지나치면 고통이 선명해짐은 너무나 자명하다.


그런데, 모든 사람은 태어난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게 모두가 외면하고 싶은 진실이다. 죽으려고 사는 중이라면 이건 불행일까, 아니면 다행일까? 스티브 잡스는 죽음이야말로 인간의 최고 발명품이라고 했다. 때로는 죽는 것보다 사는 것이 더 고되고 힘든 때도 있으니, 죽음 과연 불편하기만 한 녀석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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