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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용지용 Jan 23. 2024

쿵이지(孔乙己)

루쉰 소설 번역

루진(魯鎮)의 술집 구조는 타 지방과 사뭇 달라서, 곱자처럼 생긴 술청이 거리를 향해 나있고,  따뜻한 물을 준비해 놓아 언제든 술을 데울 수 있게 돼 있었다. 정오나 저녁 무렵이면 일을 마친 사람들이 각기 4문(文) 어치 동전을 내 술 한 잔을 주문하고는——20년 전에 그랬고, 지금은 10문으로 올랐다—— 술청 가에 기대 뜨뜻히 마시며 쉬곤 했다. 거기에 1문을 더 쓰면 짭짤한 죽순 찜이나 회향두 한 그릇을 안주 삼을 수 있었고, 열 몇 푼까지 내면 육류나 생선이 나왔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짧은 옷을 입은 막일꾼이라 좀처럼 이런 호사를 누리는 일은 없었다. 장삼 차림의 손님들만이, 가게 앞켠에 마련된 방으로 뚜벅뚜벅 들어가 앉아 느긋이 먹고 마셔댈 수 있었다.


난 열두살 때부터 마을 어귀 셴헝(咸亨) 술집에서 점원으로 일했다. 주인어른은 장삼 차림의 손님 시중을 들기엔 내가 너무 멍청해보인다며, 나더러 바깥에서 일을 거들라고 했다. 바깥에서 술을 마시는 짧은 옷차림의 손님들은 쉬운 말을 썼지만, 왁자지껄 떠드는 바람에 알아듣기 어려운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들은 종종 술독에서 황주(黃酒)를 푸는 걸 두 눈으로 보고자 했다. 술병 바닥에 물이 있진 않은지 확인하고, 술병을 뜨거운 물에 담그는 모습까지 직접 보고서야 마음을 놓았다. 그런 삼엄한 감시 속에서 술에 물을 탄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며칠 지나지 않아 주인으로부터 그 일은 못 맡기겠단 말을 들었으나, 다행히 일을 소개시켜주신 분의 체면 덕분에 아예 짤리진 않았다. 대신 나는 고작 술이나 데우는 한직을 맡게 되었다.



이때부터 난 온종일 술청에 선 채로 맡은 일만을 수행했다. 실수할 일은 없지만 아무래도 단조롭고 지루한 일이었다. 주인은 험악하게 생긴 사람이었고, 손님들의 말투도 상냥하진 않아 가게는 활발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다만 쿵이지가 가게로 들어올때면 몇 가닥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는데, 그 때문에 나는 아직까지 그를 기억하고 있다.


쿵이지는 서서 술을 마시는 자들 중에선 유일하게 장삼을 입었다. 아주 큰 몸집에 얼굴빛은 창백했으며, 주름 사이에는 자주 상처가 패여있었다. 그는 희끗하게 헝클어진 수염을 길렀고, 장삼차림이긴 하나 더럽고 해진 게 십 년 넘게 깁지도 빨지도 않은 듯했다. 대화를 할 때 그의 입에선 '~이니라,~로다(之,乎,者,也)'따위의 아리송한 말이 튀어나오곤 했다.


그의 성이 공(孔)이었기에, 사람들은 습자본에 나오는 '상대인 공을기...(上大人孔乙己)'라는 알 듯 말 듯한 글귀에서 별명을 따 '쿵이지'라고 불렀다. 쿵이지가 가게에 오면 술을 마시던 모두가 그를 보며 웃어댔다. 어떤 이는 이렇게 소리치기도 했다. "쿵이지, 얼굴에 또 생채기가 새로 생겼구먼!" 그는 대꾸하지 않고 주인에게 "술 두 잔, 회향두 한 접시 주시오."라고 한 뒤 9문이나 되는 돈을 내놓았다.


그러면 부러 목청을 높이는 자들도 있었다. "자네 또 남의 물건을 훔쳤지!" 쿵이지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대답했다. "자넨 어찌 근거없이 남의 청백을 더럽히나?" "청백은 무슨! 어저께  허씨네 집 책을 훔치려다 거꾸로 매달려 맞는 걸 봤다구!" 쿵이지는 푸른 핏줄이 줄줄이 서도록 얼굴을 붉히며 항변했다. "책을 훔치는 것은 도둑질이 아니라네...책을 훔치는 건! 책 읽는 자가 하는 일을 도둑질이라 할 수 있는가?" 이어지는 말들은 좀체 이해하기 어려웠는데, '군자는 본래 곤궁하니

'라든가 '~이리오?' 따위였다. 그 말을 듣고는 모두들 와아 웃음을 터뜨렸고, 가게 안팎으론 쾌활한 기운이 넘실댔다.


사람들의 뒷소리에 따르면, 쿵이지는 원래 글을 깨나 읽었으나 생원시에 끝내 붙지 못했다 한다. 생계를 꾸릴 방도가 없어진 그는 점차 곤궁해져 밥을 빌어먹게 되었다. 다행히 글씨 하나는 잘 써서, 남에게 책을 베껴 써주고 밥을 얻어먹곤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성정이 게을렀던 그는, 일을 맡아도 며칠을 앉아있지 못해 책이며 먹 종이 벼루를 들고 종적을 감추기 일쑤였다. 이런 일이 몇번 있은 후엔 그에게 필사 일을 맡기는 사람도 없어졌다. 쿵이지는 할 수 없이 가끔 도둑질을 했다. 하지만 우리 가게에선 남들과 달리 품행이 발랐던 그는 외상을 질질 끄는 법이 없었다. 가끔 돈이 없을 때는 흑판에 그의 이름이 적히는 일도 있었지만, 그는 달이 채 안되어 깨끗이 갚고는 흑판에 적힌 자신의 이름을 지우곤 했다.


쿵이지가 술 반 잔을 마셨을 때 즈음, 붉어진 얼굴이 점차 원래대로 돌아오자 옆에서 또 물어왔다. "쿵이지, 자네 진짜 글을 알기는 하나?" 쿵이지는 그를 쳐다보고는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기색을 띠었다. 사람들은 이어서 말했다. "자네는 어떻게 생원조차도 따지 못했나?" 쿵이지는 이번엔 듣자마자 풀이 죽어 초조해했는데, 흙을 한 겹 바른 듯 낯빛이 어두워져있었다. 쿵이지의 입에서 웅얼웅얼 나온 말은, 이번엔 전부 '~니라', '~로다' 따위라서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사람들은 와아 웃어댔고, 가게 안팎으론 쾌활한 기운이 넘실댔다.


이럴 때 내가 함께 따라웃어도 주인은 날 결코 나무라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이 쿵이지를 볼 때마다 이런저런 질문을 던져 사람들을 즐겁게 해 주었다. 쿵이지는 그들과는 말을 섞을 수 없단 걸 알고, 대신 아이들에게 말을 걸었다. 언젠가 그는 내게 물었다. "너, 공부를 해본 적이 있느냐?" 난 대충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그는 말했다. "공부를 했다고 하니, 내 한번 시험을 해보마. 회향두의 회茴 자는 어떻게 쓰느냐?"


나는 밥이나 빌어먹는 사람이 무슨 시험을 하냐고 생각해 고개를 돌리곤 더 상대하지 않았다. 쿵이지는 한참을 기다리더니니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쓰지 못하는구나? 내 가르쳐 줄테니, 잘 기억하거라. 이 글자들은 꼭 알고 있어야 한다. 훗날 가게 주인이 되면, 외상 장부를 작성할 때 써야할 거 아니냐."


나는 나의 위치부터 가게 주인까지의 거리가 너무나 멀게 느껴지기도 했고, 주인은 한번도 회향두 따위를 장부에 올리는 법이 없었기에 우습고 귀찮기도 하여 대충 대답해 두었다. "누가 가르쳐달랬어요, 초두변艸 밑에 돌 회回 자 아니에요?" 쿵이지는 매우 기쁜 얼굴로, 두 가닥 긴 손톱으론 상을 두드리고 고개는 까딱거리며 말했다. "그렇지 그렇지! 회 자는 네 가지 서법이 있는데, 알고 있느냐?" 나는 더욱 짜증이 나 입을 비쭉거리며 자리를 떴다. 그때 쿵이지는 손톱에 술을 찍어 상 위에 글자를 쓰려고 하던 참이었는데, 내가 전혀 열성적이지 않은 걸 보고는 안타까운 듯 한숨을 내뱉었었다.


몇 차렌가 인근 꼬마들이 웃음소리를 듣고는 왁자지껄 구경 와 쿵이지를 둘러싼 적이 있었다. 그는 꼬마들에게 회향두를 한 사람당 하나씩 주었다. 그들은 회향두를 다 먹고도 여전히 접시를 쳐다보며 떠나지 않고 있었다. 쿵이지는 허둥지둥 다섯 손가락으로 접시를 감싸고 허리를 굽히며  "이미 얼마 없어, 얼마 없다구."라고 말하더니, 허릴 펴고 다시 콩을 보곤 도리질을 치며 혼잣말을 했다."많지 않도다, 많지 않도다! 많느냐? 많지 않도다." 꼬마들은 한바탕 웃으며 뛰어갔다.


쿵이지는 이렇게 사람들을 쾌활하게 해 주었다. 하지만 그 없이도 사람들은  잘 지냈다.


어느날, 아마 추석 사나흘 전이었을 것이다. 주인이 천천히 장부를 보더니, 흑판을 떼내며 문득 말했다. "쿵이지가 안 온 지 오래군. 아직 19전이나 외상이 달려있는데 말이야!" 그제서야 난 그가 오랫동안 안 왔다고 생각했다. 술 마시던 한 사람이 말했다. "어떻게 올 리 있겠어? 다리가 부러졌는데 말이야." "아하." "또 도둑질을 한 게지. 이번엔 머리가 어떻게 된 건지, 딩(丁) 거인네 집으로 갔다구. 그 집 물건을 훔칠 수 있겠어?" "그리고 어떻게 됐는데?" "어떻게 되기는. 시말서를 쓰고는 두들겨 맞았지. 하룻밤을 꼬박 두들겨 맞아서 다리가 부러졌다구." "그리곤?" "그리곤 다리가 부러졌다니까." "부러져서 어떻게 됐는데?" "어떻긴...몰라, 아마 죽었을거야." 주인은 더 이상 묻지 않고, 하던대로 천천히 장부를 살폈다.


추석이 지난 후, 가을 바람이 하루가 다르게 쌀쌀해지는 걸로 보아 초겨울이 다가오고 있었다. 난 종일 불을 쬐며 면저고리를 걸쳐야 했다. 어느 날 오후 반나절엔 손님이 한 명도 찾아오지 않아, 나는 앉은 채 눈을 붙이고 있었다. 그때 문득 목소리가 들려왔다. "술 한 잔 데워주시오." 매우 나지막했지만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소리나는 쪽을 쳐다보니 사람이 없었다. 벌떡 일어나 밖을 내어다보니 바로 쿵이지가 술청 밑에서 문턱을 마주한 채 앉아있는 것 아닌가.


그의 얼굴은 검고 초췌하여 꼴이 말이 아니었다. 터진 겹저고리 차림에 두 다리를 책상다리처럼 비틀어 놓았는데,  망태를 바닥에 깔고 그걸 새끼줄으로 고정해 어깨에 동여메고 있었다. 그는 날 보고는 또 "술 한 잔 데워주게"라고 말했다. 주인도 고개를 내밀어 말했다. "쿵이지인가? 아직 19전이나 외상이 달려있다구!" 쿵이지는 시무룩해하며 고개를 들고 대답했다. "그건...다음에 갚겠소. 이번엔 돈이 있으니, 좋은 술로 주시오."


주인은 언제나처럼 웃으며 그에게 말을 걸었다. "쿵이지, 또 물건을 훔쳤구만!" 하지만 그는 이번엔 딱히 해명하려들지 않고 "비아냥대지 마시오" 한 마디만 하는 것이었다. "비아냥? 도둑질이 아니면 왜 다리가 부러졌는데?" 쿵이지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넘어져 부러진 거요...넘어져...넘어졌다구." 그는 그 일을 그만 끄집어내길 애원하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때는 이미 몇 사람이 모여 주인과 함께 낄낄거리는 중이었다. 난 술을 데워 받쳐들고는 문턱에 놓아두었다. 그는 헤진 주머니에서 4문의 목돈을 내 손에 쥐어줬는데, 손이 진흙투성이인 걸로 보아 그걸로 여기까지 기어서 온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술잔을 비웠고, 주위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이야기소리 속에서 손으로 느릿느릿 기어나갔다.


그후 한참동안 쿵이지를 볼 수 없었다. 세밑이 가까워질 즈음 주인은 흑판을 떼내며 말했다. "쿵이지 앞으로 아직 19전이나 달려있군!" 다음해 단오가 되었을 때 그는 또 "쿵이지 앞으로 아직 19전이나 달려있군!"이라고 말했으나, 추석이 되어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또다시 세밑이 다가왔을 무렵에도 쿵이지는 나타나지 않았다.


아직까지도 그를 보지 못했으니, 아마도 쿵이지는 정말 죽었을 것이다.

19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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