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의 가을
가을... 어느 곳에서 맞이하든 간에, 가을은 항상 멋진 계절이다. 하지만 북방에서 맞이하는 가을은 특히나 맑고, 고즈넉하고, 애잔하다. 내가 먼 여정을 불사하고 항저우에서 칭다오로, 칭다오에서 베이핑(北平)으로 한달음에 달려온 것 또한 요 가을이란 녀석을 위해서다. 옛 수도였던 이 도시에서 가을을 맛보려는 것이다.
강남에도 물론 가을은 있다. 하지만 초목이 천천히 시들고, 공기가 축축하며, 하늘빛이 묽은데다 비까지 자주 오고 바람이 드물다. 그래서 쑤저우, 상하이, 항저우, 샤먼, 홍콩이나 광저우 사람들 사이에 끼여있다 보면, 미세한 청량감 외엔 가을의 맛과 색, 정취나 자태를 배부르고 온전하게 만끽할 수 없는 것이다. 아름다운 꽃이나 명주(名酒)는 반쯤 피었거나 알딸딸한 정도가 즐기기 딱 즐기기 좋다지만, 가을을 음미할 땐 그런 방법은 통하지 않는다.
북방에서 가을을 보내지 못한 지 벌써 십여 년이 되어간다. 남방에서 가을을 맞을 때면, 항상 베이핑 생각이 났다. 도연정(陶然亭)의 갈대꽃이며, 조어대(釣魚台)에 하늘거리던 버들가지, 서산(西山)의 벌레 울음소리, 옥천(玉泉)의 달밤, 담자사(潭柘寺)에서 울리는 종소리 같은 것들 말이다. 베이핑 황성(皇城) 시가지의 허름한 방에서 일찍 일어나 진한 차를 우리고 정원 쪽으로 앉으면, 에메랄드처럼 푸르른 하늘이 높디높게 펼쳐지고 그 밑으로 푸드득 날아가는 비둘기 소리가 들려오곤 했다. 홰나무 아래서 동쪽을 향해 줄기줄기 쏟아져 나오는 햇빛을 세어보다가, 허름한 담벼락에 핀 새파란 나팔꽃 꽃잎을 조용히 보고 있노라면, 굳이 외출을 하지 않아도 가을의 풍미가 절로 느껴졌다. 나팔꽃 얘기를 좀 더 해보자면, 나는 남색이나 흰색 나팔꽃이 제일이고 보랏빛은 그다음이며, 담홍색은 가장 하품이라고 본다. 만약 나팔꽃 밑에 길쭉한 가을 풀까지 듬성듬성 나 구색이 갖춰진다면 더할 나위가 없을 게다.
북방의 가을을 장식하는 홰나무 역시 빠지면 섭섭하다. 꽃인 듯 아닌듯한 꽃술이 아침에 일어나 보면 잔뜩 깔리는데, 밟아보면 소리도 향도 없이 지극히 미세하고 보드라운 감촉만 전해진다. 누군가가 빗자루로 한번 쓸고 간 나무 그늘 밑에는, 비 자국이 먼지에 물결무늬를 남겨 섬세하고 한적하여 문득 쓸쓸함 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 '떨어진 오동잎을 보고 가을이 왔음을 아네梧桐一葉而天下知秋'라는 옛말은 아마 이처럼 오묘한 정취를 가리키는 게 아닐까 싶다.
가을 매미의 쇠잔해 가는 울음소리는 더욱 북방의 특산으로 꼽을 만하다. 남방에선 교외나 산에서만 들을 수 있는 매미 울음소리리를, 나무가 많고 가옥이 낮은 베이핑에선 어디서든지 들을 수 있다. 베이핑에선 귀뚜라미나 쥐와 마찬가지로 집집마다 매애앰 소리가 울려 퍼지니, 매미가 일종의 집에서 기르는 곤충인 셈이다.
그리고 가을비가 있다. 북방의 가을비는 남방에 비하면 더욱 기묘하고, 운치 있고, 그럴듯하게 내린다.
찌뿌둥한 하늘 아래로 돌연 시원한 바람이 불다가, 쏴아아—— 하고 비가 내려오곤 한다. 한탕 비가 지나간 후에는 구름이 점점 서쪽으로 말려들어가 하늘이 개이고 해가 다시 얼굴을 비춘다. 한가한 동네 사람들은 두툼한 흑색 홑옷이나 겹저고리 차림에 곰방대를 물고, 비에 젖은 다리 그림자를 지나간다. 다리 어귀 나무 밑에 서서 아는 사람을 만나면, 아주 느릿느릿한 어조로 서로 탄식하듯 인사를 나누곤 한다.
"어이, 날씨 차암 시원하쟤?" (여기서 원- 을 매우 길게 끌어야 한다.)
"그니까 말이야. 한탕 가을비가 오니 시원하네!"
북방 사람들은 '한바탕'을 '한탕'이라고 발음하는데, 규칙엔 안 맞지만 입에 착 감겨서 오히려 멋드러진다.
북방의 과실수도 가을에 접어들면 기묘한 정취를 풍긴다. 그중 으뜸은 대추나무인데, 집집마다 마당 구석, 담장, 뒷간 옆, 부엌 입구에 한 그루씩은 자라고 있다. 올리브나 비둘기알 같은 대추알이 타원형의 잎사귀 사이로 노르스름한 연둣빛을 띨 때가 바로 가을의 전성기이다. 대추잎이 시들고 대추가 붉그스름해질 즈음엔 서북풍이 불어 북방은 먼지와 모래로 뒤덮이게 된다. 따라서 대추, 감, 포도가 8할에서 9할 익었을 즈음만이 북방에서 맑은 가을을 즐기기 가장 좋은 때이며, 1년에 다시없는 GoldenDays(황금시대)인 것이다.
어떤 비평가들은 중국의 문인, 특히 시인들이 퇴폐적인 색채가 짙은 까닭에, 중국 문학에 가을을 송찬하는 작품이 유난히 많은 거라고 지적한다. 하지만 외국의 시인이라고 무엇이 다르랴? 외국문학에 있어 일천한 내 학식을 드러내고 싶진 않지만, 감히 말하건대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태리의 시집이나 각국 Anthology(문학선집)을 뒤져보면 분명 시인들이 가을을 찬양하거나 흐느낀 구절을 한 아름 찾을 수 있을 게다. 저명한 대시인들의 장편 전원시나 계절시의 하이라이트는 언제나 가을에 있어, 가을을 묘사한 부분이 가장 탁월하고 맛깔나다. 감각이 있는 동물이나, 흥취를 가진 인간이나 가을이란 계절에 심원하고 날카롭고 쓸쓸한 감정을 갖는 건 똑같은 것 같다.
가을에 접어들어 어쩌지 못하는 깊은 감정에 사로잡히는 건, 꼭 시인뿐만 아니라 감옥의 수감자에게도 마찬가지리라고 난 생각한다. 가을을 느끼는 감정에 국적이나 인종, 계급의 구별이 어찌 있으랴? 허나 중국엔 예부터 '가을을 탄식하는 선비秋士'란 표현이 있고, 구양자(歐陽子)의 <추성秋聲>이나 소동파의 <적벽부赤壁賦>가 교재에 널리 실려있는 걸로 보아, 중국의 문인과 가을은 각별한 사이였음이 틀림없다. 어쨌든, 가을의 깊은 맛, 그중에서도 특히 중국의 가을은 북방에서라야 속살까지 느낄 수 있다.
남방의 가을에도 물론 독특한 풍격이 있다. 이십사교(二十四橋)에 걸린 밝은 달이나, 전당강(錢塘江)의 가을 물결, 보타산(普陀山)의 서늘한 운무, 여지만(荔枝灣)의 시들어가는 연꽃 등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그 색깔은 희미하고 뒷맛이 오래 가지 않는다. 남방과 북방의 가을의 차이란, 마치 황주와 빼갈, 죽과 찐빵, 농어와 대게, 누렁개와 낙타의 차이와 같다 할 수 있다.
가을을, 북방에서 맛보는 가을을 잡아둘 수만 있다면...
나는 내 목숨의 삼 분의 이를 내놓고, 나머지 삼 분의 일만 누려도 좋겠다.
1934년 8월, 베이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