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용지용 Jan 23. 2024

돈(豚) 형을 떠올리며

왕샤오보(王小波)산문 번역

돈(豚) 형을 떠올리며


생산대에 있을 때, 나는 돼지도 길러보았고 소도 길러보았다. 그러나 사람의 보살핌 없이도 이 동물들은 알아서 잘 살아갈 터였다. 이리저리 실컷 돌아다니다, 굶주리면 먹이를 먹고 목마르면 물을 마시고, 봄철에는 사랑을 나누는 삶을 영위하겠지. 물론 이 저차원적인 삶에 인간들의 칭찬을 받을만한 점 따위는 없을 것이다.


인간들이 온 이후로 계획이라는 것이 동물들의 삶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소 한 마리, 돼지 한 마리마다 삶의 임무가 부여되었는데, 대부분의 경우 그 임무란 것은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소에게는 노동의 임무, 돼지에게는 살을 찌우는 임무가 부여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억울해할 것까진 없다고 본다. 8대 모범극*이나 보는 것 외에 낙이라곤 없었던 당시 나의 생활도, 사실 그보다 딱히 낫다고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문화 대혁명 시기 선전용 연극


극소수 돼지와 소에게는 차별화된 임무가 맡겨졌다. 돼지의 경우, 암퇘지와 씨돼지만은 먹고 마시는 것 말고도 다른 일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도 딱히 그 일을 즐겁게 여기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씨돼지의 임무는 짝짓기를 수행하는 것이었다. 바꿔 말하면, 그는 정책 차원에서 농장의 공식 난봉꾼으로 승인된 셈이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죽어도 암컷 위에 올라타려 하지 않았고 거세된 다른 수퇘지들처럼 점잖은 군자 행세를 하는 것이 아닌가. 번식의 임무를 짊어진 암퇘지의 경우도 상황은 비슷하여, 그들 중 일부는 자기 새끼를 먹어치우기도 했다. 한마디로, 인간의 계획으로 인해 돼지들은 고통에 허덕이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묵묵히 받아들였다. 어찌 됐든, 돼지는 돼지니까 말이다.


삶에 이런저런 제약을 걸어 놓는 것은 인간 고유의 습성이다. 그들은 동물의 삶뿐 아니라 자기네 삶까지도 제약하려 든다. 다들 고대 스파르타에 대해서 들어보았을 것이다. 스파르타인들은 삶에서 흥취라고는 느끼지 못할 정도로 통제당하며 지냈는데, 그 목적은 죽음을 무릅쓸 수 있는 남성 전사와 아이를 낳는 용도의 여성 번식 기계를 만들어 내기 위함이었다. 어쩐지 전자는 마치 싸움닭 같고, 후자는 암퇘지 같다. 이 두 동물은 특별한 구석이 있긴 하지만, 내 생각에  분명 자신의 삶에 만족하진 않을 것 같다. 하지만 불만족한들 별 수가 있겠는가? 인간도 그렇고 동물도 그렇고, 자신의 운명을 쉽게 바꾸기란 힘든 법이다.


지금부터 내가 말하려는 돼지는 여느 돼지들과는 달랐다. 내가 돼지 키우는 일을 맡았을 때, 그는 이미 네다섯 살쯤 먹은 후였다. 그의 본분은 고기용 수퇘지였으나, 검고 호리호리한 몸매를 가졌고 두 눈동자는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그는 산양처럼 민첩하여 1 미터나 되는 울타리를 단숨에 넘을 수 있었다. 양돈장 축사 지붕까지 뛰어오르기도 했는데, 그 모습은 흡사 고양이와 같았다. 그렇게 그는 얌전히 우리에 머무르는 법 없이 언제나 곳곳을 어슬렁거리며 다녔다. 돼지를 키워본 적이 있는 지식청년*들은 하나같이 그를 애완동물처럼 아꼈는데, 나도 그중 하나였다. 그가 지식청년들에게만 점잖게 굴었기 때문이었다. 다가오는 사람이 지식청년들이라면 3미터 이내 접근이 허용되었으나, 다른 사람인 경우 그는 달아나버리곤 했다. 그는 수퇘지라서 따져보면 일찌감치 거세되었어야 했다. 하지만 사람이 거세용 칼을 아무리 몸 뒤로 숨기며 접근해 봐도, 그가 금세 낌새를 알아채고 눈을 부라리며 꾸우-꾸우- 격렬히 포효하는 것이었다.


*문화 대혁명 시기 농촌으로 하방 된 젊은 학생들을 가리킴


나는 그에게 항상 고운 쌀겨를 끓인 죽을 먹였다. 그가 죽을 다 먹은 후에야 쌀겨를 풀밭의 돼지들에게 던져주었다. 질투의 눈빛으로 지켜보던 돼지들이 온 양돈장이 떠나갈 정도로 처량하게 곡소리를 내질러대도, 그와 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배가 부르면 그는 지붕으로 뛰어올라가 햇볕을 쬐거나, 이런저런 소리를 흉내 내곤 했다. 자동차 소리, 트랙터 소리 등을 흉내 내었는데 매우 비슷하게 들렸다. 하루 종일 그가 종적을 감추는 날이면, 나는 그가 암퇘지를 찾아 인근 마을로 내려간 것이라 짐작했다. 이쪽에도 암퇘지가 있지만, 하나같이 우리에 갇힌 채 과도하게 임신한 탓으로 몸매가 형편없었다. 더럽고 냄새가 나는 그 암퇘지들에게 그는 눈길을 주지 않았다. 반면 마을의 암퇘지들은 조금 봐줄 만했다.


이 돼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전설 같은 일화가 전해오고 있다. 하지만 내가 돼지를 기른 시간이 짧아 앎에 한계가 있기에, 여기선 언급하지 않으려 한다. 어쨌든 돼지를 길러봤다는 지식청년들은 빠짐없이 그를 좋아했고, 그의 독특하고도 지조 있는 품격에 빠져들었다. 그들은 그가 털털하면서도 멋스럽다고 말했다. 하지만 일반 일꾼들의 입장은 달랐다. 낭만이라곤 없는 그들에게 그는 그저 발랑까진 돼지일 뿐이었고, 지도자 동지는 그를 미워하며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었다. 여기에 얽힌 이야기는 조금 뒤에 하도록 하겠다. 나로 말하자면 그를 좋아할 뿐만 아니라 존경하여, 내가 십여 년이나 더 나이를 헛먹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를 '돈 형(兄)'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앞에서 말했듯, 돈 형은 각종 소리를 내는 데에는 달인이었다. 나는 돈 형이 사람의 말도 배워서 서로 흉금을 털어놓을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으나, 그것까지는 그에게 무리였다. 그렇다고 돈 형을 나무랄 수는 없다. 인간과 돼지의 말은 너무나 다르기 때문이다.


나중에 돈 형은 기적(汽笛) 소리를 배워 흉내 냈는데, 이 재능이 화를 부르고 말았다. 우리 생산대엔 제당 공장이 있었는데, 정오가 되면 기적소리가 한 번 울려 일하는 순서가 바뀜을 알렸다. 우리 부대도 밭에 나가 일을 하다가 이 기적소리를 듣고 마무리를 지어 돌아가곤 했다. 친애하는 돈 형은 매일 오전 10시경 지붕 위에 올라 기적소리를 연습했는데, 밭에 있던 사람들이 그걸 듣고 돌아오는 일이 일어났다. 제당 공장에서 울리는 기적소리보다 1시간 반이나 빠른 시간에 말이다. 까놓고 말해서 돈 형을 탓할 수도 없는 게, 돈 형이 무슨 증기보일러도 아니고 돼지 울음소리와 진짜 기적소리는 분명 구별이 있을 터였다. 그래도 일꾼들은 구별하지 못했다며 아득바득 우겨댔다.


지도자 동지는 이에 회의를 열었고, 돈 형을 춘경(春耕)을 망친 반동분자로 낙인찍었다. 그러고는 이 건을 '대중독재'의 정신으로 처리하기로 결정했다. 그 대중독재의 정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돈 형을 걱정하진 않았다. 왜냐하면 대중독재가 밧줄과 돼지 잡는 칼을 의미하는 한, 아무 소용도 없으리란 걸 알았기 때문이다. 선임 지도자 동지도 그런 방법을 시도했었는데, 백 명이 덤벼들어도 그를 잡지 못했고 개를 풀어도 소용없었다. 돈 형은 마치 한 발의 어뢰처럼 개들을 들이받아 저 멀리 내동댕이쳐버렸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번엔 제대로였다. 지도 위원이 스무 명이 넘는 인원을 데리고 왔는데, 손에는 54식 권총이 들려있었다. 부지도원도 화승총을 든 열몇 명의 인원을 데려왔다. 그들은 두 갈래로 나뉘어 양돈장 바깥 공터에서 돈 형을 포위해 버렸다. 이를 지켜본 나는 내적 갈등에 휩싸였다. 그간 돈 형과 쌓은 정으로 따지면, 나는 그를 위해 도살용 칼이라도 빼들고 돌격하여 그와 함께 어깨를 맞대고 싸우는 게 맞았다. 하지만 나는 이런 괴상한 일로 세간의 이목을 끌고 싶진 않았다. 돈 형도 어쨌든 돼지는 돼지였기 때문이다. 한 가지 이유가 더 있는데, 어쩌면 이것이 가장 핵심이었지 않나 싶다. 나는 감히 지도자 동지에게 반항할 순 없었다.


좌우지간 나는 한구석에서 광경을 지켜보았는데, 돈 형의 침착한 모습에 찬탄을 금할 수 없었다. 그는 냉철하게 권총과 화승총의 사선이 연결되는 지점으로 몸을 움직였고, 사람이 고함을 지르고 개들이 짖어대도 그 선을 떠나지 않았다. 이렇게 하면, 권총을 든 사람들이 화승총을 든 사람들 쪽을 향해 쏴버리게 되며,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양측이 동시에 발포하면 양측이 다 총알을 맞고 죽을 위험이 있었다. 돈 형의 경우엔 몸집이 작기 때문에 피격될 확률이 적었다. 이 방법을 통해 비록 겹겹이 포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돈 형은 틈새를 돌파하고 멋들어지게 빠져나갈 수 있었다.


그 후로 나는 돈 형을 사탕수수밭에서 한 번 볼 수 있었다. 그의 입에는 송곳니가 자라 있었다. 그는 나를 알아보았으나 내가 다가가는 것을 허락하진 않았다. 그의 냉담함에 나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지만, 한편으론 꿍꿍이를 알 수 없는 인간들과 거리를 유지하려는 그의 방법이 옳다고 생각했다.


나는 벌써 마흔이 되었다. 그동안 나는 돈 형만큼 삶의 제약에 아랑곳하지 않으며 사는 사람을 만날 수가 없었다. 반대로, 나는 남의 삶에 제약을 걸려고 드는 작자들과, 남에게 통제당하는 삶을 살면서도 태연자약한 사람들은 많이 보았다. 바로 그런 연유로, 나는 줄곧 돈 형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1996년 싼롄생활주간(三聯生活周刊) 잡지에서


작가의 이전글 장자, 냉담함 이면의 뜨거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