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우선 본 글을 보시는 분들은 [어? 이 매거진 전체 제목이 '웹소설 소재 모음집' 아니었나? 갑자기 무슨 자사주 취득? 배임? 이건 뭥미?] 라고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그렇게 봐 주신 분들께 정중히 감사드리며, 양해 부탁드립니다.
전체 제목을 웹소설 소재 모음집으로 하고 있고 대부분의 챕터를 (약간은 황당한) SF 소재로 채우고 있습니다만, 가끔은 현실과 관련된 글도 올리고 있긴 합니다. 또 가끔은 '현실물'이라고 제 나름대로 분류한 장르의 글을 쓰기도 하죠. 상업적 성과를 위해 19금을 곁들이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어쨌든 현실 그 자체를 소재로 한 글도 쓰긴 씁니다.
그러다 보니 가끔 현실 기업 분쟁에 대한 글도 올립니다. 제 나름대로는 나중에 '현대에 환생한 가후'를 주제로 한 기업물을 쓰기 위해 준비하는 것인데, 본 글 읽어 주시는 독자님들께서도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서론이 너무 길면 안 되죠. 본론으로 넘어가겠습니다.
2. 본론
(1) 고려아연 경영권 분쟁
어차피 공론화된 내용이니 그냥 기업 실명 거론하고 시작하겠습니다. 2024년 9월부터 시작된 '고려아연 경영권 분쟁' 건입니다.
대략 요약하면,
- 원래 고려아연은 최씨 + 장씨 두 가문이 공동으로 창업하고 경영
- 이게 2세 3세로 내려오면서 틀어짐. 최씨일가 쪽이 고려아연 경영권을 갖고 있으나, '영풍'을 소유한 장씨 일가 쪽은 불만이 많았던 것 같음
- 영풍이 사모펀드 MBK를 끌어들여 지분율을 높이기 시작함. 예전 시장가격보다 약 +50% 비싼 가격으로 공개매수하겠다고 선언
- 고려아연 경영권을 쥐고 있는 최씨일가 쪽도 반격 개시. 단, 최씨일가의 자금력으로는 직접적인 대항 매수를 할 수가 없음
- 대항 방안으로 나온 게 바로 '자사주 취득'. 시장에 풀려 있는 소액주주 지분을 (경영자 최씨일가가 아닌) 고려아연이 직접 매수하여 상대방 영풍+MBK 측의 지분율 상승을 막는 전략
- MBK 측은 고려아연 경영자 측이 자사주 취득으로 방어할 거라는 점을 예측하고 있었음. 공개매수를 선언할 때 이미 고려아연의 자사주 취득을 금지하는 가처분을 제기함.
- 그런데 해당 가처분이 기각됨. 즉, 고려아연은 자사주를 취득할 수 있음.
- 다만, 자사주 취득 방법이 그리 깔끔하지는 않음.
통상적인 자사주 취득은 '이익잉여금'으로 진행. 즉, 회사가 돈을 잘 벌고 있을 때 시장에 유통되는 주식의 주가관리 측면에서 자사주를 사들이고 / 이후 해당 자사주를 통매각하는 방법으로 현금화하거나 혹은 주주의 이익을 위해 소각하여 주가를 높이는 식으로 활용
(* 자사주 소각을 할 경우, 회사에 새로 유입되는 현금은 없음. 총 발행 주식 수가 줄어들면서 남아 있는 주식의 가치가 상승하긴 하나 현금유동성 측면에서 본다면 영 별로임.)
- 그리고, 고려아연은 자사주를
1) 평소 시장가격보다 더 비싼 가격으로
2) 유보해 놓은 이익잉여금이 아니라 기업어음발행 / 회사채발행 / 금융권 차입 등의 방법으로 새로 조달한 자금을 갖고
진행해야 함. 영풍+MBK의 경영권 공격을 방어할 수 있는 수준으로 자사주를 매입하려면 대략 2조원 이상의 자금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서는 신규로 자금을 조달해야 하는 상황
이라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MBK+영풍 측은 위 자사주 취득 방식이 배임(背任)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자사주 취득 자체에 대한 금지가처분은 기각되었는데 이에 대해 항고하지는 않고 '공개매수 방법으로 자사주를 취득하는 것은 회사에 회복할 수 없는 손해를 끼칠 수 있으므로 금지해야 한다'는 취지의 새로운 가처분을 제기하기도 했죠.
이게 배임일까요?
우선 결론부터 말씀드리고 가면, 제가 경험한 기존 선례 상으로는 배임이 될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자사주 같은 회사의 유동자산을 너무 싸게 팔거나 / 너무 비싸게 사서 회사에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손해가 발생하는 경우에는 (업무상) 배임으로 인정되는 것 같더군요.
아래에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2) 기존 배임 인정 사례 : 동부건설 자사주 매각
여기서도 회사 실명을 바로 거론했습니다. 이미 대법원 판결까지 나온 사건이고, 그 때 당시의 동부건설과 지금의 동부건설은 주인이 달라졌으며, 해당 배임행위가 일어난 시점부터 기산하면 20년이 훌쩍 넘은 사건입니다. 회사 실명 정도는 거론해도 문제없을 것 같네요.
과거에 대한민국 건설업계에서 7~8위 정도 됐었고 중동에서 껌 좀 씹었으며 2000년대 초반까지 관급토목공사(주로 도로, 교량 등)에서 2~3위를 유지했던 회사 동부건설. 그 때는 잘 나갔습니다. 제가 신입사원으로 입사하던 2005년 경에도 나름 도급순위 13~15위 급이었고 안정적으로 국가공사를 수주할 수 있는 회사였죠.
그리고 IMF를 극복했다고 스스로 자랑하는 회사이기도 했습니다. `90년대 말의 어른이들에게 호환 마마 전쟁보다 더 무서운 재앙이었던 IMF를 무사히 잘 넘겼다는 게 2005년 당시 회사 소개에 빠지지 않고 등장했었습니다.
(제가 신입사원 교육을 마치고 첫 줄근을 하여 회식을 했을 당시, 차장님 한 분은 "삼성전자가 망할 수는 있어도 동부건설은 안 망해!" 라고 호언장담을 하셨죠. 그 말 나오고 나서 8년 만에 법정관리(회생) 신청하고 회사 주인이 바뀌긴 했습니다만... 뭐 자신감의 표현이라고 이해합시다.)
다만, 동부건설도 IMF를 100% 깔끔하게 넘긴 건 아니었습니다. IMF 당시에 자사주를 헐값에 매각했다는 혐의로 당시 오너(회장)에 대한 업무상 배임 소송이 진행중이었거든요.
이 사건의 요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 IMF로 인해 모든 건설회사들이 폭망의 위기에 직면. 현대건설을 비롯한 굴지의 회사들이 픽픽 쓰러지고 있었음
- 동부건설 또한 위기였고 주가가 1/20 토막으로 곤두박질 치게 됨
- 이 상황에서 동부건설은 부채비율 감축 및 현금유동성 확보를 위해 '보유 중인 자사주(약 30% 수준)'를 오너에게 '시장가격'으로 매각한다고 결정함
- 검찰은 이 자사주를 매각하는 과정에서 '경영권프리미엄'을 붙이지 않은 것이 업무상 배임에 해당한다는 취지로 기소
해당 사건은 '동부골프장 지분 매각' 건과 병합되어 진행되었는데, 동부골프장 건은 총 발행 주식 2500만 주를 '1주 당 1원'에 오너(회장)에게 매각한 건이었습니다. 골프장 하나를 2500만원에 판 거죠...
동부골프장 건은 1심부터 유죄였습니다. 골프장 토지 가격만 해도 100억원 단위를 넘나들 텐데 아무리 IMF 영향이 있었다고 해도 2500만원은 너무했습니다. (너무해서 너무해 just like T.T) 부채비율이 높고 당장 적자가 난다고 해도 해당 토지 대출금액을 뺀 잔존 부동산 가치를 계산할 때 2500만원보다는 높았을 겁니다. 이건 유죄를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동부건설 자사주를 경영권프리미엄 없이 시장가격으로 매각' 한 건은... 1심 2심에서 무죄 나왔습니다. 정당한 경영상 판단의 범위 내에 있다고 본 겁니다.
거래 당시 동부건설이 보유한 자사주가 총 발행 주식의 30% 수준으로 매우 큰 규모이긴 했지만, 이 주식은 오너(회장)에게 매각되었습니다. 이미 경영권을 갖고 있는 사람(자연인)에게 자사주가 넘어간 거죠. '경영권을 갖고 있는데 주식 더 갖는다고 경영권프리미엄을 줘? 이게 말이야 방구야? 검사 니들이 경영 맛을 알아?' 라는 반론이 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아무튼 1심 2심에서는 이 자사주 매각 건이 무죄로 나왔고, (재벌들에게 관대했던 당시 법원 판결의 특성상) 골프장 주식 1원 매각 건도 유죄가 되긴 했지만 집행유예였습니다. 회사 입장에서는 대략 방어에 성공했다고 평가할 만 했죠.
그리고 이후에 3심 대법원 판결이 나왔습니다. 결과는 '자사주 매각 건도 유죄'.
총 발행 주식의 30%에 달하는 자사주를 매각할 정도라면 경영권이 바뀔 가능성도 있고, 이 정도 규모의 주식을 팔면서 경영권프리미엄을 붙이지 않았다는 것은 회사의 주요 유동자산을 지나치게 싼 가격으로 팔아버린 것이다. 경영권프리미엄 없이 시장가격으로만 최대주주에게 해당 자사주를 넘긴 행위는 업무상 배임으로 볼 수 있다.
이게 대법원의 최종 판단이었습니다. 2008~2009년에 나온 형법 교재에는 저 판례가 소개되어 있었어요. 당시 저는 동부건설을 퇴사한 상태였지만 딱 보고 그 사례다 싶더군요.
(업무상) 배임 부분은 형법을 전공한 사람들도 무척 어려워하는 분야입니다. 일단 회사는 미래의 경제사정을 예측해서 움직이는 조직이고, 그 때문에 '경영상 판단'이 광범위하게 인정되죠. 단순히 회사에 손해가 났다거나 손해 날 사정이 있다는 정도로는 부족하고 '명확하게 손해를 입힌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행동했을 때'에 배임의 고의가 인정됩니다.
동부건설 자사주 사례에서 대법원은 '~통상적으로 받을 수 있는 금액보다 현저히 낮게 팔았고 그 사실을 거래 당사자가 모두 인식할 수 있었다'고 봤습니다. 해당 주식의 지분규모가 경영권프리미엄을 인정받을 수 있는 수준이었는데 그걸 배제했으니 명확한 손해가 발생했고 거래 당시에도 다들 알고 있었다고 판단한 거죠.
자, 이 사례를 고려아연 자사주 취득에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요?
항을 바꾸어 정리해 보겠습니다.
(3) 고려아연의 자사주 취득 방법 : 시세보다 비싸게, 대출 받아서, 대출 이자율도 꽤 높을 것으로 추정
앞 동부건설 자사주 매각 사례에서는 '돈을 더 받을 수 있는데 너무 싸게 판 것'이 문제되었습니다. 역으로 '안 좋은 시기에 너무 비싸게 산 것'도 당연히 문제되겠죠. 회사 입장에서는 불필요하게 많은 돈을 지불한 것이니까요.
통상적인 상황에서 이익잉여금으로 자사주를 매입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회사가 장사 잘 해서 돈을 남겼는데 그 돈으로 뭘 사든 누가 어쩔티비. 마약 사들이는 거 아닌 이상 태클 걸 수가 없습니다.
금번 고려아연 자사주취득금지 가처분 신청이 기각된 것도 딱 '자사주 매입'만 보면 이해됩니다. 회사 경영진의 경영상 판단으로 자사주 매입하는 건 막을 수가 없죠. 주주 몇 명이 나대나대 한다고 해서 금지되는 건 아닙니다.
다만... 자사주를 취득하는 데에 '너무 비싸게, 너무 무리하게' 사들인다는 게 증명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고려아연은 일단 너무 비싼 가격으로 자사주를 취득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통상적으로는 주당 50만원 수준인 주식이 MBK 측 공개매수 선언으로 75만원이 되었고, 고려아연이 자사주를 매입하려면 더 올려 줘야 하겠죠. 통상 가격의 160% 이상으로 취득하는 셈입니다.
그리고, 고려아연은 너무 많은 돈을 자사주 취득에 쏟아붓고 있습니다. 원래 돈 잘 버는 회사였고 해외에 투자해 놓은 것도 많다고 하지만 '당장 쓸 수 있는 유동자산'은 한계가 있을 것인데, 기사에 따르면 최대 2조원 이상 자사주를 매입해야 한다고 합니다. 국내 기업 중 현금으로 2조원을 바로 집행할 수 있는 회사는 몇 개 없을 것이고 고려아연은 그 정도 규모가 안 됩니다.
실제로 고려아연은 기업어음 발행 + 회사채 발행 + 금융권 차입 등의 방안을 내놓고 있습니다. 즉, 금번 자사주 취득 건은 이익잉여금으로 사들이는 게 아니라 '빚 내서' 사들이는 형국이죠. 나중에 해외투자 등을 정리해서 빚을 갚는다 쳐도 당장은 빚을 내야 합니다.
게다가, 이렇게 대출받으면 이자율이 낮을 리 없습니다. 기업어음이나 회사채도 장기적으로는 '부채'가 되니 (영구채를 발행해서 자본으로 편입시키는 꼼수가 있습니다만 이것도 논란이 많죠) 이자율을 따져 봐야 할 것이고, 금융권에서 직접 차입하면 이자율이 더 높을 겁니다. 정확한 건 알 수 없습니다만 통상적인 장기대출 이자율보다 2배 이상 높겠죠.
이익잉여금이 아닌 빚으로. 비싼 이자를 물어 가면서. 통상적인 시세보다 +60~70% 올라간 가격으로. 자사주를 사들인다? 거기에 더해, 이렇게 사들인 자사주를 (다시 되팔아서 현금화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소각해 버린다?
이건 '고려아연'이라는 법인격에 명백히 손해를 입히는 행동입니다. 너무 싸게 팔아도 업무상 배임이고, 같은 논리로 너무 비싸게 사들여도 업무상 배임입니다. 경영진이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 이 판단을 한 경영진 전원이 업무상 배임의 공범이 되겠죠.
일단 제 판단은 그러합니다.
(4) 실제 법리까지는 모르겠지만 소설에는 쓸 만 합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신문기사만 보고 정리하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복잡하고 또 복잡한 업무상 배임 법리를 다 알아볼 수도 없고, 신문기사에 나지 않은 별도의 사실관계가 있을 수도 있죠. 실제로 민사가처분 / 형사고소 진행되면 어떻게 판결 날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이 정도까지만 정리해도 소설의 한 테마로는 활용 가능할 것 같습니다. 어차피 '기업물'로 분류되는 소설들도 대충 신문기사 수준에서 정리한 걸 재구성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현대에 환생한 '가후'가 대기업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고 끝내 '벤처기업 조조'에 합류하는 이야기. 언젠가 그 이야기에 고려아연 자사주 취득 건이 등장할 수도 있습니다. 언젠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