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과 엘레지
어둠이 짙어지면 엄마의 불안도 커져간다. 특히 이천 미터가 넘는 터널을 통과할 때면 왜 자꾸 굴속으로만 들어가냐고 길을 잘못 든 건 아니냐고 수시로 묻는다. 밤길 운전에 잔뜩 긴장한 나는 여러 번 짜증을 낸다. 좀 가만히 있으라고 길은 제대로 가고 있다고. 하지만 언제나 엄마가 이긴다. 이대로 못 가겠다 자꾸 골짜기로만 들어가는데 내가 어떻게 가만히 있겠느냐며 설명해 달라고 재촉한다. 심지어 다시 돌아가자고 한다. 그러면 나는 또 늘 하듯이 졸음쉼터에 차를 세우고 엄마를 설득한다. 내비게이션이 잘 안내해주고 있으며 내가 여러 번 와 본 길이니까 잘 가고 있다고. 세 번 정도 반복하면 엄마도 겨우 수긍한다. 이렇게 수습 아닌 수습을 하고 다시 운전대를 잡아도 엄마는 도착할 때까지 같은 질문을 되풀이한다. 무사히 도착해서 방안에 들면 엄마는 입을 싹 닦는다. 좀 전에 어린애처럼 보채던 모습은 이미 잊어버렸다는 듯 시치미를 뗀다. 눈에 보이는 것이 믿을 만하고 안전해야 안심하고 마음을 내어주는 엄마의 성격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나는 아직도 밤길 운전에서 같은 패턴으로 엄마와 다투곤 한다.
이번 길엔 오빠가 동승해 있다. 영덕에서 어둑해질 무렵 출발했으니 안동까지 한 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사위는 점점 어두워진다. 고속도로 길이 주로 산을 관통하다 보니 해는 더 서둘러 자취를 감추는 듯하다. 아니나 다를까 안동으로 돌아오는 영덕 당진 고속도로에 진입하자마자 엄마가 묻는다.
- 니, 가는 길 잘 아나? 오빠가 운전해라 캐라. 남자가 더 낫지. 캄캄해지는데 우얄라 카노?
- 엄마, 나도 운전 잘한다. 그리고 내 차잖아. 내가 조심해서 운전할게.
그래도 엄마는 계속 채근한다. 터널이 나오자 익숙한 대사를 읊는다.
- 니는 왜 자꾸 굴로만 들어가노? 안동을 가야지. 자꾸 골짜기로만 가노?
뒷좌석에서 보다 못한 오빠가 두어 차례 설명을 해도 엄마는 막무가내로 불안감을 드러낸다.
그러자 오빠가 묘안이 떠 오른 듯 엄마에게 말한다.
- 어무이, 노래 한번 불러 보이소. 어무이 노래 참 잘하시잖아요. 가는 길도 지루한데 어무이 노래 들으면 금방도착할 것 같심더.
이어서 박수를 치며 노래를 유도한다. 엄마는 노래할 준비를 다 갖추어 놓고도 부끄러운 듯 말한다.
- 참나, 늙은이 우사시킬라고(웃음거리 만들려고) 노래하라 칸다.
그리곤 곧바로 노래를 부른다.
-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헤어지지 말자고, 맹세를 하고 다짐을 하던 너와 내가 아니더냐. 세월은 가고 또 너도 가고, 나만 혼자 외로이. 그때 그 시절 그리운 시절, 못 잊어 내가 운다.
그럴 줄 알았다. 이미자 버전의 해운대 엘레지다. 오빠와 나는 이 시나리오에 이미 익숙해져 있다. 거짓말 보태어 아홉 번 더 들으면 백번쯤 들은 노래인데도 나는 다시 눈물이 나려고 한다.
칠 년 전, 엄마의 팔순잔치 자리에서 이 노래를 처음 들었다. 그 당시 엄마를 모시고 살던 안동 여동생네 집에서였다. 케이크를 자르고 축하 선물을 전달한 후 오빠가 엄마에게 노래를 청했다. 그때까지 우리는 엄마의 노래를 들어본 적이 없었으므로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엄마가 노래하기를 기다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해 봄 엄마는 대상포진에 걸려 안동병원에 입원 중이었는데 팔순잔치(잔치는 아니고 그냥 조촐한 식사였다.)는 와야 한다는 자식들의 성화에 못내 이끌려 나온 것이었다.
입원복 차림의 엄마가 노래를 불렀다. 옷을 갈아입히려고 했지만 거부했다. 빨리 끝내고 병원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엄마가 노래를 시작하자 어린 조카들이 키득거렸다. 엄마는 음치였다. 다섯 살 조카도 알아차릴 만큼 지독한.
그때, 오빠가 고개를 숙이며 눈물을 닦기 시작했는데 표시 내지 않으려 애쓰는 모습이 도리어 두드러져 보였다. 노래 가사를 들으며 나도 슬픔이 북받쳐 눈물을 훔쳤는데, 들키고 말았다. 나를 지켜보던 동생의 눈가도 빨갛게 젖어들고 있었다. 처음 들어본 가사였고 멜로디였지만, 게다가 참을 수 없는 음들의 배열이었지만, 우리 형제들은 동시에 울고 말았다. 올케들과 제부는 이 상황을 어떻게 견뎌야 할지 고민하는 듯했다. 조카들도 웃음을 멈추었다. 다섯 살 조카는 엄마(여동생)가 우는 모습을 보고 소리 내어 따라 울었다. 순식간에 생신 잔치는 울음잔치로 변해 버렸다.
이쯤에서 엄마 이야기를 해야겠다. 엄마는 1936년 일제 강점기 때 태어났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외할아버지가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왜 갔는지는 모른단다. 그리곤 9년이 지난 뒤 홀연히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우리나라 현대사를 반추하여 이야기의 맥을 맞추어 보면 외할아버지는 일본의 징집 징용이 한창일 때 일본으로 갔고 해방이 되어 다시 조선으로 돌아온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그때 외할아버지가 조선으로 돌아오지 못했더라면 외가 식구들은 자칫 자이니치 이산가족이 될 수도 있었겠다 싶다.
그렇게 돌아온 외할아버지는 9년 뒤 돌아가셨고 엄마에겐 동생 세 명이 생겼다. 그러니까 엄마와 큰 이모는 아홉 살 차이가 나는 것이다. 태어나서 아홉 살까지는 외할아버지의 그늘을 전혀 누릴 수 없었고, 열여덟 처녀의 순정을 이해해 줄 남성 모델을 찾아 배워야 할 나이엔 저세상으로 가버리셨으니, 엄마의 기억 속에 외할아버지가 어떤 채도로 남아있을지 나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시간이 흘러 엄마는 아버지와 결혼했다. 스물다섯 살이었다.
집안의 온갖 기대를 짊어지고 촉망받는 인생을 살 것 같던 아버지도 9년 만에 돌아가시고 말았다. 간경화였다. 다른 부부들이 겪었을 인생의 신고(辛苦)와 미운 정 고운 정을 다 겪어보기도 전에 엄마는 다시 남자의 보호막 밖에서 울어야 했다. 외할아버지와 9년, 아버지와 9년. 엄마는 18년 동안만 따뜻하게 보호받는 아늑한 둥지의 추억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니 엄마의 기억 속에 아버지에 대한 부정적인 면모가 들어설 시간이 없었으리라. 엄마의 회고 속 아버지는 완전무결한 사람이었다. 때문에 엄마의 노래 속 ‘너’인 아버지는 사랑하는 님의 모습으로 홀로그램처럼 기억에 남아, 60년이 넘도록 그리운 존재가 되어 엄마의 마음을 울리고 있음을 우리 자식들은 본능처럼 알아차렸다. 가사도 멜로디도 낯선 그 노래가 젊은 아버지에게 바치는 늙은 엄마의 연가라는 사실을 그날 처음 알았다. 외할아버지에게서 제대로 받아보지 못한 사랑을 아버지에게선 충분히 받길 바랐지만, 9년이라는 세월은 함량 미달이었다. 그래서 우린 울었다. 저절로 울게 되었다.
시간이 좀 흐른 뒤 노래의 제목이 ‘해운대 엘레지’ 임을 알아냈다. 그 후로 트로트를 싫어하는 내가 이 노래만큼은 가사를 외워서 엄마와 같이 부른다. 문제는 부를 때마다 엄마는 이제 아이처럼 신나게 부르는데 나는 자꾸 눈물이 난다는 것이다.
동안동 IC를 빠져나와 시내로 들어가는 길은 칠흑 같다. 세상의 모든 어둠들이 이 길에서 만나자고 약속이나 한 듯한 순도의 검은 빛 속을 헤트라이트에 의지하여 헤쳐나가고 있는데, 부르던 노래를 갑자기 멈추고 엄마가 묻는다.
- 여긴 어디고? 왜 또 새까만 데로 가노?
엄마의 노래를 들으며 애상에 젖어 나도 모르게 흘리던 눈물이 쏙 들어가 버린다.
- 어무이, 안동 다 왔심더. 이십 분만 가면 아파트(여동생이 사는 집)가 나옵니더.
오빠가 안심을 시키지만, 얼마 뒤 시내의 불빛을 확인하고서야 표정을 바로 잡고 다시 노래를 부른다.
오늘은 8월 27일 토요일, 어제저녁 인천에서 안동 여동생 집으로 내려와 밤길 운전의 피로가 풀리기도 전, 아침에 오빠가 대전에서 안동으로 날아와서는 영덕 바닷가로 나들이 가잔다. 선약이 있는 여동생 가족들의 아쉬워하는 마음을 뒤로하고 엄마와 함께 곧바로 길을 나섰는데, 짧은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니 동해 풍경보다 엄마의 투정과 노랫소리가 더 오래 머릿속을 맴돈다.
마침내 도착한 집. 현관에 들어서자 여동생네 가족이 환한 웃음으로 우리를 맞이한다. 그 포근한 불빛과 환대에 어둠을 뚫고 돌아온 엄마의 고요해진 안도가 소파 위 잘 개켜져 있는 빨랫더미에 스며든다.
2022. 8.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