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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르노르망 Nov 05. 2023

열한 번째 산책로 -『왕좌의 게임』


열한 번째 산책로  - 『왕좌의 게임』 



 장마를 앞둔 여름이면 항상 장마 기간 중에 읽을 몇 권의 책을 준비해 두곤 한다. 사실 장마 기간이 뭐 얼마나 되겠는가마는, 내게 있어 이 준비 기간은 그간 마음만 먹고 사지 못했던 전집류의 책들을 사거나, 몇 권의 책을 한꺼번에 사기에 꽤 그럴듯한 핑곗거리가 되어준다.


그래서 나는 늘 ‘장마준비’라는 말이 되는 듯 안 되는 미명 하에 책들을 장만한다. 보다 정확히 말해 그 준비란 제습제를 채워두거나 이불 빨래를 미리 해 두는 것처럼 장마에 꼭 필요한 준비라기보다는 그저 ‘장마 기간을 견디기 위한 책 준비’이다. 물론 장마 기간이 끝나고 준비했던 책들을 모두 완독 했느냐 하면 반드시 그런 것도 아니다. 순식간에 전부 읽은 책들, 읽다 만 책들, 다른 책들을 읽느라 아직도 읽지 못한 책들이 이른바 ‘장마준비’ 기간에 내가 산 책들의 실체다. 조지 R.R. 마틴의 『왕좌의 게임』을 구매한 이유 또한 ‘장마준비’의 일환이었다.


몇 해 전, 미국 드라마 <왕좌의 게임>이 열풍을 일으키고 있던 시기에, 호기심으로 첫 화를 관람한 적이 있다. 그러나 나는 차마 다음 화로 넘어가지 못한 채 지속적인 관람을 포기해 버렸다. 첫 화부터 너무 강렬했던 선정성과 폭력성으로 인해 앞으로 그 드라마에 등장할 다른 장면들을 더 이상 감당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처럼 이 드라마에 대한 나의 첫인상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그런데 장마가 오기 직전 들렀던 중고서점에서, 새 책처럼 깨끗한 『왕좌의 게임』 1,2권을 발견했을 때, 내가 드라마에서 받았던 충격은 잠시 기억 속에 묻혀 있었던 모양이다. 글과 영상은 어떤 면에서든 다르리라 생각하는 나의 매체관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무턱대고 장대한 서사물은 일단 선호하고 보는 개인적인 성향 때문인지도. 





2020년 장마를 앞둔 그 해 여름은 유난히 지루하고 무더운, 피곤하고 지쳐있던 시기였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한 첫 해였으며, 기존의 생존 방식에도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여름휴가를 반납하는 사람들이 늘었고, 재택근무와 재택 수업, 방역을 위한 조치 등으로 사회적 시스템에 대대적인 수정이 가해진 시기. 아마도 전 국민 모두가 거의 비슷한 심정으로 이 파란만장한 한 해의 첫여름을 맞이했을 것이다.


2020년 1학기는 그야말로 격동의 시간이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갑작스럽게 등교에 제재가 가해져, 한 번도 해 보지 못했던 온라인 강의를 진행해야 했기에 학생과 교수자 모두가 적잖이 당황했던 때이다. 가뜩이나 테크노포비아인 나에게 동영상 강의 제작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게다가 녹화해 듣게 되는 내 목소리는 새삼 왜 그리도 이상스러운지. 녹화하고 지우고, 다시 녹화하고 지우고. 마음에 들 때까지 그 과정을 거치다 보면 밤을 꼴딱 새우기 일쑤였다. 


겨우겨우 강의를 만들어 올리면, 미처 쉴 시간도 없이 다음 주 강의가 코앞에 기다리고 있었다. 목소리가 피곤한 것은 둘째 치고라도, 무엇보다 눈이 피로했다. 초 고도근시인 까닭에 일상생활에서도 비문증과 고 안압으로 고생하고 있던 내게, 이 초유의 사태는 유독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다행히 이토록 고생스러웠던 한 학기를 무사히 마친 시점에서, 드디어 ‘장마준비’를 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왕좌의 게임』을 정신없이 읽어나가는 내내 마틴 옹의 서사력에 감탄에 감탄을 거듭했다. 이 산책로는 그야말로 모험이 가득한 숲이자 험난한 산이다가, 순식간에 파도치는 바다로 변해버렸다. 물론 원작에서도 선정성과 폭력성은 난무했으나, 유려한 문장력과 현장감 있는 묘사력, 그리고 등장인물 하나하나의 대사와 행위가 드라마가 보여줄 수 없는 부분들을 충족시켰다. 그것은 애초부터 존재할 수밖에 없는, 문학과 드라마 간의 차이이기도 했다. 드라마를 보면서는 그다음을 참을 수 없었지만, 책으로 접한 이 작품은 다음이 궁금해 참을 수가 없었다. 순식간에 1,2권을 완독하고 다시금 중고서점을 찾았을 때, 머지않아 다음 편인 『왕들의 전쟁』 1,2권을 손에 넣을 수 있었던 것 또한 더할 나위 없는 행운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왕들의 전쟁』 1권을 읽던 중, 이상한 시각적 징후가 발견되었다. 책을 펼쳤을 때 나뉘는 책의 척추 부분에, 언젠가부터 동글동글한 흰 점들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책의 척추 군데군데에서 마치 흰색의 도트와도 같은 작은 동그라미들이 일정한 간격을 갖추며 드러났다. 순간적인 착시 현상이라는 생각으로 처음에는 이 증상에 대해 괘념치 않았다. 그렇게 『왕들의 전쟁』 1권을 완독 했다.


심각한 문제는 『왕들의 전쟁』 2권을 읽던 중 발생했다. 이제는 가로줄의 글자 행을 읽을 때도 작고 하얀 점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책을 읽어나가려면 흰 점들이 그 행의 단어들을 군데군데 가리고 있어서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기가 어려워졌다. 더구나 괴이한 것은 내가 한 행에 시선을 고정해 둔 채 다른 행을 슬쩍 엿보는 순간 그 다른 행은 잠깐 동안 제대로 보이는 반면, 막상 내가 그 행으로 시선을 옮겨 정식으로 시선을 고정하는 즉시 하얀 점이 등장해 글자들을 가려버린다는 사실이었다. 


몇 번이고 시선을 한 행에만 고정한 척하며 다른 행들을 읽으려 노력해 보았으나, 그러자니 도무지 책이 제대로 읽혀지지 않았다. 결국 더 이상은 책을 읽을 수 없게 되었다. 게다가 매일 새로운 증상들이 한두 개씩 등장했다. 어두운 곳에 있다가 밝은 빛을 보았을 때 검은 덩어리 모양의 이상한 잔상이 보인다거나, 시선의 중앙에 회색 점 같은 것이 가리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게다가 번쩍거리는 불빛 덩어리가 보이는가 하면, 왼쪽 눈의 시야 끝을 마치 모노레일처럼 슬며시 타고 올라가는 빛의 알갱이들이 느껴지기도 했다.


이때부터 나의 긴긴 병원 답사기가 시작된다. 원인을 정확히 알 수 없는 일종의 망막 장애로, 초 고도근시이기에 발발할 수 있다는 것이 일단은 가장 설득력 있는 설명이었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증상인 만큼, 바이러스 감염이 원인일 수도 있다고 했다. 한 학기 내내 눈을 혹사시킨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도 어떻게 갑자기 이러한 장애가 발생할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증상은 조금씩 악화되었다. 암슬러 격자로 늘 눈의 상태를 체크하라는 의사의 조언에 따라 매일매일 그 과정을 거치던 중, 암슬러 격자가 찌그러져 보이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다시 다니던 병원으로, 검사 후 다시 종합 병원으로 오가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갑작스러운 악화 증상으로, 종합 병원에서는 빠른 조치를 위해 안구 주사 투여를 권했다. 왼쪽 눈에 일종의 망막변성으로 인한 부종이 생겨, 빨리 주사를 맞지 않으면 실명의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잠시 주저하던 끝에 난생처음 안구 주사를 맞게 되었다. 실명에 대한 공포, 더 이상 읽고 쓸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일을 지속하지 못하리란 공포가 순차적으로 밀려들었다. 안구의 통증보다 고통스러웠던 것은 대부분 이런 걱정들이었다. 


『왕들의 전쟁』 2권을 과연 내 힘으로 완독 할 수 있을까에 대한 두려움도 이런 걱정들에 속했다. 내게 있어 아직까지도 『왕들의 전쟁』 2권이 차지하는 위치란 이런 것이다. 이 책을 읽던 와중에 나는 다른 누구와의 전쟁이 아닌 바로 나 자신과의 전쟁에 돌입했다. 『왕좌의 게임』을 대표하는 문구인 ‘겨울이 오고 있다 Winter is coming’는, 마치 악화된 시력으로 인해 나의 독서와 글쓰기의 삶에 도래하게 될 겨울을 예고하는 것만 같았다. 한여름에 맞이한 겨울이라니.


이 시리즈를 볼 때마다, 중고서점에서 이 책을 발견했을 때의 기쁨과, 노란색의 그 표지를 보기만 해도 기억나는, 하얀 점들로 인한 시야 결손의 첫 경험이 동시에 떠오른다. 이 책을 펼칠 때마다 희비극이 교차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간 품어왔던 다른 모든 희망 사항들을 제치고 당장 이 책을 완독 하는 것이 가장 큰 희망사항이 되어버렸던 그 해 여름, 유난히도 시끄럽던 매미소리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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