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 위에 드리워진 모든 것은 사랑이었다고 말하겠다. 내리쬐는 강렬한 빛, 그 빛으로 영그는 열매와 그 열기에 달구어진 마음, 따뜻해진 마음이 머금게 하는 미소. 세상의 모든 만물이 그렇게 보이기 시작하자 얼굴에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땅, 바람, 물, 태양과 달이 서로 사랑을 주고받을 때 나도 사랑받았다. 겨울로부터 건너가 준비되지 않은 마음은 뜨거운 여름 속에서 평화를 찾았다. 기대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마음에 햇살이 깃들기 시작한 것은 앙코르사원으로 가던 자전거 위에서였다. 거대한 나무들 사이에서 거무스름한 돌덩이가 쌓여 이룬 입구가 시선에서 가까워 올 때, 그 돌들의 정교함이 점점 선명하게 펼쳐질 때 입안으로 머금는 탄성이 쏟아졌다. 한 줌 빛과 같은 따스함이 건조한 마음에 밀려들기 시작했다. 그저 문 앞에 도착했을 뿐이었는데 나는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고 다음 날부터 시작할 이 여정에 가슴이 뛰었다. 씨엠립 시내에서 출발하여 앙코르 사원까지 자전거로 닿은 초행길은 아주 멀다고 느꼈으나 눈부시게 빛났을 한 시대가 거기에 있다는 것을 눈앞에서 만나고 새 마음이 되었다. 앙코르사원은 매일 자전거를 타고 돌아보기에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가이드 없이 7일 동안 자전거를 타고 오고 갔고, 앙코르 시대의 유적들을 만날수록 이 땅과 민족을 다시, 다른 눈으로 보기 시작했다.
캄보디아가 처음부터 편안하다고 느꼈던 것은 아니었다. 혼자의 여행이 낯선 것은 아니었지만 처음으로 떠나는 동남아 기행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어떤 환경을 만나게 될지 스스로 가늠할 수가 없었다. 낯설었기 때문에 긴장했다.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에 첫 발을 딛고 가장 먼저 만난 것은 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크메르루주의 대학살 현장인 뚜얼슬렝 S-21이었다. 현장을 해설하는 오디오를 들으며 가슴이 조여드는 기분으로 천천히 걸었고 다녀온 후에도 마음이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그 공간은 그대로 내게 전이되었다. 그 현장을 역사로 받아들이기엔 그다지 먼 일이 아니었다. 프놈펜에서 다시 만난 프랑스 유학시절의 한 친구는 그 현장으로부터 도망치던 어머니의 뱃속에서 태아로 있었고, 그 고통이 무의식 중에도 몸에 어떤 흔적으로 남아 있었으니 더욱 생생하고 마음이 저리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역사를 인식하고서 도저히 편안한 마음으로 캄보디아의 땅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한동안은 우울했고, 캄보디아에 온 지 이틀이 지났을 뿐이데 곧 돌아갈 마음을 먹었다. 뜨겁게 내리쬐는 햇살조차 모두를 향한 무기 같았다.
여행은 생각보다 길어졌다. 라오스와 태국까지 돌아보려 했던 계획이 오롯이 캄보디아에 집중해야겠다고 고쳐 마음먹었다. 1월 11일부터 시작한 25일간의 기행은 프놈펜, 씨엠립과 몬둘키리 지역을 다녀오고 끝맺게 되었다. 아쉬움이 컸다. 돌아오고서 자료를 찾고 책을 보며 다시 이해하게 되는 것들이 많았다. 이제 겨우 동남아의 풍토를 이해하는 것에 입문하게 되었을 뿐이다. 진짜여행은 이제 시작인지도 모른다.
캄보디아에서의 시간들은 조개의 몸속에 숨겨진 진주알갱이 같은 기억들로 흩어져 있다. 이 보석 같은 이야기들을 어떻게 꿰어야 하는가 고민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중국인 주달관이 1296년부터 일여 년 간 캄보디아의 민속과 풍토에 관해 썼다는 <진랍풍토기 眞臘風土記> *에서 영감을 얻어 글의 갈래를 나누었다. 길지 않고 예기치 않은 시간들의 기록이므로 이번 풍토기는 첫사랑의 설렘 같은 일기가 될 것이다. 그렇게 캄보디아로 시작한 올해는 종종걸음으로 다시 떠나기를 주저하지 않을 것 같다.
집 : 우리
이 길은 준비하고 떠난 기행이 아니다. 어디로 가서 무엇을 만날지, 왜 떠나야 하는지 알지 못하고 집을 떠났다. 나는 그저 집을 떠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떠난 길은 다시 집으로 닿았다. 가는 곳마다 만난 것은 땅과 그 땅을 잇고 있는 사람이었으니 그 어디를 가더라도 길과 집을 생각했다. <집>이라는 이야기를 숙명처럼 끌어안고 사는 나는 결국 집을 벗어나지 못했다. 땅과 그 조건에 기인한 문화의 흔적들을 찾고, 그것만이 보이며, 거기서 에너지를 얻었다. 집은 곧 바람과 땅과 해와 달과 사람의 이야기이며 그 가운데에서 주고받는 사랑의 이야기이다. 남의 땅이 아니라 인류 모두의 것이며 눈멀어 보지 못했던 '우리'의 이야기인 것이다. 이제 <우리>를 이야기할 때가 되었다.
*진랍풍토기(眞臘風土記)는 13세기말~14세기에 걸쳐 원나라사신이던 주달관이 크메르제국을 탐험하며 그에 대한 군사적, 지리적 정보, 지도, 국토, 정치 상황, 동물, 자연, 환경, 내부 정보 등을 상세하게 기록한 여행기이자, 종교, 문화, 풍습 등까지 기록한 사료적 가치가 높은 책자이다. 진랍은 중국어로 캄보디아를 이르는 말이다. / 책 <진랍풍토기> 캄보디아, 1296 -1297/ 주달관 저, 최병욱 역/ 산인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