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캄보디아 기행에서의 첫 장면은 의도하지 않았으나 킬링 필드로 불리는 끔찍한 대학살의 고문현장이었다. 그것은 앙코르 사원이 신의 영혼이 깃든 운율이라면 S-21로 대변하는 크메르루주의 고문과 죽음의 대학살 현장은 침묵하는 지옥 같았다. 캄보디아의 상징과도 같은 이 두 장면은 극과 극의 대치를 이루며 마음을 요동치게 했는데 타국의 역사라고 객관적으로 담담하게 바라보기엔 우리의 현대사와 겹쳐 올라 냉정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런 공감이 아니라 하더라도 이 세상에 존재하는 폭력과 야만의 역사로부터 결코 도망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지구는 둥글고, 둥글어 맞닿아 있는,하나의 땅에서 벌어지는 인류의 역사였다. 이것은 우리의 역사이며 우리 시대의 상처라는 생각이 밀려왔다. 프놈펜에 있는 고등학교였던 뚜얼슬렝 대학살 현장을 걸으며 피하고 싶지만 피할 수 없는 고통을 진하게 느꼈다.
1975년 베트남의 종전과 함께 캄보디아의 내전도 끝이 나면서 크메르루주(붉은 크메르) 정권이 집권하게 되었다. 국가 체계와 권력을 재건하기 위해 1975년부터 1979년의 약 4년간 엄청난 만행을 저지르게 된다. 국민의 25%가 처형을 당한 이 사건은 우리에게는 킬링필드라는 영화로 알려져 있다. 중국의 문화 혁명이 모델이 되어 그들의 역사, 문화, 기록들을 모조리 다 없애고 지식인, 지식인처럼 생긴이 들, 자신들의 정부를 비판할만한 사람들을 모조리 다 처형하는 엄청난 사건이 있었던 것이다. 국립도서관을 돼지 사육장으로 만들고, 학교를 폐쇄하고, 배운 사람들, 기술을 가진 사람들, 심지어 안경 쓴 이들을 잡아들였다.( 공부했을 법한 사람이란 이유) 전국에서 이유를 알지 못하고 잡혀 온 사람들을 가두고 고문하고 죽음으로 가는 곳이 이 뚜얼슬렝 S21 감옥이다.
뚜얼슬렝 S-21 에서 살아남은 이가 몇 명 되지 않는다. 그중 한 사람인 반나쓰 Vann Nath은고문의 현장을 기억하여 그림으로 그렸고 친구 정시엔 Jean-Sien Kin은 그의그림을 책을 기획하고 출간했다. 그 이름 그대로가 그대로 고통의 상징이 된 <Vann Nath>이다.
책의 편집자인 정시엔을 만난 것은 2002년 프랑스 유학시절 학교에서였다. 그는 프랑스에서 태어난 캄보디아인이다. 크메르루주가 집권하던 시대를 겪고 있던 한 젊은 부부의 아직 태어나지 않은 태아로 그 현장을 겪었다. 엄마의 몸속에서 오롯이 그 슬픔과 불안과 고통을 무의식으로 전해받았을 그는, 이십 대의 젊은 부부가 크메르루주의 야만으로부터 도주해무사히(겨우)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아직 청춘이었던 그의 부모님은 크메르루주 정권 주도하에 일면식 없이 맺어져 합동결혼식을 치렀고, 그 이후 가까스로 태국을 통해 프랑스로 도망을 갔다. 프랑스에서 태어나 프랑스의 교육을 받고 자란 정시엔은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데 큰 혼란을 겪었다. 그의 부모님은 크메르루주의 이야기를 입에 담지 않았고, 스스로 아시아인이기를 거부하였으므로 묻지 않았다. 그가 23세가 되던 해에 우연한 계기로 S-21의 생존자 Vann Nath 반나쓰를 만났다. 그 이후 그는 그간 숨고 싶었고,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자신의 출생과 고통과 비극으로 휘몰아치는 먼 자신의 뿌리나라에 대해 묻기 시작했다.그리고 그 현장의 유일한 증인의 기억을 그린 책을 펴 냈다.
친구 정시엔과 나는 프놈펜에서 20년 만에 만나 오랜 시간을 건너 인사하고서 서로의 책을 교환하였다. 나는 그에게 우리 땅의 뜻을 기록한 <땅의 기억> 이서재 지리지를 건넸고, 그는 그 아픈 기억의 산 증인과 그 시간의 기억을 기록한 책 <Vanne Nath>을 전해 주었다. 그렇게 천진하게 인사한 나는 다음날 뚜얼슬렝 대학살 박물관을 다녀오고서 너무나도 생생한 고통을 느꼈다. 그저 묵인할 수 없는 어떤 아픔이 가슴에 머물렀다. 혼자 머금기엔 힘들었으므로 정시엔에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크메르루주의 대학살 생존자 반나쓰 Vann Nath
아직 역사가 아닌 상처 :
인류공통의 아픔
Interview | Jean Sien Kin - ISEOJAE
이서재 : Vanne Nath의 그림을 보면 상당히 끔찍한 기억들이다. 그는 어떻게 생존했으면 왜 그림을 그렸는가. 또 그는 그 기억을 다시 꺼내는 것이 힘들지는 않았는가.
정시엔 : 기억을 그림으로 꺼내 놓는 일은 물론 너무나도 힘든 과정이었다. 반 나쓰는 바탐방에서 1977년에 잡혀 그곳의 감옥에서 전기 고문을 당했다. 그리고 1978년 1월에 프놈펜의 S-21로 끌려왔다. 그때 두 트럭에 각 18명의 사람들을 태우고 프놈펜의 뚜얼슬렝 S-21으로 가고 있었는데, 차에 있던 사람들이 서로 약속했다. 누구든 살아남는 사람들이 이 감옥의 일들을 세상에 알리자고 했다. 결국 거기에 있던 모두가 죽고 반 나쓰 한 사람만이 살아남았다. 1979년에 베트남에서 캄보디아를 공격하러 들어왔을 때 그 혼란을 틈타서 도망쳤다. 그는S-21에서 살아남은 12 명 중의 한 사람이다. 그렇게 살아남은 그는 감옥에서 목숨을 잃은 동료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림을 그려 그 악몽을 세상에 알렸다.
이서재 : S- 21 대학살 박물관에 가보니 그곳에 반나쓰의 그림들이 곳곳에 걸려 있었다. 사진으로 남겨지지 않은 그들의 모든 만행들을 그림으로 더 생생히 보는 것 같았다. 그는 결국 그림을 그리는 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살아남았다고 할 수 있는데, 모든 지식과 능력을 가진 사람들을 다 죽음으로 몰고 갔는데도 그는 어떻게 살아남게 된 것인가?
정시엔 : 반나쓰는 프놈펜에 끌려오기 전에 바탕방에서 그림을 그렸다. 극장간판이나 가족의 초상화를 그렸고, 오토바이 색을 칠하던 사람이었다. 예술적인 그림을 그리던 사람이 아니다. 프놈펜의 S-21에 잡혀왔을 때 그의 이력을 보고 폴포트의 초상화를 그리게 하려고 그를 살려두었다. 그 당시에 만약 그가 예술가적인 활동을 했다면 살아 있지 못했을 것이다.
이서재 : 크메르루주의 킬링필드 이후, 지금을 사는 사람들은 그 기억에 대해서 벗어났는가. 서로 그때의 고통을 이야기를 하는가.
정시엔 : 거의 하지 않는다. 사실 그 사건은 아직도 생생한 일이다. 그렇게 오래된 일이 아니다.
사람들에게 그 기억은 여전히 엄청난 고통으로 남아 있다. 자신의 가족들 중에 그런 상처가 없는 사람이 거의 없으므로 그 충격은 여전히 강렬하게 남아 있다. 그래서 그 사건과 역사 이야기를 서로 하지 않으며 불문으로 묻어 둔다. 어느 누구도, 어느 자리에서도 이 이야기를 주제로 잘 거론하지 않는다.
이서재 : 그 당시 크메르루주 정권은 지식인들을 모두 죽였다. 안경을 쓴 사람, 얼굴이 지적이게 보인다는 이유로 죽였다고 들었다. 살아남은 사람들 중에는 교육받은 사람, 지식인들이 남아 있지 않은가.
정시엔 : 거의 모든 지식인들, 교육받은 사람들을 죽이고 노동자, 농민들만을 살렸다. 살아남은 교육받은 사람, 기술이 있는 사람, 지식인들은 자신의 신분을 속이고 무지한 사람들처럼 살아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모두가 죽었다.
이서재 : 그때 모든 분야의 배움을 자산으로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죽었다. 숨어서 살아남아 있기도 했지만 지금, 오늘날의 사회 전반에 영향이 있는가?
정시엔: 물론이다. 자신의 신분을 속여 겨우 살아남은 지식인들이 있었지만 그들도 그 배움과 지식을 남겨 전해 줄 수가 없었다. 크메르루주의 시간이 지나고서도 쉽게 이전으로 돌아 올 수가 없었고 이 이후 캄보디아는 제로에서 다시 시작해야 했다. 사회의 시스템, 체계가 모두 사라졌고, 그것을 만들고 유지하던 모든 기술과, 체계와 정보와 기록이 사라졌으므로 모든 것을 다시 세워야 했다. 배운다는 것이 두렵고 상처가 있어서 캄보디아의 교육적 수준도 아주 낮았다.
이서재: 지금은 학교나 단체에서 이 역사에 대해 바르게 가르치고 있는가?
정시엔 : 지금은 다큐멘터리나 필름을 통해서 세상에 많이 알려지고, 뚜얼슬렝 대학살 박물관의 전시, 보바나박물관, 이 사건을 제대로 알리려는 몇몇 단체들을 통해서 자료를 찾고 보존하고 알리는 움직임들이 있다. 그러나 아주 오랫동안 그런 이야기들이 잘 거론되지 않았고 배울 수 없었다. 중학교 과정에서도 이제야 그 역사를 배울 수 있도록 교과과정에 편입되었기 때문에 그 현장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더욱더 그 사건들과 시대의 이야기를 꺼내는 일이 힘들었고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반나쓰는 이 사건에 대해 밖으로 드러내 이야기한 거의 유일한 사람이며 증인이며 증거였다.
크메르루스 대학살의 생존자 Vann Nath 가 학살과 고문현장의 기억을 그린 그림을 모은 책.
이서재 : Vann Nath 반나쓰의 책은 왜 만들게 되었나.
정시엔: 이 책은 크메르루주시대에 살아남은 증인으로서 기억을 그린 유일한 그림들이자 증거이다. 반나쓰는 이 그림을 억울하게 죽음을 맞은 이들에게 빚을 진 마음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에게도, 우리에게도 그 과정은 무척 고통스러운 것이었으나 고통 속에서 세상에 남긴 야만의 증거들을 희미하게 사라지도록 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 그림과 기억을 세상에 알려 더 이상 그런 폭력과 야만이 재생산되게 해서는 안되었다. 폭력을 피할 것이 아니라 비로소 마주했을 때 평화를 찾을 수 있다. 반나쓰는 S21의 현장에서의 끔찍한 기억들을 그림으로 남기고 이후에는 평화를 찾은 풍경의 그림들과 자신의 마음에서 염원하는 평화의 그림들을 그렸다. 이 책은 폭풍우처럼 휘몰아치던 한 시대의 폭력과 야만들 겪고 살아남은 이가 남긴 유언과 같은 고백이자 증거이다. 인간의 역사에서 폭력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바라는 희망 같은 것이었다. 그는 그 그림과 책으로 그 역사에 대해 분노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직 진실과 정의에 관한 인내심 깊은 탐구였는지도 모른다. 그의 유일한 관심사는 크메르루주 희생자들의 어두운 삶을 세상에 알리는 것이었다. 반나쓰는 우리가 그때,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자 하지 않는 다면, 우리가 알 수 없는 사이에, 원하지 않더라도 저절로 희생자들을 잊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희생자들의 삶을 묻지 않는다면, 그들의 존재는 희미해질 것이며, 그들은 한낯 먼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저 몇몇 전문가들의 추상적인 숫자와 통계 시트에 지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견뎌냈던 고통은 그 후 물리적으로나 상징적으로 다시 한번 잊혀 질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나: 정시엔 본인의 삶도 사실 이 역사의 일부라고 할 수 있다. 책을 만드는 과정의 마음은 어떠했나.
정시엔 : 나는 나 자신을 둘러싼 역사를 알아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 역사를 아는 것은 아시인이 왜 프랑스에 와서 태어났으며 왜 그런 성장과정을 느꼈는지를 알 필요가 있었다. 왜 나의 부모님은 그렇게 교육했고, 왜 사람들은 나를 그렇게 대했는지 답을 찾을 필요가 있었다. 오랜 시간 동안 알기를 거부했고, 두려웠던 질문이었으며 피하고 싶었던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질문과 해답을 마주하지 않으면 나 자신이 당당할 수 없고 더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나 자신이 스스로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없다는 것도 알았다. 반나쓰는 내가 이 역사와 수천 킬로 떨어진 부모님의 나라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나의 정체성을 찾아가는데 큰 역할을 했다. 나처럼 자신이 인식하지 못한 어린 시절에 이민의 역사를 가진 이에게는 어쩌면 그것은 치료의 한 과정이었는지 모르겠다. 이 폭력과 역사를 이해하면 할수록 서로의 고통을 헤아리게 되는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서재 : 지금을 사는 캄보디아 사람들에게 크메르루주의 시간은 역사로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객관적인 일이 되었는가? 아니면 여전히 상처로 남아 있는 일인가?
정시엔 : 역사가 되기에 상처와 고통이 아직도 생생하다. 현장에서 살아남은 사람이 아직도 살아 있으니 여전히 생생한 현대의 일이다. 분명 우리는 그 시간을 건너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엄청난 고통의 상처를 깊이 숨겨둔 채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이 고통은 그대로 그다음 세대에게 전해지고 있다. 나는 크메르루주 이후의 제1세대이다. 사실 뒤늦게 알게 된 크메르루주의 사건은 마치 내가 겪은 일처럼 선명하게 그 고통이 전해졌다. 어느 누구도 말로 꺼내지 않는 이 고통은 침묵 속에서 다음 세대로 전이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타인의 고통을 이해한다는 것은 평화에 대한 마음을 열기도 하고, 두려움에 관해 이해할 수 있게 하기도 하며, 삶의 어려움을 더 잘 알 수 있도록 해준다. 그리고 타인에 대한 올곧은 마음을 갖게 하기도 한다.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역사이지만 숨기려고 해서는 안 된다. 아픔을 감추려고만 한다면, 극복하고 마주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폭력은 또다시 어디에서나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평화의 시작은 고통을 마주하는 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서재: 당신의 역사와 고통을 나누어 주어서 고맙다. 그것은 캄보디아만의 역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권력을 얻기 위한 야만과 폭력은 수없이 반복되어 어쩌면 역사 속에서 학습되었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역사에도 수없이 그러한 일들이 자행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평화를 얻기 위해 폭력과 야만을 드러내고 마주했는가 묻게 된다. 인류가 기억해야 할 고통과 야만과 기억이다. 엄청난 희생을 치른 캄보디아인들이 그다음을 향한 걸음을 잘 딛어 가길 바란다. 당신의 용기를 응원하며 당신의 고통과 아픔을 나누어 주어 깊이 고마움을 전한다.
뚜엉슬렝에서 벌어진 고문의 한 장면. 반나쓰 이곳에서 본 기억들을 그림으로 남겼다. 희생된 모든 사람들에게 빚을 갚는 마음으로 그렸다. 그림들이 잔인하기 때문에 다 올리지 못했다
크메르루주의 잔혹한 행위는 강대국들 사이에서 암암리에 묵인되었다.
크메르루주의 수장 폴포트는 태국으로 도망가서 1998년까지 살다가 자연사했다. 그리고 폴포트와 함께 프랑스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크메르루주당을 꾸려오다 내분으로 1977년 베트남으로 도망갔던 훈센이 폴포트정권 붕괴 이후 다시 캄보디아로 돌아와 권력을 잡고 장기 집권하고 있다.
어쩌면, 캄보디아 기행의 최종 종착지이자 결론은 가장 힘겹게 쓰고 가장 어두운 마음으로 마주했던 현대사가 아닐까. 그 찬란했던 모든 문화유산을, 풍요롭고 아름다운 땅을 인류는 어떻게 단숨에 짓밟았는지, 그 우아한 건축과 종교적 양식에 견주어 현대의 우리는 얼마나 무지하고 처절히 야만의 참모습을 가지고 있는지 단번에 보여준다. 그리고 그 캄보디아의 야만적 역사는 단지 그들의 시간 안에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우리 역사에서도 수없이 반복되었던, 그리고 침묵하고 있었던 우리를 알고 있다. 폐허가 된 앙코르의 수려함은 현대사와 견주어 더욱 빛이 난다. 인간의 욕망이 닿는 곳이 만든 결말은 앙코르 사원과 크메르루즈의 학살터 이 두 개의 장소와 시간에서 분명히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