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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서재 Mar 04. 2024

산 것과 죽은 것의 줄다리기

캄보디아 풍토기 #03 : 믿음

믿음



앙코르 사원 2



앙코르 사원에는 각기 다른 시대를 살았던  왕의 상징이자 권위를 드러내는 무수히 많은 신전들이 지어져 있다. 앙코르와트는 그 많은 사원중 하나이다. 우리가 앙코르시대의 전체 사원을 말하며 앙코르와트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되었다.  각기 다른 시대에 지어진 사원들은 비슷할 것 같지만 각 사원마다 모두 그 느낌과 규모, 형상이 다르다.  사원과 사원 사이의 거리는 가깝지 않지만 그 끝에 섬처럼 닿게 되는 또 하나의 사원은 홀연히 다른 곳으로 이끌어 주는 마법 같았다. 동쪽과 서쪽에는 각각 어마어마하게 큰 저수지(동 라이, 서 )가 있는데, 이 저수지의 모양도 네모 반듯한 직사각형이고 크기가 상당히 커서 인공적으로 만들었다는 것이 믿기 힘들 정도이다. 앙코르시대의 수자원이라 할 수 있었던 톤레삽호수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호수이다. 호수 위에 배를 타고 있으면 바다에 있는 것 같다. 그렇게 거대한 호수를 품었던 민족이었으니 저수지의 스케일이 남달랐던 것도 납득이 된다.  앙코르 시대가 번성을 하게 된 것이 우기에 오는 비를 가둘 수 있는 거대한 저수지를 만들어 삼모작을 하게 되면서부터였다 그러니 그것은 아무것도 없던 땅에 믿음의 사원을 세우고 자신들의 환경을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개척했던 크메인들 결과물이다.  분명하고 강한 신앙으로 모아진  믿음의 결과가 아닐까 생각했다. 앙코르 사원의 지도를 살피면 사원들이 놓인 모양도 아무렇게나 자리잡지 않았다. 해자의 물길까지도 반듯한 사각을 이루고 있고 동과 서에 자리한 저수지의 위치도 양쪽에 대칭을 이루어 자리한다.  모든 앙코르의 사원들이 동쪽을 향해 자리를 잡은 반면 앙코르와트만이 서향을 바라보고 있는데, 정확히 3월 21일 춘분에 뜨는 해가 앙코르와트의 가운데 지붕 위로 솟아 중심 회랑으로 빛이 비치어 든다고 한다. 그 해돋이를 보기위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든다. 세상 만물에 대해 의미와 상징을 부여하고, 이유 없는 존재가 없으며 한 치의 오차 없는 정교한 건축의 기술로 사원을 만들어 내었다. 이것이 믿음의 힘이 아니고 무엇일까. 우리의 존재를 분명하게 하는 근거가 신앙적인 믿음에 있지 않다면 이 초자연적인 에너지는 애초에 생겨날 수가 없는 것이다. 이 믿음을 넘어서 발휘되는 초자연적인 힘, 이것이야 말로 진짜 예술이 아닐까.


앙코르 타프롬. 지금도 이 나무들을 없애는 복원에 대한 논의가 있다고 한다. 나는 그대로 보존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사원은 땅과 뒤섞여 오늘의 생을 잇고 있다.



마지막 날은 사원을 달리다가 자전거를 묶 자물쇠의 열쇠를 잃어버렸다. 아마도 자전거로 달리는 도중에 가방에서 드폰을 꺼낸 적이 있는데 그때 길에 떨어진 것 같다. 넓디넓은 사원에서 열쇠를 찾기 위해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가는 어마어마한 결심을 한 것은 지금 생각하면 무모하지만 다시 한번 더 돌아가 마지막으로 사원들을 보고 싶었던 마음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자전거를 묶어 둘 수가 없었으니 사원 내부로 들어가 보는 것은 끝난 일인가, 하여 아쉬웠는데, 각 사원 입구에 있는 관리 하는 사람들이나 식당 사람들 모두가 걱정 말고 들어가도 된다고 웃으며 말했다. 안심할 수 없었다. 편치 않은 마음이었고, 무엇을 믿지 못하는 것인지 불분명한 채 불신이 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믿어 보자, 잃어버리면 변상하면 되지'  하는 마음으로 잠금 하지 않은 최신형 자전거를 그대로 두고 사원에 들어갔다. 사원 안에 있는 동안에는 절로 자전거의 존재를 잊었고 돌아와 보면 자전거는 언제나 그대로 있었다. 어느덧 불안이 사라졌다. 그들을 믿었고, 의심을 거두었다. 잃어버리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세상이 무너지는 일도 아닌데. 나도 모르게 마음이 달라져 있다. 믿음의 모양은 이런 것인가. 믿고 기대고 의지한다는 것은 이런 힘을 주는가. 믿는다는 것의 힘은 결국 자기 자신을 믿게 하는 힘인가. 그러고 보니 여기는 신의 집이다. 신의 땅이며, 캄보디아 사람들의 자존심의 땅이다.  그들을 믿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또 나 자신을 믿었다. 무사히 자전거를 타고 지는 해로 하늘이 붉게 물들 때 씨엠립으로 돌아왔다.

 '우유의 바다 젓기' 이 장면 그대로가 영원을 보여주는 스냅사진 이라고 생각했다.


앙코르와트. 우유의 바다젓기 부조는 앙코르와트의 동쪽 회랑에 있다.


무엇이 뜨겁게 나를 이곳으로 이끌었던가 생각을 해 본다. 오래된 돌이 조각과 신화와 시간으로 세워진 사원을 지나, 아직 퍼즐의 조각을 맞추지 못한 수많은 돌들이 몸둥이처럼 누워있는 장면을 건너 그 위에 풀이 덮고 나무가 자라고 원숭이가 노니는 풍경이 일상이 된 사원은 그것들과 더불어 다시 살아 있다. 새 시대의 새로운 방식으로 새 생명을 얻었다. 힌두교의 창세신화인 '우유의 바다 젓기'는 앙코르와트 동쪽 회랑에 거대하게 조각되어 있다. 중심에 있는 비슈누 신은 힌두신의  산山 (메루산)을 뽑아다가 거북이 등에 받쳐놓고 뱀을 감아 양쪽에서 선한 신과 악한 신들로 하여금 천년동안 우유의 바다를 젓게 한다. 우유의 바다를 저어 얻는 것은 불멸을 주는 암리타. 천년동안 휘젓는 생명가득한 우유의 바다에서 많은 것들이 탄생한다. 그중에 하나가 수많은 물의 요정 압사라이다.  불멸암리타를 먹은 선한 신, 그러나 우유의 바다 젓기에 힘을 보탠 악한 신도 불멸의 암리타를 나누어 마셨으므로 영생을 얻었고, 그래서 지금 우리의 세상에는 선과 악이 함께 존재한다는 이야기.  세계가 무너지고 다시 새롭게 생성하는 신의 뜻을 그려낸 장대한 서사적 조각은 그대로 눈앞에 펼쳐진 앙코르사원들의 곳곳에서 발견다.  선과 악  당기는 줄다리기는 결국 태어남과 죽음사이의 '살아있음'의 상태.  삶이란 선과 악, 과 죽음 사이의 팽팽히 당겨진 줄다리기 위에서 다시 부수고 짓고 다시 태어나는 순환의 반복인 것을.  앙코르 사원 그 자체야 말로 살았으나 죽었고, 그러나 다시 모든 만물과 함께  영원히 사는 생을 얻은 가장 분명한 의미이자 증거라고 생각했다.






앙코르톰의 북문, 앙코르 톰으로 들어서는 사대문 중 하나인 것





세상이 어둠 속으로 저물어 갈 때 해가 더 이상 비추기를 거두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발하는 빛 잠시 소등하는 것이라고 느꼈다. 앙코르의 모든 사원은 찬란히 빛나다가 스스로 허물고 다시 풀과 나무와 동물들과 사원과 신이 나란히 영생을 얻은 모습으로 빛나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므로 모든 소멸과 생성, 지구의 생태와 흐름을 신의 시각으로 읽어야 할 일이 아닌가. 이토록 오래된 옛 사원을 바라보며 우리가 놀라는 이 아름다움은 사원 전체가 진리눈에 볼 수 있도록 조각한 경전 그 자체라는 것에 있다. 그리고  신의 이야기처럼 폐허로부터 피어오르는 생명에 대한 찬미가 세상에 펼쳐져 있는 데 있다.  땅에 뿌리내린 생명이 죽지 않고 순응하며 영원으로 이어오는 순리를 신의 목소리로 겸손하게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이 거대한 앙코르 사원은 말하고 있었다. 죽음으로  것을 여주는 힘, 그것었다.



 

앙코르 톰 내부의 바푸온. 여전히 제자리를 찾지 못한 돌조각들이 쌓여 있다. 웨딩촬영을 하고, 원숭이가 자신의 땅처럼  누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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