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는 밤을 거슬러 이른 아침 한국땅에 닿았다. 오전 10시쯤배낭을 메고 집 앞에 다 닿았을 때 집에 들어가는 일이 망설여졌다. 집으로 들어가면 완전히 한국으로 돌아올 것만 같았다. 그곳의 온기와 웃음과 풍요로움이 금세 사라질 것 같았다. 책이 잔뜩 들어 있어 무거운 배낭가방을 등에 지고 내 집이 바라다 보이는 카페에 앉아 한참을 머뭇거리고서도 기어코 그냥 돌아올 수가 없어서 집 근처에 있는 베트남 쌀국수 집에 갔다. 고수를 가득 넣고 쌀면을 후루룩 들이키듯 먹었는데 허기가 졌다. 돌아가고 싶지 않아서, 도저히 여행을 끝낼 수가 없어서 천천히, 천천히 걸었다.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준비가 되지 않은 마음으로 문을 열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오고서도 나는 한동안 마음이 집에 닿지 못했다. 꽤나 오랫동안 한국음식이 떠오르지 않았다. 며칠간은 베트남 쌀국수를 먹었고, 밖을 잘 나서지 않았지만 동남아 식재료를 살 수 있다는 안산 동남아거리에 가서 레몬글라스, 고수, 동남아 고추를 샀다. 씨엠립 쿠킹클래스에서 배운 '아목피쉬'를 적절히 타협하여 만들어 보았다. 대구대신 새우를 넣고 아목 소스를 만들고, 밥 대신 파스타면과 어우러지게 요리했다. 잘 먹지 않는 라면을 끓여 코코넛크림, 레몬글라스, 동남아 고추, 고수를 넣고 제법 동남아식 국물국수 맛을 냈다. 한동안 과일가게에 가서도 망고, 파인애플만 눈에 보였다. 생과일이 없으면 통조림이라도 좋았다. 저녁이 되면 집 근처 바에 갔다. 씨엠립에서 산 앙코르 사원의 가이드 북을 한 권 들고 창가자리에 앉아 꼭 맥주 한잔만 마시고 돌아왔다. 맥주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던 나도 캄보디아 그 더운 열기 가운데 있으면 저녁마다 저절로 맥주 생각이 났다. 돌아온 한국은 여전히 겨울 속에 있었지만 내 마음은 여름이었다. 사람들은 캄보디아 시장에서 주로 코끼리 바지(코끼리 문양이 있는 편한 고무줄바지)를 샀지만, 나는 아주 간단한 제단과 재봉을 하고서도 멋이나는 캄보디아 바지를 발견했다. 앞을 가리는 천 한 장, 뒤를 가리는 천 한 장으로 바지가 되는, 만들기가 쉽고 편하고도 시원하면서 체형에 크게 상관이 없는, 멋이 나는 바지를 보고서 놀라운 방식의 옷이라고 생각했다. 스카프나 만들까 하고 사용하지 않던 쪽 염색비단을 이어 금방 바지 하나를 만들었다. 온몸에서 그 땅의 열기가 빠져나가는데 시간이 걸렸다.
왜, 무엇이 내 마음을 흔든 것인가 생각했다.
그것은 아마도 그들과 내 사이에 인간다움의 결이 투명하고 순수하게 이어져 있다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 어디에도그 무엇도 가두는 것이 없어 자유로운 마음, 닭, 병아리, 개, 고양이, 소, 돼지도 자유롭게 지내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자유로움,사람과 동물의 관계, 배려하는 마음과 툭툭이, 자전거, 차, 사람 그 어느 것에 우선을 따지지 않고 제 갈길을 가다가누가 먼 저랄 것 없이비켜가고 기다리고 건너가는, 결코 화내거나 소리치지 않는 여유나 마음은 그 땅의 기후와 풍요로움에서 오는 느긋함이었을까. 씨엠립 사람들의 얼굴에서 나는 앙코르의 사면상에 새겨진 크메르의 미소를 보았다. 그 미소는 잔잔히 모든 이의 얼굴에서 빛났다. 내게 열쇠고리를 팔려고 줄곧 따라오던 어린아이에게 '네 이름이 뭐니?' 하고 물었을 때 이내 방긋 웃으며 이름을 이야기해 주던 순진함. 어린이다운 천진한 눈빛. 인간다운, 사람다운 눈빛. 그리운 그것. 내가 먼저 웃어야 할 때도 있지만 나와 마주하는 사람들은 항상 그렇게 미소 지었고 따뜻함은서로 말이 통하지 않아도 가슴에 전해졌다. 그 평온함이 내 얼굴에도 스며들어 언제나 나는 웃고 있었다.
씨엠립 숙소아래에 함께 붙어있는어느 카페주인이 내게 물었다.
"당신은 항상 그렇게 웃고 있나요?"
"당신들이 나를 이렇게 만들잖아요"
하고 또 웃는다.
서로가 서로를 미소 짓게 하는 관계. 순환. 자산.
2006년 즈음이었나, 프랑스친구들과 함께 한국으로 여행 왔을 때가 있었다. 그때 외국인이 된 시선으로 한국을 바라보았을 때 우리가 가진 가장 큰 매력은 단연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정이 넘쳤다. 언제나 웃으면서 사람을 반겼고 스스로 넉넉하지 않아도 넘치게 베풀었다. 받는 사람들은 그 베풂이 낯설었다. 왜 주는지, 왜 받아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으면서도 조건 없이 마음을 건네받고 언제나 감동했다. 타지에서 온 사람들에게 언제나 밥을 챙겼고, 다시 돌려받지 못하더라도 밥을 사주었다. 불편함을 기꺼이 자신이 갖고 편안함을 내어 주었다. 무언가를 바라지 않고 서로 건네는 장면은 서구의 세상에서 잘 찾아볼 수 없는 훈훈한 풍경이었다. 우리는 정이라고 말했고, 나는 그것이 우리의 가장 큰 관광유산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그런 훈훈함이 사라졌다. 원칙대로, 제 권리를 잘 찾는 것이 똑바로 사는 세상이 되어서 내 것을 더 주거나 내가 조금 더 손해를 보는 일은 없으며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보다는 오직 지폐의 숫자가 관계와 자신을 증명하는 날들이 왔다. 원칙을 지키고 융통성이 없으며 차갑고 척박하고 건조한 관계를 만들었다. 우리 사회에 그런 선이 필요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되었다.
내가 만난 캄보디아는 풍요로운 땅이었다. 지천에 널려있는 과일들, 풍요로운 쌀, 춥지 않은 날씨들을 생각하면 사실 부러울 것이 없는 땅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의 넘치고 모자람을 누가, 무엇을, 어떤 기준과 잣대를 가지고 비교할 수 있는 것일까. 그 마음의 부와 평화, 가난과 결핍은 오롯이 스스로의 자각이 만드는 만들어내는 각자의 세계라는 생각이 든다. 옳고 그릇 것도, 맞고 틀린 것도 없다. 과일나무 한 그루는 사계절 속에서 침묵으로 제 할 일을 할 뿐이다. 철을 따라 이룰 뿐이다. 그것이 자연이다. 그렇게 살면 될 일이다.
캄보디아에서 얻은 것은 아시아 문화의 근본이 하나였다는 것에 눈을 떴다는 점에 있다. 마음과 욕망과 의지가 세운 모든 행위의 흔적이 아시아 전체에서 하나의 문맥으로 연결된 것을 어렴풋 찾아낸 것에 있다. 힌두와 불교, 유교적 성향으로 이룬 동남북아시아의 문화적 흐름이 같은 모습으로 겹쳐 보였다는 것에서 놀라움이 있었다. 모두의 평화는 우리가, 세계가 하나라는 강렬한 마음의 연대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지구는 둥글고 우리는 연결되어 있고 그 뿌리는 하나였다는 것. 너와 나는 같고 그곳과 이곳은 다른지 않은 땅이라는 것.
캄보디아에서 돌아온 지 2달이 되어가는데 나는 아직 캄보디아를 놓지 못하고 있다. 다시 돌아가 그 속에 있는 보석 같은 마음을 만나고 싶다. 날 것처럼 펼쳐진땅으로부터 '우리'를 느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