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단상.
나의 예술관을 한마디로 압축 하면 무한에 대한 호기심에 발로이며 그 탐구이다. 무한이란 자기에서 출발하여 자기 이외의것과 관련을 맺을 때 나타나는것을 가리킨다. 자기를 자기자신으로 적립하고 표상화 하는것이 아니라 타와의 관련 속에서 자기 존재를 확인하고 그 관계가 성립하는 장에서 세계를 느끼고 깨쳤으면 하는 바이다.
p.19
거리의 역할이 오늘날의 나를 만든 것이다.
살아가는데 있어서 위성의 거리는 아픔이며 또한 힘이다. 보거나 보이고 있다는것은 무척 쓰리다. 그러나 이 거북한 장소 아닌 장소야말로 살아 있는 세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나는 한군데 가만히 있지 못하고 마음 먹고 움직이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짓을 되풀이 하고 있는 동안에 사물을 공동체 밖으로 끌어내요 끝없는 자의 성으로 보는 버릇이 붙었다. 끊임없이 외무성의 발해고 이타성으로 살아가는 나날은 강렬하고도 슬프다.
p. 25
경험이란 외부와의 맞닿음이며 거기에서 무한감을 맛보게 된다. 제작이란 참으로 사는 일이며 신체적 행위를 통해 무한을 닿는 일이다.
p.31
나의 일인 즉 스스로의 근대성을 포함하여 그것과 투쟁 하고 비판하는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조각이나 회화의 성립과 기원을 묻는 일이다. 만든것과 만들어지지 않은것을 신체를 종결 시켜 관계 짓게 하는 짓이다. 작품이 내부와 외부를 매개 하고 환기 시키는것이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p.40
여백위의 예술.
이우환 선생님의 작품 세계에 대한 이해. 작품에 대한 평을 작가 스스로 한다는 것은 쉽자 않은 일이다. 마치 작가가 작가의 의도에 대한 것을 이해시키려 하는 그것도 나는 이라는 객체의 주체를 가지고 다가서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의 문장들에 대한 것들은 작가 스스로에게 자조적으로 이야기 하눈 것이 아니다. 나의 격은 이러 합니다만, 당신의 격은 어떠합니까 라고 묻는 의미의 순환을 가져다 준다.
나는 여러 화가의 화면 속에 보이는, 그저 빈 공간을 여백 이라고는 느끼지 않는다. 거기에는 무언가 리얼리티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큰 북을 치면 소리가 주위 공간에 울려 퍼지게 된다. 큰 북을 포함한 이 바이브레이션의 공간을 여백이라 하고 싶다. (중략) 그러니까 그린 부분과 그리지 않은 부분, 만든 것과 만들어지지 않은 것, 내부와 외부가 자극적인 관계로 서로 작용하고 울려 퍼질 때, 그 공간에서 시나 비평이나 초월성을 느낄 수 있게 되 는 셈이다. 예술작품에 있어서의 여백이란, 자기와 타자 와의 만남에 의해 열리는 앙양된 공간을 말한다.
1. 여백
이우환 선생님의 여백에 대한 정의다. 마치 공간속의 시간, 시간 속의 공간이 주는 느낌에 대한 감성을 정리한 나 처럼 자신만의 주체를 내보아며 판단은 외부의 시선에 맡긴 나 처람 말이다. 사회에서의 시선과 바라보는 의미 물론 중요하다. 이 시선과 의미로 내 스스로의 포지션이 결정 되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어떠한 격을 읽어내었으며, 이 격은 나에게 어떠한 영향을 끼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격의 판단이다. 이것은 철저하게 자신의 환경 내에서 이루어지며 학습된다. 이 학습의 상호소통이야말로 자신만의 격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이우환 선생님의 특이한 정체성은 이 상호고통의 격을 무한대의 자신에 대한 통제로 나타났으며, 이는 그 작품 세계에 그대로 반영이 되어 있다.
무엇인가를 바라보고 관조할 수 있는 자기 자신만의 격의 존재야말로 이 상호소통을 배가시켜준다고 말할 수 있다. 내가 좋아하는 샤토 무통 로쉴드 2013의 그림을 보면 그 여백과 색이 주는 그만의 해석을 잘 느낄 수 있다.
선생님이 미술계에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후반부터다. 당시 일본 미술계에서 새롭게 등장한 것이 바로 모노파 운동이었는데, 선생님이 1969년 모노파의 대표적인 작가 세키네 노부오를 다룬 평론인 '존재와 무를 넘어서'를 발표하면서 주목받기 시작했고 이후 모노파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한 인물로서 큰 영향을 끼쳤다. 1971년에는 평론집 '만남을 찾아서'를 출간해 한국 미술계에서도 인기를 끌었다. 다만 철학과 출신답게 미술평론에 하이데거의 이론을 접목하는 등 가볍게 읽기는 어려운 글을 많이 썼다.
모노파 : 物派(물파). 일본 발음은 '모노하'이다. 모노파(もの派)에서 '모노(もの)'는 일본어로 ‘물(物)’, 즉, 물체라는 뜻.
물체 그 자체에 대한 탐구를 통해 거기서 미학적인 면을 발견하는 일본의 미술운동을 말한다. 나무, 돌, 점토, 철판, 종이 등의 소재에 거의 손을 대지 않고, 그 자체로 작품에 등장시켜 이를 예술로 제시했다. 대개 몇가지 재료들의 조합의 구성하는 '관계'에서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찾거나, 그 재료와 재료를 바라보는 관찰자와의 '만남'에서 의미를 찾는다. 작품 특성상 회화보다는 조각이나 설치예술 부분에서 더 영향력이 있다.
관계의 의미를 찾아 나아가는 격의 배움에 있어서 앞서 이야기한 특이한 정체성이 존재한다고 했는데, 이 특이성은 바로 일본과 한국 어느 미술계에서도 인정 받지 못했던 이단아로서의 존재의 격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격은 자기 스스로의 격체를 관조하기에 좋은 조건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든다. 여기에서 오는 자기 자신의 주체의 성립과 이것을 통한 스스로의 소통 칭구를 몸이라는 것으로 투영해 작품을 완성시켜 나아간다.
무엇인가를 관조하고 투영하는 격은 즉 예술은 타인과의 소통이 없으면 예술이 아니라 생각한다. 즉 스스로의 격이 타인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어야 예술이 성립된다.
그림은 점에서 시작, 점이 이어지면 선이 된다. 선은 시간을 뜻한다. 점이 모이면 그림이 되고, 사람이나 바위가 될 때도 있으며 흩어지면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 그것이 남아 훗날 내 그림의 모티브가 됐다." 라고 책에서 선생님이 이야기 하듯, 타인 상대방과의 소통이 시작 되었다. 내가 좋아한 작품중 하나가 이 선으로부터 <1978> 작품이다. 또한 작품 <Dialogue> 등이다.
공간속의 시간 시간 속의 공간은 타인에 대한 지극한 소통이 메인 테마이다. 수 많은 사람들과의 조우에서 이 소통은 불완전한 대화가 될 수도 있으며 또한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가능성에 대한 여백이요 미학이다.
점에서 시작 점이 이여지면 선이 된다. 선은 시간을 말해주듯 내 내면은 공간이며 이것은 시간이다. 이것을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하는 것은 스스로와 타인의 격에 달러있다. 환경을 조정하고 이끌어 나아간다는 것은 공간 속의 시간을 그 내면을 상대방에게 인정받고 있다는 뜻이 된다.
여백이 주는 예술 이 책이 주는 의미는 공간 속의 시간 그 여백에서의 나의 자신을 찾아나아가는 또 다른 의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2. 소통
예술은 시이며 비평이고 그리고 초월적인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두 가지 길이 있다. 첫 번째는 자기의 내면 적인 이미지를 현실화하는 길이다. 두 번째는 자기의 내면적인 생각과 외부 현실을 짜엮는 길이다. 세 번째는 일상의 현실을 그대로 재생산하는 길이지만 거기에는 암시도 비약도 없기 때 문에 나는 그것을 예술로 여기지 않는다.
내가 선택한 것은 두 번째의, 내부와 외부가 만나는 길이다. 거기에서는 내가 만드는 부분을 한정하고 만들지 않은 부분을 받아들임으로써 서로 침투하기도 하고 거절도 하는 다이내믹한 관계를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이 관계작용에 의해 시적이 며 비평적이며 그리고 초월적인 공간이 열리기를 바란다.
나는 이것을 여백의 예술이라 부른다.
그런데 나는 여러 화가의 화면 속에 보이는, 그저 빈 공간을 여백이라고는 느끼지 않는다. 거기에는 무언가 리얼리티가 결 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큰 북을 치면 소리가 주위 공간 에 울려 퍼지게 된다. 큰 북을 포함한 이 바이브레이션의 공간을 여백이라 하고 싶다.
이 원리와 같이, 고도의 테크닉에 의한 부분적인 붓의 터치로 하얀 캔버스의 공간이 바이브레이션을 일으킬 때 사람들은 거 기에서 리얼리티가 있는 회화성을 보게 되리라. 그리고 나아가 프레임이 없는 타블로는 벽하고도 관계를 맺게 되면, 회화성의 여운이 주위 공간에 퍼질 터이다.
이러한 경향은 조각에서 한층 더 선명하다. 예를 들어 자연석 과 뉴트럴한 철판을 어울려서 공간에 강한 악센트를 주면, 작품 자체라기보다는 언저리의 공기도 밀도를 지니게 되고 그 장소가 열린 세계로서 선명하게 보이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그린 부분과 그리지 않은 부분, 만든 것과 만들어지 지 않은 것, 내부와 외부가 자극적인 관계로 서로 작용하고 울려 퍼질 때, 그 공간에서 시나 비평이나 초월성을 느낄 수 있게 되는 셈이다.
예술작품에 있어서의 여백이란, 자기와 타자와의 만남에 의해 열리는 앙양된 공간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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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스스로와 상대방에 조우에 의해 열리게 되는 앙양된 공간, 앙양(昂揚) 정신이나 사기 따위를 드높이는 것을 뜻하는 한자 표현이다. 이것은 상호간의 마음의 소통이 높아지는 공간으로의 여백에 대한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즉 소통의 시발이자 초월성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즉 서로간의 격의 소통인 것이다. 소통이 없는 예술(삶)은 죽은 것과 같다. 사람들은 누구나 소통을 원하며 소망한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의 진정한 소통은 쉽지 않다. 환경이 다르고 가치관과 생각의 차이가 크다. 또한 개인을 평가하고 바라보는 기준이 점점 높아지며 엄격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우환 선생님의 책에서 처럼 내부와 외부가 자극적인 관계로 서로 작용하고 울려 퍼질 때, 그 공간에서 시나 비평이나 초월성을 느낄 수 있게 되는 셈이다. 이 초월성의 느낌은 서로간의 공유이자 공감인 것이다. 공감을 느낄 수 있는 소통의 폭이 적어진 현실에서 이를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소통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내 경우에는 이 외부와 내부의 자극적인 관계의 시작이 바로 커피와 와인이다. 커피는 외면이요 와인은 내면이다. 처음의 시작은 커피요소통의 시작은 와인인 것이다. 서로가 서로의 관계로 작용하는 시작은 커피요 울려퍼지는 것은 와인이다. 이 상호작용의 미학은 서로간의 격에서 나온다.
지인들과의 자연스러운 소통에서 상대방의 좋은 격은 자극적으로 내 내면에 울려퍼질 수 있으며, 나의 격 또한 상대방에게 그러할 수있다면 얼마나 좋은 관계가 될 것인가 이것의 키가 바로 와인인 것이다. 물론 처음에는 쉽지 않다. 그러나 처음의 시작이 중요하다. 자신의 내면이 어떠한가 파악하는 것 포도의 향과 맛이 주는 조화 찾기가 그 시작이 될 수 있듯이 격의 시작은 자기 자신 스스로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3. 무한
일필—筆의 스트로크, 하나의 돌, 한 장의 철판의 상태는, 그것들이 타와 대응에 있어 힘에 넘치 며 살아 있는 바로 그것이지 않으면 안 된다. 행위 못지않게 쓰 는 소재의 힘이 중요하며 나아가 소재끼리 혹은 주위 공간끼리 조응하는 관계항으로 기능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러한 것은 짜 엮는 논리의 철저화와 함께 운동선수가 기술을 연마하듯이 엄 격한 훈련이 수반됨으로써 비로소 가능해진다. 조응력을 불러 일으키는 것은 나이지만, 작품이 무한성을 띠게 되는 것은 여백 으로서의 공간의 힘에 의한다. 이렇게 하여 작품은 현실과 관념을 호흡하면서 동시에 그것들에게 영향을 주게 되는 것이다.
내 작품은 타인에게 있어서와 같이 나에게 있어서도 늘 미지성을 내포하는 반투명한 것이기를 바란다.
여백의 예술 pp. 23
무한에 대해
나에게 있어서도 늘 미지성을 내포하는 반투명한 것이기를 바란다.
무한이란 무엇인가?
무한을 반복개념으로 그 한없는 차이로서 나타내려고 했다. 라고 선생님은 작품에 투영하려고 했다. 이것이 선으로부터 1970년 작품이다. 내가 좋아하는 작품이기도 하지만, 선생님만의 독특한 관계관을 상대방에게 투영하고자 했던 무한의 격이라 생각한다.
우리가 글을 읽는 것의 기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글이 주는 공감의 여운 때문일 것이다. 각자 자라온 환경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다. 이로 인해서 바라보고 인지하고 투영하는 개개인의 격이 달라진다.
격이 다르다는 것은, 상대방이 나와 다르다는 것을 인지 하는 과정이다. 언어란 다잡아보자면 자아의 표출된 대명사이며 그 재현이라고 이야기 한 선생님의 말씀처럼 다름을 인지할 수 있는 폭이 자연스럽고 커지면 그 사람의 격은 성장한다. 서로가 서로의 다름을 인지하는 것의 시작은 남녀의 성차이로 볼 수도 있으나, 근본은 자기 자신의 내면이 어떠하다는 것의 파악에 있다. 또한 인간의 행동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 학습된다.반두라(Albert Bandura)의 말처럼 성장은 학습을 가져다 준다. 학습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첫째로는 상대방에 대한 이해이고 둘째로는 자기 자신에 대한 파악이다.이 파악에 대한 문제는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다.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것이 존재하는데, 바로 시간이다.
이 시간은 공간을 요한다. 내가 이야기 하는 공간 속의 시간 시간 속의 공간과 일치하는 것이다. 여백은 공간이며 무한성을 지닌다. 이 무한성은 미지성을 지니고 있으며, 수 많은 격들을 지니고 있다. 이 격을 파악할 수 있는 나만의 눈이 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 본다면 그것이 독서가 아닌가 싶다.
작품이 무한성을 띠게 되는 것은 여백 으로서의 공간의 힘에 의한다라고 선생님은 말씀하고 있듯이 나만의 무한성을 채워 나갈 수 있는 눈은 여백 즉, 공간속의 시간이 가지고 있는 것들 중 하나인 독서다. 독서를 통한 격의 성장은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환경을 넘어설 수 있으며, 이는 상대방 타인에게 공감 즉 이해를 가져다 준다 할 수 있다. 이 이해의 시작은 나중에 인정이라는 신뢰를 얻어 낼 수 있는 토대가 된다.
내가 자연스러운 인정을 받을 수있는 내 격의 소통그 시작은 언어 자아의 표출된 형용사 안녕하세요. 오래간만입니다 로서 시작이 될 것이다. 그 시작이 자연스럽고 자유스러워 지기를 바라는 마음 가득함이 기대된다.
4. 표현
표현은 표를 찌르는 것 일수록 가슴에 와 닿으며 자유스러움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이것은 테크닉이나 개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프로세스나 훈련의 축적을 쌓는 문제이며, 타와 관련의 엄격함에 의한다.
여백의 예술 pp. 26 이우환 현대문학
표현이란 무엇인가? 한자로는 表現 표현 表 겉 표 現 나타날 현 으로 정의는 다음과 같다. 첫번째로 나타냄. 또는 나타난 형상(形象ㆍ形像)이나 모양(模樣)을 말한다. 두번째로는 내면적(內面的) 과정(過程)의 감성(感性) 표시(表示). 심적(心的) 상태(狀態), 과정(過程) 또는 성격(性格), 지향(志向), 의미(意味) 등(等) 모든 정신적(精神的), 주체적(主體的)인 것이 외면적(外面的), 감성적(感性的) 형상(形象ㆍ形像)으로 화하는 일. 또는 이 객관적(客觀的), 감성적(感性的) 형상(形象ㆍ形像) 그 자체(自體). 곧, 표정(表情), 몸짓, 언어(言語), 필적(筆跡), 작품(作品) 등(等). 표출(表出).
무엇인가를 들어내어 나타낸다는 것, 그것이 감정이나 성격 그러한 상태를 몸을 사용하며 외면으로 나타내는 것을 우리는 표현이라 부른다. 미술가에게는 그것의 형상화인 작품이 그것을 대변해 준다고 할 수 있으며, 작가에게는 그것이 글로 대변되는 에세이나 시 혹은 소설이 될 수 있으며 연구자에게는 그것이 논문으로 대표될 수 있다.
이우환 선생님에게는 이 표현의 극이 개념작인 표현이 아닌 그림이나 작품을 만들어 낼 때의 프로세스 즉 경험의 축적이며, 타인과는 다른 엄격한을 내포한다고 정의하셨다. 마치 운동 선수가 시합전에 훈련을 통한 실제의 현실을 투영하듯 연습을 실제 처럼 실제를 연습처럼 자연스러운과 자유를 느끼고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하듯 말이다. 중요한 것은 타와 관련한 엄격함이 아닌가 한다.
다른 것에 엄격함을 지니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이것은 먼저 철저한 자기 통제가 선행되어야 가능한 것이라 생각한다. 자신 스스로가 통제 되어 있다는 것은 타인 즉 타로 본봐 문제가 없다는 뜻이며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는 내면의 내구도를 지녔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내 작품은 오로지 내면과 외계와의 관계를 위해 개별화 되고 고유화되어 철저하게 어중간하고 애매하다라고 선생님은 이야기 하고 있다. 이것은 다시 말한다면 자기 자신만의 독창적 표현이 타가 이해하기에 엄격함을 담고 있기 때문에 이해하기 쉽지 않은 난해성을 지니고 있다 라고 이야기 할 수 있다. 한걸음 더 나아간다면 이 난해성은 표를 짜르는 의미의 이해가 동반된다면 가슴에 와 닿는다는 역설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개별화 및 고유화 되었지만 철저하게 애매하다는 것은 선생님의 작품이 담고 있는 여백의 의미와도 일맥상통하다. 이해하기만 한다면 철저하게 자연스러워진다 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표현은 소통을 동반한다. 미술 즉 예술하는 작가에게 있어 소통하지 못하는 표현은 죽은 것이라 생각된다. 자기 자신만의 독창성을 이해해 주기 바라는 철저하게 애매한 의도, 이 의도의 미학이라 말로 선생님의 작품을 이해할 수 있는 첫 시작의 표현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는 지금의 현재 현재의 오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