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싶은 이야기(무라카미 하루키)
42.195Km를 달린다는 건 과연 어떤 기분일까?
5Km 마라톤은 도전해 봤지만 그 또한 나에겐 쉽지 않은 도전이었으니 말이다.
그런 마라톤을 20년째 하고있다는 무라카미 하루키.
마라톤도 소설을 쓰는 것도 시간과 인내가 필요한 작업일 것이다.
인내라기 보단 고통을 즐길 줄 알아야 할 것 같다.
그가 서문에도 쓴 내용인 '선택 사항으로서의 고통'에 그 내용이 담겨있다.
'아픔은 피할 수 없지만, 고통은 선택하기에 달렸다.'
소설을 쓰는 작업도 마라톤도 고통스럽지만 그가 선택한 고통인 것이다.
내가 정해놓은 목표를 어떠한 타협도 하지 않고 묵묵하게 나와의 싸움을 전개해 나가는.
30킬로까지는 '이번에는 좋은 기록이 나올지도'라고 생각하지만, 35킬로를 지나면 몸의 연료가 다 떨어져 여러 가지 일에 대해서 화가 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텅 빈 가솔린 탱크를 안고 계속 달리는 자동차 같은 기분'이 된다. 하지만 완주하고 나서 조금 지나면 고통스러웠던 일이나 한심한 생각을 했던 일 따위는 깨끗이 잊어버리고, '다음에는 좀 더 잘 달려야지'하고 결의를 굳게 다진다.
아무리 경험이 쌓이고 나이가 들어도 결국은 똑같은 일의 반복인 것이다.
그렇지, 어떤 종류의 프로세스는 아무리 애를 써도 변경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그 프로세스와 어느 모로나 공존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가정하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집요한 반복에 의해 자신을 변형시키고(혹은 일그러뜨려서), 그 프로세스를 자신의 인격의 일부로서 수용할 수밖에 없다.
나를 일그러뜨려서 프로세스에 나를 맞춘다는 것은 결국 인고의 시간을 참고 견뎌내는 마치 도를 닦는 느낌과도 흡사하게 느껴진다.
마치 곰이 인간이 되기 위해서 마늘만 먹으며 동굴에서 고통의 시간을 견뎌내듯이.
나는 계속 달릴 것이다. 설령 기록이 더 떨어진다 해도 나는 아무튼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한다는 목표를 향해서 예전과 같이-때로는 지금까지 보다 훨씬 많은-노력을 계속해갈 것이 틀림없다.
그렇다. 누가 뭐라 해도 그것이 태어날 때부터의 나의 성격인 것이다. 전갈이 쏘는 것처럼, 매미가 나무에 매달려 있는 것처럼, 연어가 태어난 강으로 돌아오는 것처럼, 원앙이 서로를 갈구하는 것처럼.
그것이 나에게 있어, 그리고 이 책에 있어서, 하나의 결론이 될지도 모른다. <록키>의 테마곡은 어디에도 들려오지 않는다. 등을 지고 걸어갈 석양도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그것을 안티 클라이맥스라고 사람들은 부를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모든 시간이 결국은 나를 위한 시간인 것이고 그 고통을 감내할 수 있는 근육이 생긴 것이 보답일 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면 좀 더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다.
록키의 테마곡이 들리지 않아도 계속 달려야 한다.
진정한 행복은 고통 뒤의 짧은 휴식이 아니라 고통을 견뎌낸 시간들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