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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미 Jan 11. 2024

힘을내요, 홍차장

소시민의 하루 (소설)

  시계를 보니 8시였다. ‘아뿔싸 늦었구나.’라고 일어났는데 꿈이었다.
 등엔 땀이 흥건하다. 꿈 때문인지 더워서인지 모르겠다. 어쩌면 꿈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오늘도 지하철을 타러 집을 나선다.
 찌는 듯한 한여름의 열기가 아침부터 숨이 턱 막히게 다가온다. 가벼운 마음으로 출근에 나섰는데 열기에 그만 벌써 지쳐버리는 느낌이다. 태양의 열기를 최대한 피하며 아파트 주차장을 지붕 삼아 지하철역으로 향한다.
  옛날 산을 깍아 지은 대단지 아파트로 역까지 가려면 한참을 걸어 내려가야 한다. 물론 보도블럭을 따라 걸어서 역까지 갈 수도 있지만 살다 보면 여러 갈래의 길을 발견하기 마련이고 나는 다행히도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상가건물의 엘리베이터를 이용해서 역까지 가는 빠르고 편한 지름길을 발견했다.
   ‘엘리베이터 고장‘
  오랜된 건물의 엘리베이터라 종종 말썽을 피우더니 오늘 하필 고장이라니. 날도 더운데 아침부터 땀 흘리게 생겼네 라고 투덜거리며 계단을 초스피드 내려와서 비탈길을 따라 지하철 입구까지 겨우 다다랐다. 벌써 몸은 지쳤지만 이제 본격적인 출근길에 입성이다.
 그런데 오늘 기계들이 단체로 시위라도 하기로 했나? 지하철로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도 고장이 나서 출입이 막혀있다. 내려가는 길은 에스컬레이터밖에 없는 출입구이고 다른 출입구로 가려면 한참을 또 걸어서 내려가야 한다. 한쪽 편의 올라오는 에스컬레이터도 운행은 멈췄지만 이동은 할 수 있게 막아놓지 않았기에 올라오는 사람들이 조금 줄어들었을 때 뻔뻔함을 무릅쓰고 죄송합니다를 연신 읊으며 몸을 게처럼 세로로 돌려서 사람들을 비켜서 아래로 내려갔다. 1명만 설 수 있는 좁은 에스컬레이터를 그렇게 비켜서 내려가는 길은 평소보다 두 배로 길게 느껴졌다. 도대체 이놈의 에스컬레이터는 왜 이렇게 자주 고장이 나는 건지 모르겠다. 꼭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가 문제다. 사람들은 눈을 흘기면서 꼭 이리로 내려와야겠냐는 따가운 눈총을 보내기도 하고 중고등학생들은 어우 짜증나 하며 대놓고 싫은 내색을 하기도 했다.


  오늘 어째 아침 시작부터 왠지 순탄치 않구나를 느끼며 지하철 플랫폼으로 뛰어갔다. 플랫폼의 지하철 진입 음악이 들리면 몸이 자동으로 뛰게 된다. 파블로프의 개처럼 내 머리도 지하철 진입 음악에 반복 학습이 된 건지도 모르겠다. 꼭 늦지도 않았는데 뛰게 된다. 그런데 뛴다고 바로 진입한 지하철을 타는 경우는 3대 중의 1대꼴밖에 되지 않는다. 오늘은 순탄치 않은 에스컬레이터 덕분에 뛰었지만, 당연히 지하철을 놓치고 말았다. 시계를 보니 벌써 8시20분 이었다.
  오늘따라 지하철 대기 줄도 유난히 길게 늘어서 있다. 요즘 들어 장애인연대의 지하철 시위가 아침 출근 시간대에 자주 있곤 하더니 아무래도 오늘도 시위가 있는 것 같다. 속으로 왜 하필 시위해도 바빠죽겠는 아침에 하는 걸까 살짝 짜증이 올라온다. 한편으론 거동이 불편한 장애인들은 얼마나 불편했으면 이런 불편을 조금이나마 느껴보길 바라는 마음에 일부러 출근 시간에 시위하겠는가 생각에 그 마음을 헤아려 본다. 덕분에 지하철이 순조롭게 도착하지 못해서 평소보다 사람이 많은 지옥철을 타고 출근길에 올랐다. 여름이라 서로 닿기만 해도 기분이 언짢은데 그 오묘한 신경전으로 예민한 와중에도 다들 한 손에는 핸드폰을 들고 각자의 시간 속에서 출근 들을 한다. 그런데 내 뒤의 어깨에 살짝 묵직한 게 느껴져서 뒤를 보니 한 젊은 여자가 내 어깨를 거치대 삼아 살짝 손에 핸드폰을 들고 동영상을 보고 있는 게 아닌가. 안 그래도 덥고 좁고 짜증 나는데 내 뒤의 매너 없는 여자 덕분에 더욱 화가 솟구쳤다. 최대한의 짜증을 담아 어깨를 털어내고 몸을 돌려버렸다. 살짝 돌아보니 어이없게 그녀가 나를 째려보고 있었다. 이런 걸 두고 적반하장이라고 하던가. 나도 뭘 보냔 눈빛을 던지고 외면해 버렸다.


  교대역에서 2호선으로 갈아타야 하기에 나는 갈아타기 좋은 6-3번 홈에서 지하철을 탔다. 교대역에 도착하자마자 고래 배 속의 플랑크톤이 쏟아지듯이 지하철은 사람들을 토해 냈고 나도 그들 사이에 휩쓸려 2호선으로 갈아타는 길로 마치 서로 경보라도 하듯이 거의 뛰는 듯한 걸음으로 2호선 플랫폼에 도착했다. 그런데 아까 내 뒤에 있던 거치대녀가 내 뒤에 따라와서 같이 서 있는 거다. 아 얘는 왜 또 붙어서 오나 싶었는데 그 와중에 지하철이 도착했고 내가 타려는 순서에 지하철은 꽉 차서 더 이상 탈 수 없는 지경이었다. 저걸 밀고 타야 할지 아니면 다음 지하철을 타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내 뒤에 있던 거치대녀가 내 어깨빵을 하고는 사람들을 등으로 밀면서 뻔뻔하게 지하철에 탑승했다. 그러면서 눈으로는 나에게 욕을 하는데 유유히 문이 닫히고 떠나버렸다. 어이가 없으면서도 내 눈에 사라져 후련했다.


  시계를 보니 벌써 8시42분이다. 으악! 지각을 면하기 어렵겠단 생각에 마음은 더욱 조급해졌다. 2호선은 다행히도 바로바로 도착하는 편이므로 다음에 온 지하철을 타고 선릉역에서 내려서 최대한 빨리 뛰어가면 9시에는 세이브 할 수 있을 거란 계산을 해봤다. 선릉역에서 내리자마자 뛰었고 회사에 도착하고 보니 9시5분이었다. 아침부터 땀나게 열심히 뛰었지만, 지각을 면하지 못해서 씁쓸했다.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자리로 가서 앉으려는데 팀장이 엉덩이를 붙이려는 찰나 나를 불렀다.
 팀장도 매번 출근 시간에 세이브하거나 지각하기 일쑤더니 오늘은 또 웬일로 일찍 왔는지 오늘 참 운수가 대통이다.
   "홍차장, 잠깐 자리로 올래요."
   "네…"
   "오늘 무슨 일 있었나 봐?"
   "아, 지하철 시위가…"
   "그렇군. 그래도 좀 미리미리 다니는 게 좋을 거 같아."
   "네…죄송합니다."
   "그리고 지난번 제출한 정산 실적이 아무래도 잘못된 거 같은데 다시 한번 확인하고 알려줘요."
   "정산 실적이요? 확인하고 드린건데… 네, 확인해 볼게요…."
 땀이 다 식기도 전에 자리로 와서 지난달 제출한 정산 실적을 꼼꼼히 검증해보기 시작했다. 한 건의 계약이 지난달 계약변경으로 계약금액이 늘어나서 업체 정산금액도 증가했는데 그만 그 건을 정산원장에 업데이트한다는 걸 깜박했다. 너무 초보적인 실수에 염치도 없고 또 한 소리 듣겠다는 생각에 다시 팀장에게 보고하러 가기가 싫어졌다. 어영부영 버티고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다시 팀장이 호출했다.
   "찾아봤어?"
   "아, 네 그게 계약변경을 하고 정신이 없어서 그만…"
   "지금 정산업무 한두 해 하는 게 아니지 않나? 이미 경영실적에 보고 다 끝났는데 이러면 곤란하지. 에휴 참."
   "죄송합니다."
   "알았어요."
  팀장은 눈길도 주지 않고 모니터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그만 자리로 돌아가란 손짓을 한다. 자리로 돌아오니 옆자리의 김과장이 딱하단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뭐지? 약 올리는 건가? 나와 동갑이지만 육아휴직으로 진급이 늦은 김과장이 딴엔 공감을 해주는 액션일 테지만 괜히 아니꼽게만 보이는 건 내가 소심해서 일까. 김과장이 톡으로 말을 걸 어온다.
   '팀장님이 한마디 해?'
   '아니 별말 없었어.'
   '자기도 맨날 지각하면서 그냥 한 귀로 듣고 흘려버려.'
   '지각한 내가 잘못이지 뭐.'
  지각만 했어도 그런가 보다 할 텐데 업무 지적까지 받으니 나 자신이 너무 한심하고 게으른 인간처럼 느껴져 괜히 위축되고, 평소엔 남의 실수 하나하나 콕 집어서 말하던 나였기에 이런 사소한 실수가 더더욱 치욕스럽게만 느껴진다.
 종일 찜찜한 기분으로 휴게시간이나 팀원들과의 티타임도 마다하고 일에 집중했다. 마치 양치기 소년이 잃어버린 신뢰를 되찾기 위해서 온갖 성실함을 끌어내 보여주기라도 할 것처럼.
 

 그런데 하필 오늘 저녁은 일주일 전부터 예정된 팀 회식이 있다. 마음 같아선 그냥 집에 가서 쉬고 싶었지만, 괜히 또 빠지면 소심한 성격이 더 두드러질까 봐 적당히 구석에 있다 와야겠단 생각으로 회식에 참석했다.
 회식은 근처 제주 삼겹살 전문점 애월몽으로 갔다.
 그런데 오늘따라 유독 흑돼지 삼겹살의 비주얼이 유난히도 맛깔나 보인다. 식성은 기분과 반비례인지 눈치도 없이 적극적으로 고기 뒤집기에 열성적이었다.
   "홍차장, 흑돼지 좋아하나 봐. 뒤집기가 무섭게 먹네."
  평소에 맨날 자리를 비우고 농땡이를 피우던 강부장이 어딘지 비꼬는 말투로 말을 건다.
 아무래도 지난번 업무 분담 일로 나에게 깐족거리는 거 같다.
 1분기에 조직변경이 되면서 일부의 인력은 타 부서로 발령이 났고 빠진 인력에 대한 업무는 자연히 남은 부서원들에게 분배가 되었다. 다들 서로 눈치 보고 번거로운 일은 안 맡으려고 했고 뺀질이 강부장은 하나의 업무도 받지 않으려고 들었다.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고 팀장도 우는 놈에게는 웬만하면 일을 주기 싫어한다. 그런데 팀 회의 때 강부장만 업무 배분이 안 된 것 같다는 내 의견에 팀장은 뜨끔했고 다행히 업무분장의 재조정으로 강부장도 업무를 받게 되었다.
   "아…네 맛있네요. 강부장님도 술만 드시지 말고 고기도 좀 드세요." 괜히 속에도 없는 말들을 하는 내가 가끔 낯설게 느껴진다.
   "홍차장이 이렇게 잘 먹으니 보기만 해도 배부르네."
   '뭐야, 지가 내 엄마야 뭐야. 내가 잘 먹는데 지가 왜 배불러. 맛난 고기 먹고 밥맛 떨어지는 소리도 잘하네 정말.'
   "요새 사람들 일 정말 쉽게 하는 거 같지 않아요, 팀장님?"
   "......."
   "숫자도 확인 안 하고 대충 보고 제출하고 회사가 무슨 틀리면 알려주는 학교도 아닌데 말이죠."
   "그러게 말이야. 하나하나 다 일러주는 것도 입 아프지 뭐."
  맛있게 먹던 돼지고기가 목구멍에 콱 막히는 것 같았다. 강부장이 지금 나 맥이는 건가 싶은게 얼굴이 화끈거리고 뭐라 할 말도 없고 옆자리의 김과장은 또 내 편을 들어준답시고 저 자식은 눈치 없이 왜 저러냔 눈빛을 보낸다.
 그 뒤론 회식이 어떻게 끝난 줄도 모르게 끝이 났다.
 다들 제 갈 길로 뿔뿔이 흩어지고 나도 지하철을 타러 역사로 향했다.

역사로 들어서려는데 김과장에게 전화가 왔다.

  “참, 내가 아까 얘기해준다는 걸 깜박해서.”

  “…뭔데?”

  “눈엣가시 강부장, 희망퇴직 대상이래.”

  “갑자기, 왜?”

  “그 전부터 얘기가 솔솔 나왔는데 내가 오늘 인사팀 직속 정보통에게 들었거든. 강부장 근태가 엉망이잖아. 꼬리가 길면 잡힌다고. 결국 잡힌거지 뭐.”
   “그래? 짠하네…”

  “그럼 조심히 들어가고, 내일 봐.”

그런데 강부장이 희망퇴직 대상이 되길 나는 바랐던가? 그저 남에게 폐가 되지만 않길 바랐는데…. 오늘은 열대야인지 밤공기도 끈적하다.

빨리 가지 않으면 아파트 상가의 엘리베이터 운행이 멈춘다. 아, 오늘은 고장이었던가? 이 더위에 그 오르막길을 올라갈 생각을 하니 맥이 빠진다.

한여름의 열기로 한밤중에도 숨이 콱 막히는 게 시원한 맥주가 당기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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