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베조스는 '시어스 카탈로그를 인터넷으로 옮기면 어떨까?' 하는 아이디어를 착안했다. 아마존이라는 거대한 비즈니스를 태생시킨 아이디어는 시어스의 카탈로그에서 발화했다. 바로 직전인 1993년, 시어스는 100여 년의 역사를 뒤로 하고, 카탈로그를 중단한 바 있다. 100년의 역사이자, 사업의 시작이고, 뼈대이기도 했던 카탈로그를 매출 부진과 수익 저하 문제로 중단한 것이다. 아마 시어스가 베조스의 아이디어를 내부에서 도출할 수 있었다면, 오프라인 소매업들을 향한 이커머스의 진격을 "아마존 데스"라는 흉흉한 이름으로 부르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수도 있다. 물론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상상을 하지 않는다면 지금 우리 조직이 이러한 착안을 하고, 토론의 장에 올려놓지 못하는 현상에 문제의식을 갖지도 못할 것이다.
시어스가 카탈로그를 중단한 그 시점에, 아마존은 쇼핑의 모든 것이 담긴 카탈로그를 인터넷의 세상으로 옮길 생각을 했고, 실행에 옮겼으며, 적어도 인터넷 세상의 리테일은 거의 다 가져갔다.
1970년, 시어스는 이미 어리석은 결정을 한 바 있다. 당시 세계 최대의 유통 기업이자, 세계 최고의 기업인 시어스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을 짓는 것은 당연하게 보였다. 시어스 타워는 그렇게 지어졌다.(1973년 완공. 높이 443m, 110층으로 현재까지 미국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며, 2009년 시어스가 소유권을 윌리스 그룹으로 매각하면서 이름도 윌리스 타워로 변경되었다. 시어스 타워는 1998년까지는 세계 최고층 건물이라는 타이틀도 갖고 있었다.)
세계 최고의 건물을 짓겠다는 발상에는 시어스가 중산층의 지갑에 기반하여 성장했다는 사실이 무시되었다. 당시, 오일쇼크와 냉전으로 미국의 중산층은 30년 만의 불황에 시달리고 있었다. 시어스가 기업의 존립 기반인 중산층을 외면하던 시기, 월마트는 중산층을 위한 가장 합리적인 쇼핑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1962년 아칸소 주의 작은 잡화점으로 개업한 월마트는 차근차근 지역을 장악하고, 기업의 규모를 늘리면서도 셀프서비스를 기반으로 고객에게 가장 낮은 가격의 가성비 높은 상품을 제공하기 위한 리테일테크를 개발하고 있었다. 최고의 리테일러가 되기 위한 노력은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현재 글로벌 소매업을 장악하고 있는 대형 할인점은 1970년대 당시 세계 소매업을 장악하고 있던 시어스의 멍청한 결정을 딛고 일어선 것이다.
http://heraldk.com/2018/04/12/%EB%A6%AC%ED%85%8C%EC%9D%BC-%EC%97%85%EC%B2%B4%EC%9D%98-%EC%A2%85%EB%A
시어스를 이어 월마트가, 다시 아마존이 만들어진 배경에는 이렇게 시어스의 멍청한 결정이 있었다.
하지만 역사의 교훈은 확실히 약이 된다. 21세기의 유통 소매업은 어떨까?
197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의 소매업을 장악한 대형할인점, 월마트를 비롯한 유통공룡들은 인터넷의 세상으로 진입하는 걸음을 주저하다가 된서리를 맞았지만, 시어스와 달리 멍청한 결정을 연속하지 않고 이제는 좋은 결정을 해내고 있다.
한국 소매업 시장에서 2014년은 상징적인 해이다. 쿠팡이 로켓배송을 선언하고, 대구와 대전, 울산에서 첫 배송을 개시한 날은 2014년 3월 24일이다. 뒤를 이어 마켓컬리가 2015년에 샛별배송을 개시했다. 로켓배송이라는 익일 배송이 새벽 배송으로 진화하는 과정에서도 기존의 리테일 기업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혁신자들이 적자에 시달리다가 "곧" 무너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미 오랜 기득권을 확보하고 있던 그들은 이커머스를 무시하지는 않았지만 적자가 지속되는 이상한 드라이브가 궤도를 찾아갈 것이라는 점에서는 회의적이었다. 하지만 과소평가의 대가는 혹독했다. 한국 소매업은 중국을 제외하면 글로벌에서 가장 빠르게 이커머스로 이동했다. 현재 소매업 전체에서 이커머스의 비중은 40%를 상회한다.
하지만 신세계와 이마트, 현대백화점, GS리테일 등 레거시 기업들의 반격도 만만치 않다. 이마트는 SSG를 중심으로 이커머스 트랜스포메이션을 서두르는 한편, 이베이를 인수하며 본격적으로 포문을 열었다. 현대백화점은 여의도에 의외의 한 수를 두며 오프라인이야 말로 리테일의 본진이라고 웅변했다. 편의점은 여전히 근거리 리테일을 잘 해내고 있다. 그 사이에 한국의 이커머스는 쿠팡이나 네이버가 독식하는 단일 생태계가 아니라 레거시 리테일과 신흥 버티컬이 공존과 경쟁을 병행하고 있는 다원적인 생태계로 거듭났다. 시어스의 어리석은 결정처럼 결정적인 실수를 거듭하지 않고 실패를 딛고 일어섰기 때문이다.
물론. 앞으로의 시장 상황이 어떻게 변모할지 예측하기는 어렵다. 분명한 것은 다양한 플레이어, 플랫폼이 경쟁하는 사이에 메이커, 브랜드, 셀러들은 선택의 다양성을 확보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플랫폼들이 트래픽을 확보하기 위해 많은 비용을 쏟아붓는 사이, 셀러들은 트래픽의 열매를 수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결국, 리테일/커머스 업은 상품의 공급선(메이커, 브랜드, 셀러)들이 주도권을 확보할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볼 수 있다. 19세기 백화점의 탄생과 함께 등장한 리테일 업의 생태계에서 주도권은 공급자에서 유통업자로 이동했지만, 21세기에 들어 주도권은 다시 공급자로 넘어가게 될 공산이 커졌다. 앞으로 우리가 브랜드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이다.
모두가 그럭저럭 잘하는 시장, 결국 마켓플레이스의 경쟁력은 희석되는 상황에서 브랜드와 셀러의 경쟁력이 승부를 가늠할 것이기 때문에, 셀러프랜들리 전략이 승부를 가를 것으로 전망한다. 그리고 그 사업은 유통사업도 인터넷 사업도 아닌 고객서비스 사업이 될 것이다. 경제적으로 독립하기를 원하는 세상의 모든 청년들이 고객이 되는 그런 사업말이다. 지금 우리의 눈은 상품도 소비자도 아닌 셀러와 브랜드를 향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