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람들이 다 나처럼 힘들지만 버티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면. 그건 오해라고 말해 주고 싶다. 물론 힘들 수 있지만, 정도의 차이가 있다. 견디는 능력은 사람마다 다르다. 당신이 힘든 것만큼 힘들지는 않다. 같은 일을 해도 누군가는 할만해서 한다. 심지어 어떤 이는 즐거운 마음으로 그 일을 한다. 놀랍게도 (천재를 이기는, 노력하는 자를 이기는) 즐기는 놈이 실제로 세상에 존재한다.
당신이 도저히 버티기 힘들다면, 그것은 엄살이 아니라 체질적으로 어울리지 않는 일에 당신의 소중한 시간과 감정을 소모하고 있기 때문이다. 체질에 안 맞으면 자신에게 맞는 다른 일을 하면 된다.
하루키가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서 언급했듯이, 달리기는 만인을 위한 운동은 아니다. 자신의 성향에 맞는 일이 있다. 달리기가 체질에 맞는 사람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계속 달리게 된다.
이제부터 말하는 달리기의 형태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하자. 전력질주, 단거리 달리기를 말하는 게 아니다. 마라톤과 대비 훈련, 혹은 건강을 위한 생활 속 조깅 정도를 말한다. 보통 달리기에 대한 글이나, 취미로 달리기를 한다고 하는 사람들은 암묵적으로 이런 형태의 달리기를 말하는 것 같다.
달리기는 그 행위자체에 너무 몰입해서 시간이 가는 줄 모를 정도로 격렬하고 재밌는 운동은 아니다. 상대와 기싸움하고, 팀원과 사인을 계속 주고받는 그런 종류의 스포츠가 아니다. 계속 같은 동작을 반복하는 운동이고, 달리는 길이 너무 다채롭고 흥미롭지도 않다. 우리의 정신을 쏙 빼놓을 정도로 변칙적인 장애물이 나타나는 경우도 드물다.
달리기는 지루한 운동이다. 지루함을 느낀다는 건 죽을 만큼 힘들 정도로 달리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분명 달리기는 힘들지만, 편안한 상태이다. 굉장히 모순적인 문장이지만 실제로 그렇다. 몸은 달리고 있으면서도, 정신적으로 진공 상태가 된다. 어떤 생각을 해서 그 공백을 채우지 않으면 안 되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이런 시간을 도저히 견디기 어려운 사람은 달리기 말고 다른 운동을 찾아보는 게 좋겠다. 왜냐하면 이건 필연적인 달리기의 특성이다. 시간을 그저 견디는 것.
달리기를 하는 사람도, 하지 않는 사람도, “달릴 때 무슨 생각하세요?”라고 물어보곤 한다. 나도 궁금하다. 달리는 동안 다들 어떤 생각을 하면서 뛸까? 어떻게 그 긴 시간을 견딜까.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생각을 내가 알 수는 없으니까. 내가 달리는 동안 어떤 생각을 하는지 떠올려본다.
1. 칼 든 강도가 쫓아온다고 상상한다. 쓰나미가 몰려온다고 상상한다. 열심히 달리기 훈련한 성과가 빛을 발휘할 순간이다. 어릴 때 본 스릴러, 재난영화들이 정신적 충격을 준 게 틀림없다.
2. 체력시험을 앞두고 있다고 상상한다. 체대 입시생, 경찰 공무원 수험생은 아니지만, 도대체 어떤 시험을 본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건투를 빈다. 나는 항상 나를 응원한다.
3. 운동선수가 됐다고 상상한다. 오늘 훈련의 강도는 엘리트 선수의 입장에선 사실상의 휴식이겠구나. 이 정도로 힘들다고 생각하면 안 되는 건.. 가?너무 망상에 몰입하지 말자 나는 선수가 아니다.
쓰고 보니 정신이 이상한 사람 같은데, 난 그런 사람 아니다. 건설적인 생각도 하는 계획적인 사람이다. 계속해보자.
4. 달리기 끝나면 시원한 맥주 한잔해야겠다.
5. 뭐랑 같이 먹지?
6. (여러 음식을 떠올린다) 맛있겠다.
드럽게 재미없는 유머글이라고 생각한다면 오해다. 이건 진짜 달리면서 하는 생각들이다.
달리기를 할 때 일상에서 하는 생각과 별다르지 않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흘러 다닌다. 평소보다 좀 더 사색적인 상태가 되고, 몽상에 빠지긴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별 생각이 없다. 이런저런 잡다한 생각들 중에 특별히 '달리기를 하기 때문에 하는 생각'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달릴 때 무슨 생각하세요?” 의 단골 답변은 “아무 생각 안 합니다.”이다.
이 글을 쓰면서 다시 돌아보니, 내가 장거리 달리기 하는 시간을 잘 견디는 이유를 알게 됐다.
사람 자체가 재미없고 지루하면 된다.
나는 타고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