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잘 살고 있어요

그 오빠야가 이 오빠야일 줄이야

by 권진희

창밖으로 꽃들이 흐트러지게 피고 열린 창문틈으로 따스한 바람에 분홍색 꽃잎이 살포시 날아드는 나른한 봄날...

눈부신 봄날의 유혹에 이팔청춘 열여섯의 감수성을 주체하지 못하고 마음 약한 선생님 첫사랑 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랐고 머쓱해하시던 선생님은 반장의 노래로 대신하자고 하셨다.


쭈뼛쭈뼛 부끄러워하던 우리 반 반장은 한참을 망설이다 떨리는 목소리로

"헝클어진 머릿결 이젠 빗어봐도 말을 듣지 않고..."를 말하듯 차분하게 불렀다..



아~~ 도대체 이게 무슨 노래인가?

위로 형제가 없고 맏이였던 나뿐만 아니라 다른 친구들도 이 세련되게 가슴을 때리는 노래에 한참 동안 숨을 죽였다.

반장의 노래가 끝나자 여기저기서 "와~~ 이거 누구 노래고?", "제목이 뭐꼬??" 질문이 쏟아졌다.

다시금 안정을 찾은 반장은 양볼이 발그레 한 모습으로 "이 문세의 소녀... 서울 있는 우리 사촌 오빠가 가르쳐줬어..."를 내뱉고 더 붙잡을세라 얼른 자리로 가서 앉았다.


이문세 소녀...

잊어버리지 않겠노라 계속 되뇌이기를 반복했다.

라디오에서 '소녀' 가 나오면 공테이프에 한 면 가득 녹음해서 계속 듣기도 하고 노래 부를 자리가 있으면 분위기 잡고 그 노래를 부르기도 했었다.

그때마다 중3 때의 반장이 생각났고 더불어 그 노래를 가르쳐줬다는 사촌오빠는 어떤 사람일까? 얼마나 감성이 뚝뚝 떨어지는 사람일까 상상하며 혼자 얼굴을 붉히기도 했다


그 후로 점점 다른 노래들에 묻혀, 또 다른 노래들에 삶을 위로받으며 십여 년이 흘러 스물아홉이 되었다.

부산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 생활을 하고 있다는 지금의 신랑을 소개받고 한참 결혼 이야기가 오갈 무렵 남편의 또래 친척들을 소개받는 자리가 있었다.

한껏 조신하게 꾸미고 수줍은 척하며 나간 그 자리에서 너무나도 놀랍게 중3 때의 반장과 마주하게 되었다.

"야~~~ 너무 반갑다~~. 여긴 어떻게....?"

"가시나~~ 이 오빠야가 우리 이종사촌 오빠야 아니가~~ 진짜 반갑다야"


그랬다...

반장과 신랑은 이종사촌 사이였다.

세상이 좁다 하지만 이렇게 좁을 수가 있을까?

그 감성미 철철 넘치는 내 상상 속에 친구 사촌오빠야가 바로 지금의 내 남편이었다.

그때야 눈에 깍지가 쓰인지라 '역시~~'라며 내 선택의 탁월함에 감탄했지만 그 후로 20년이 넘는 시간을 부부라는 이름으로 살았더니 '소녀'라는 노래를 가르쳐 주던 그 멋진 오빠는 어디 가고 노래방 한 번 가자고 조르고 졸라서 가게 돼도 웃으며 손뼉만 치는 배만 볼록 나온 아저씨만 곁에 남았다.


이 남자는 알까?

나의 십 대 마지막 해에 내 상상 속의 첫사랑이었음을.. 어떤 사람일까 마음속으로 몇 번을 그려보고 상상의 나래를 펼쳤던 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