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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 Feb 23. 2024

구찌 수용소의 기억 2주-2

``그 해 그 계절에

모든 것이 멈춰버렸다.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일상의 질서가 사라진 뒤

나는 그곳에서

그들과의 동행을 인정하며 따랐다.``


구찌 야전병원은 원래 군인학교였던 곳이다.


7월의 베트남은 우기여서 한낮의 더위만 버텨내면

한 두 차례의 비가 온 뒤엔

시원한 편이었다.


어둠을 몰아내는  새벽의 여명이 비칠 때면 어김없는

기침소리.

제일 먼저  내가  있던 방에 입소했던 노인의 기침소리가 아침을 깨웠다.


5명이 한 공간에서 지내는 데는 서로 양보하고 배려하는 ,

특히나 같은 병증으로 들어온 경우라면

서로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3주간의 격리를 잘 지낼 수 없을 터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를 제외한 4명의 환자들은

일반적인 베트남인들이 그러하듯 타인에게 우호적이었다.

내게 모기장을 건네준  백발이 성성한 노인

내게 어디서 왔냐고 물어봐 주는 젊은 청년

자기도 푸미흥에 산다던 좀 사는 베트남 중년 남자.


모두들 동병상련의 심정이라

어느 날 끌려온 (?) 내 수용소에서의 생활은 그들과 불협화음 없이 잘 시작되고 있었다.


우리 방 누구도 중증 환자가 없었던 건

옆에서  그 환자를 견뎌내야 하는 상황을 감안했을 땐 너무도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언론에서 매일  떠들어대는 감염자와 사망자 숫자는 확진이 된 상태에서의 환자들에겐

조사를 빙자한 겁박에 다름없는 사실이었다.

한국과 같은 선진 의료국조차 피해 갈 수 없는 치료 불가로 인한 사망자 수 증가는

내겐   정보 속 공포였다.


수용소로 오기 전 발열은 이미 없었고 후각이 없어지고 기침하는 정도의 증세만 있었다.

그 증상보다 더 나빠지진 않았던 건 6월에 있었던 아제 접종 덕분이었을까?

공산국가에서  공단 내 직원들을 위했던 혜택이 이토록 절실히 고마울 수가 없다.

그 접종이라도 , 누가 마다한 쓰레기(?) 같은 원조였다 하더라도

그마저 없었다면 어떤 상황이 일어났을지 누가 장담할 수 있었을까!


감사하고 감사했다.

눈물 나도록 무섭고 두려우면서도 그 사실 하나에 감사했다.


벌어진 일은 되돌릴 수 없는 일.

버텨내는 오기가 크면 클수록

벌어진 일에 대한 수용 또한 빨랐다.

앞으로 2주.

난 이곳에서 무사히 바이러스와 이별한 후

내 생활로 돌아가는 것만이 목표였다.




호찌민에서 2시간 정도 걸리는 구찌 야전 병원은

2층짜리 건물 두동이 마주 보고 있고 그 사이에 작은 마당 같은 공간이 있었다.

건물 양 쪽은 바리케이드를 쳐서 출입을 막았는데  메인 도로 반대쪽에   문이 잠긴 창고 건물이 있었다.  

그 창고 오른쪽으로 꺾으면 작은 주차장만한 공간이 있었는데 나는 거기서  산책을 할 수 있었다.

짧은 거리였지만 몇 바퀴를 돌고 나면 땀이 날 정도로 몸이 가뿐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출입구는 두 군데였는데 하나는 건물 사이로 통하는 문, 다른 하나는 건물 뒤편으로 연결되는데, 뒤편

나무 둥치에 옷을 널어 빨래를 말리고는 했다.


70대 할머니는 하루 종일 전화기를 붙들고 통화를 해댔다.

한마디로,

``나 여기 온 지 오래됐는데,

왜 안 보내주냐, 나 좀 꺼내달라.

너무 힘들다.``라는 것이다.

하지만 어쩌나. 계속 키트엔 두줄인데......

흰머리가 멋진 할아버지는 친절하게 내게 모기장도 주고

이것저것 이곳의 일을 일러주더니

내가 들어온 지 1주일 만에 퇴소해 버렸다.

푸미흥에 산다는 중년의 남자는 자기가 사는 곳이 어디라는 말과

자신의 지위가 어느 정도인지를 뽐내고 싶어 하는

전형적인 졸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자랑질은 하고 싶으나 알아듣지를 못하니

이내 조용해지고 말았지만......


정말, 말도 안 되게

제일 답답했던 건

영어가 한마디도 안 통하고

베트남 말도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회사에서는 영어로 직원들과 소통해 베트남 말이 별로 필요 없었지만

한국인이 많이 가는 곳에선 현지인들과 소통이 불가능하진 않았다.

하지만 배려 없는 6 성조는 까막귀를 절실히 느끼게 하는 비애를 안겨주었다.


큰 대화가 필요하지 않은 수용소 생활이어서 다들 자기 몸 챙기며,

시간이 어서 흘러가기만 바라는 듯 침묵하는 시간이 길어져갔다.

무료하고 늘어진 , 의미 없는 긴 기다림으로

하루하루 바깥세상에 대한 열망만 커져갔다.


기침 소리와 함께 아침이 시작되면 좀 더 뭉기적거리며 게으름을 피웠다.

그런 뒤 건물  동 사이에 있는 작은 주차장 만한 공간에서  산책을 했다.

물론, 멀리서 내가 나온 모습을 본 직원들이 손사래를 치며 뭐라 떠들어댔지만

가까이 오기를 두려워해서인지 큰 제지는 없었다.

방안에서만 ``꼼짝 말고 지내라 ``가 아니어서

군인들이 지내던 , 생활하던 숙소여서

사람 냄새가 나고 통제가 아닌 자유가 허용되어서 너무도 좋았다.

김이사와 그의 가족이 수용되었던 병원은 환자가 너무 많아 혼돈 그 자체였다면 이곳은 거기에 비해

환경이 그리 나빠 보이지 않았다.


식사는 방호복을 입은 직원이 마당에 음식을 가져다 놓으면 직접 나가서 가져와 먹었다.

약지급은 간호사가 바깥에서 호출하면 마당에 놓인 테이블 위에서 가져와 복용했다.


모든 식사와 치료는 무상으로 이뤄졌는데 외국인인 내게도 똑같이 적용되었다.

처음에 `분명히 내게 치료비를 청구할 테지`라 생각하며 얼마나 눈탱이를 맞을지 걱정이 앞섰던 것을

생각하니 살짝 미안한 감도 들었다.


도시락으로 나오는 식사는 베트남식이어서 한식을 즐기는 내겐 다소 고역이긴 했지만

가져온 김치랑 김, 참치 캔 등이 요긴한 반찬이 되어주어 문제로 여기진  않았다.

현지식이지만 양도 제법 많고 먹을만했다.
질이 나빠지기 시작하자 가지고 온 음식으로 버티기 시작했다. 조그만 티팟에 햇반을 욱여넣어 데워먹느라 애를 먹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정부에서 무상지급을 못한다는 통보가 왔다.

모든 것이 멈춘 뒤라 설상가상으로 식재료 유통도 안되니 공장이 멈춰버리고, 그에 따라 식사의 질도 나빠졌다.

양도 적어지고 반찬도 형편없이 나오자 도시락을 집어던지는 등 항의가 잇따랐다.

상황이 나빠지기 시작하자 나온 식사는 양도 적고 형편없었다. 봉투에 든 죽을 집어던지는 모습이 많이 보였다.

``집어치워라. 이걸 먹고 어찌 사냐. 제대로 된 밥이 아니면 내보내달라.``

미국도 이긴 베트남인이지 않나. 그들의 깡은 익히 알던 터라 ,

묵묵히 그들을 지켜보며 불안한 며칠을 보냈다.

외부 음식도 입이 안되니 억지스러운 말도 아닐 터였다.

그렇게 반발이 있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도시락은 다시 원상태를 되찾아갔다.


격리되기 전 난 이미  증상이 거의 나타나지 않았는데  그 사실에도 불구,

2주 동안 여기서 보내야 한다는 게 제일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다.

아파서가 아닌 무료해서 미치지 않기 위해 난 나름의 루틴을 만들며 하루일정을 보내기로 했다.

오전 산책과 식사를 마치고 나면 온라인으로 직원에게  수 있일을 지시했다.

처리할 서류 작업을 다하고 메일  확인과 답장을 보냈다.

한국에 있는 가족에게 연락을 해 안심을 시켜주고 나면  점심시간이 지나있었다.

옷가지는 손빨래해서 바깥 마당에 널어두는데 역시 베트남에선 건조기가 필요 없을 만큼 잘 말라준다.


이상 일이 없어지면 침대에 드러누워  티브이도 봤다.

어쩔 거야, 이 생활에 적응해서 지내야지.

야구도 보고

드라마도 봤다.

한국 소식도 실컷 듣고

때가 되면 밥도 잘 챙겨 먹었다.

맥주 한 캔과 꿀꽈배기가 주는 행복도 나쁘지 않았다.


처음 입소 할 때 ZALO앱을 통해 담당 의사가 문자로 연락을 해와서 지병이 있는지 물었고

복용 중인 약에 대한 정보도 알려달라고 했다.

그 후로도 의사가 직접 내게 와 말을 건넨다든가, 치료를 해 준 적은 없었다.

간헐적인 문자로 내 증세를 물어주고 다른 처방이 필요해지면 문자로 절차를 알려주는 게 전부였다.


코로나 검사는 3일에 한 번씩 계속 진행되었는데 3주간 검사 세 번 연속해서 음성이 나와야만 퇴소가 가능했다.

22일경 한차례 엑스레이 검사를 하기로 했는데

기계가 있는 본부동까지는 300M 정도를 걸어가야 했다.

안내하는 직원과 뚝 떨어져서 종종거리며 따라가 촬영을 했다.

같은 방에 있던 청년이 말하길,

``와... 나도 엑스레이 한 번 찍어보면 좋겠네요.``

무슨 소린가 싶은데 ``여기서 그런 대우받는 거 흔한 일 아니에요.

극히 소수의 사람들이 그런 치료가 가능해요.``란다.


무슨 빽이 있냐는 투로 들리지만 난 아무런 빽이 없어.

내가 지병이 있다고 하니 필요하다 여겼겠지,라며 무심하게 넘긴다.

의심하지 말라 청년아.

여기선 다 똑같은 밥 먹고 약 먹고

치료해 주는 대로 따를 뿐이야.


그저 웃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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