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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 Apr 22. 2024

한 줄 김밥

어떤 음식이든 그와 함께 오는 것들이 있다.
같이 먹던 사람,먹을때의 느낌,그 날의 분위기도.




K FOOD열풍으로 김밥이 미국에서 불티나게 팔린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것도 냉동 김밥으로.

냉동 김밥이라니....

평생을 살아오면서 냉동 김밥은 우리 식탁에선 없는 메뉴였다.

김에 밥을 얇게 깔아  알록달록한 각종 재료를 넣고 돌돌 말아 주는 한 끼 식사인 김밥.

간단하지만 간단하지 않은 김밥은  어릴 적부터 즐겨 먹는 우리 음식 중 하나이다.


김밥은 지금은 흔한 음식이지만 어릴 적엔, 소풍 같은 특별한 날에만 먹을 수 있었던

추억과 함께 하는 음식이다.


학창 시절 소풍 갈 때마다 이른 아침부터 고소한 침기름 냄새가 진동하는 우리 집 부엌에선

노란 단무지, 계란부침, 간장에 살짝 볶은 어묵에 분홍 소시지,

빨간 맛살에 초록 시금치까지

돌돌 말은 김밥을 산처럼 쌓은 엄마는  소풍 가는 아이들 도시락을 위해 군침 도는 참기름

냄새를 풍겨주곤 하셨다.


따끈한 김밥이랑 과자, 음료수까지 가득 넣은 소풍 가방을 등에 지고

한참을 걸어간 유원지에서 각자가 꺼내 놓는 소풍 도시락.

사방에 퍼져 가는 김밥 냄새는 우리들 입맛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음식이었다.

같은 김밥이라도 속재료를 어떤 걸 쓰는지에 따라 맛은 제각각이었다.

엄마의 김밥은 매번 똑같은 재료를 썼고

촛물을 쓰지 않는 습관 때문에 촛물을 쓴 다른 김밥은 내 입엔 맞지 않았다.

이 친구 도시락에서 하나,

저 친구 도시락에서 하나

네 것도 먹어보자. 네 것도.


이것저것 먹어봐도 엄마 것이 제일이네.

사이다와 함께 먹는 김밥은 세상 어느 것보다 맛있었다.


운동회 날에도, 사생대회 날에도


그렇게 일 년에 네 번 정도만 먹을 수 있는 귀한 음식이 김밥이었다.

재료를 마련하는 번거로움이 있었기에 엄마는 네 번의 특별한 날 이외에는 식탁 위에 올리는 법이 없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잠시  다녔던 직장은 학원이었다.

그 시절 원서만 넣으면 취업이 된다는 속설과는 달리 우리 학과는 취업문이 좁았고

나는 현실과 타협하며 작은 학원에서 사회첫발을 내디뎠다.


영어를 가르치는 학원일은  낮밤이 바뀐다는 것만 제하면 그리 힘든 일은 아니었다.

큰 입시 학원이 아니었기에 아이들과 친해지기도 수월했고 학원 일이 처음인 내게

수업의 질 같은 건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나름 전력을 다했지만 부족했던 만큼 아이들에게 사과한다.ㅎ


3시경부터 수업이 시작되었다.

하교시간에 맞춰 아이들의 소란한 소리가 들려오면

반가운 인사와 함께 수업 준비에 들어갔다.


50분 수업 10분 휴식.

6시까지 3시간을 하고 나면 저녁 식사시간이 되는데

나는 근처 식당에서 저녁을 해결했다.


``선생님 저녁식사 하시고 오세요.

잘 먹고 와야 늦게까지 수업하세요.. 맛있게 드시고 오세요.``

사람 좋은 미소로 원장님은 저녁시간을 알려주곤 하셨다.


월급은 적당히  쓸 만큼 받았는데

대기업 월급에 비하면 넉넉 하달 수는 없었다.


부모님이 주시는 용돈도 아껴가며 모아뒀다 책사이에 끼워두고

한 푼 두 푼 늘어나는 걸 즐기는 성격이었다.

그러니 내가 일해서 번 돈을 쉽게 써버릴 리 만무했다.


숙식은 집에서 해결되니 용돈만 내가 해결하면 될터.

받은 돈의 90%는 저축하는 기쁨을 누렸다.


그러기 위해서는 최대한 아껴야 하니 저녁 식사는 제일 저렴한 것으로,

그럴려면 만만한게 동네 분식집이었다.


학원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시장엔 떡볶이와 어묵, 순대, 김밥등을 파는 분식집이 있었다.

그 당시 김밥 한 줄이 1000원.

그때는 김밥 한 줄만 시키더라도  눈치 보지 않아서 좋았다.

양이 적은 듯했지만 집에 가면 야식을 준비해 주시니  크게 부족하게 느끼진 않았다.



여느 분식집이 다 그러하듯 입구 옆으로 어묵 이랑 떡볶이가 가득한 철판이 큼지막하게 놓여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철판 앞에 아이들이나 장 보러 나온 엄마들이 어묵이며 빨간 떡볶이를 서서 먹고 있다.

실내로 들어가면 작은 테이블이 네 개정도  놓인 작은 분식집.

작은 티브이가 웅웅 소리를 내며 뉴스를 말해주기도 , 드라마나 6시 내 고향을 전해주기도 했다.(그때 있었는지 모르겠다)

보통은 포장해서 가져가는 경우가 많아 테이블은 항상 한산하다.

자리 잡고 앉으면 눈으로 텔리파시가 통하는 아주머니와 나.


``아주머니, 김밥 한 줄이요``

곧 나오는 김밥.

참기름을 발라 반질반질한 용모를 뽐내며 일정한 길이대로 썰어져 나온 김밥.

어묵 국물 한 그릇과 단무지 몇 조각도 덤으로 주신다.


먼저, 어묵 국물부터.

목으로 벌어먹고 살던 때라 그 어묵 국물맛은 둘도 없는 시원함이다.


`출출할 시간이지, 이제 본격적으로 먹어볼까.`

젓가락으로 한 점 집어 들어 입속으로.

고소한 참기름의 맛과 달콤 짭짤한 단무지, 계란과 어묵에 맛살까지.


천천히 재료가 주는 맛 하나하나를 음미하며 씹었다.

김밥 한 줄 먹는데 얼마나 걸린다고.

나는 그 김밥을 천천히 오래오래 입속에 넣고 그 맛을 즐겼다.


국물까지 한 사발 먹고 나면 출출하던 배가 70%는 차 온다.

``잘 먹었습니다.``


오늘도 잘 먹었습니다.


칼칼해진 목과 비어있던 내 위를 채워주는 간단한 요기를 끝내고 다시 학원으로 향했다.

마지막 수업까지 내가 가진 지식을 아이들이랑 나누다 보면 어느새 퇴근시간이다.


``오늘도 수고하셨어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직장인들이 제일 듣기 좋아하는 퇴근하라는 말.

나도 그 시간이 제일 좋았다.

버스를 타고 집에 도착하면 엄마가 맛있는 야식을 준비해 주신다.

캥거루족이었던 나는 부모님이 주시는 달콤한 유혹을 참 오래도 누렸다.


이렇게 1000원짜리 김밥은 내 적금의 원천이 되어 주었다.

그렇게 싼 음식으로 배를 채워도 부끄럽거나 힘들게  여겨지지도 않았다.

내 통장 속 숫자가 늘어나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나는 배가 불렀다.

그 통장이 있어서 저렴한 김밥집을 매일 들러도 아프지(마음이) 않았다.


2년 정도를 매일 드나들었기에 주인 아주머니와도 많이 친해져서 가끔은  

팔다 남은 떡볶이도 먹으라며 건네주시곤 했다.

그러면 김밥은 훨씬 더 훌륭한 저녁이 된다.


평생 먹어도 될 양을 그 당시에 다 먹은 듯하다.


어릴 적 김밥이 귀한 음식이었다면, 나이 든 내게 김밥은 제일 저렴하고 찾기도 쉬운 서민음식이었다.

대접받던 김밥이든, 내 젊은 날 주린 배를 채워주던 서민음식이든

김밥은 정겹고 맛있는 냄새를 간직한,

그래서 언제나 내게는 반가운 음식으로 남는다.


이제 늙으신 엄마는 더 이상 김밥을 말지 않으신다.

대신 내가 엄마처럼 속재료를 만들어 김밥을 만다.


언니 집 근처에 있던 시장 어귀의 그 김밥 집 주인아주머니도 더 이상 그 집엔 없다.


세월과 함께 아주머니도 더 좋은 곳으로 가게를 옮기셨는지, 장사를 접으신 건지.. 알도리는 없다.


내가 만든 김밥도 , 낯선 김밥집 아주머니가 건네준 김밥도 그 때 내가 먹었던 맛은 아니었다.


지나버린  시간과 함께 예전의 그 맛을 다시는 맛볼 수 없을 것이다.

그걸 먹었을 때 내가 느낀 밥알의 감촉과 냄새는 실존하지 않기에.


어릴 적만큼 귀하지도,

엄마의 손맛도 없고

한 푼이라도 아끼려는 내 자린고비 마음도 ,

김밥 집 아주머니의 손맛도 사라져 버려

다시는 찾을 수 없다는 걸 알아버린 나이여서 인지도 모른다.


특별한 날만 먹는 게 아닌, 어디서든 흔해빠진 김밥을 우리 아이들은 어떻게 느끼고 있을까!

예전에 내가 맛본 귀한 김밥을 내 아이도 같이 느낄 수 있었으면 ,

그래서 김밥만 보면 엄마를 떠올릴 수 있으면 하는 작은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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