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솔직히 너 돌아온 거 반갑지 않아. 너도 알다시피 우린 일당백이 필요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안영이가 왔어야 됐는데....... 아, 이왕 들어왔으니까 어떻게든 버텨봐라.
여긴 버티는 게 이기는데야.
버틴다는 건 어떻게든 완생으로 나간다는 거니까.``
``완생이요?``
``넌 잘 모르겠지만 바둑에 이런 말이 있어.
미생, 완생. 우린 아직 다 미생이야.``
드라마 <미생>에서.
IMF는 우리 세대에게는 극락과 나락을 동시에 경험하게 해 준 사건이었다.
80년대 말부터 90년 초의 우리나라는 중산층이 두터워지고
잘 살게 되면서 너도 나도 경제 호황으로 들떠 있던 때였다.
샴페인을 일찍 터뜨렸다는 비난과 함께 터진 IMF로 대기업조차 도산하고
많은 가정이 삶의 터전을 잃어버리게 된 혹독한 시련의 시대였다.
그 시대 한가운데에 우리 가족도 있었다.
당시 남편은 한국과 베트남을 오가며 일을 하고 있었는데
IMF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엉뚱하게도 주 거래업체(이태리 메인 바이어)가 다른 주인을 찾아가는 과정에 있었고
OEM 업체 사장이었던 남편은 대금을 제때 받지 못해 난감한 처지였다.
그래서 ,
직접 먼 타지까지 혈혈단신으로 떠났다.
아이들과 아내를 남겨두고.
한 달 넘는 기간을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이태리에서 돈을 받아내기 위해 버텼다.
아이 둘을 혼자 돌봐야 한다는 책임감에,
긴 시간 홀로 외국에 있어야 하는 남편을 위해 뭐가 필요한 지 물어볼 여유도 없었던 나는
그 흔한 고추장 볶음조차 준비해 주지 못했다.
그렇게 40여 일 동안 평생 먹을 피자랑 스파게티를 다 먹었다며, 남편은 웃음 짓곤 한다.
그래서 지긋지긋한 그 냄새가 싫다고.
물려버렸다고.
아이들 때문에라도 피자며 스파게티는 자주 찾게 되지만
굳이 맛집 찾아다니며 먹지 않는 음식이다.
특유의 밀가루 맛도 싫겠지만 떠오르는 상념이 결코 좋은 일은 아니기에
손사래를 치게 만들었을 것이다.
젊어서였는지, 사장으로서,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이 컸었는지
자세하게 묻지 않았고
그도 말해주지 않아
대금을 받아왔는지, 어떤지 자세히 기억나진 않는다.
묵묵히 나는 그를 응원했고
그는 버텨내며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세계 경제의 파고 속에서 이리 휘둘리고 저리 휘둘리는 일을 해야 했던 남편은
그 뒤로도
리먼 사태나 코로나 시기 등으로 적잖은 어려움 속에 처했고
버티고 또 버텨내었다.
미국만 호황인, 전쟁으로 인해 경제는 점점 더 쪼그라져 가고 있는 지금도 남편은 버티는 중이다.
남편은 완생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믿음으로 자신의 청춘을 다 바쳐 왔고 지금도 그러하고 있는 중이지만
우리들 삶은 영원히 닿을 수 없는 완생을 꿈꾸다 마는 미생의 삶을 돌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스스로의 완생은 믿는 자체로 우리는 버틸 수 있다.
수많은 미생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