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이면 엄마는 나를 할아버지 댁으로 보내곤 하셨다.
언니와 함께 버스로 내달려 내린 읍내에서 우리는 엄마가 준 용돈으로 롯데껌을 몇 통 샀다.
쥬시후레쉬,스피아민트,후레쉬민트.(세 가지 중 스피아민트는 내 최애였다.)
입 안에 넣으면 향긋하게 퍼지는 향이 좋았던 껌을 단물이 빠질 때까지 오래오래 씹었다.
단물 빠진 씹던 껌은 방 벽에, 상다리 옆에 , 책상 위에 잘 붙여 두었다 생각나면 또 씹었다.
먹을 것이 귀하던 그때의 우리에게 껌은 간식이 고플 때 두고두고 뒀다 꺼내 먹을 수 있는 마법 상자 같았다.
아껴서 한 개 두 개 먹다 보면 사라지는 게 너무나 아쉬운 간식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인 뽀빠이 과자.
세로로 기다란 모양의 봉지에 든 라면처럼 꼬불꼬불한 뽀빠이는 정말 맛 좋은 과자였다.
손에 쥐어준 용돈으로는 몇 개밖에 살 수 없었던 귀한 과자.
지금도 마트에 가면 그때 생각이 나서 집어오게 되는 과자이다.
별사탕은 마지막까지 아껴뒀다 라면땅을 다 먹고 나면 입안에 넣고
다디단 그 별사탕을 혀로 돌려가며 끝까지 아껴먹었다.
껌 몇 개와 뽀빠이 몇 개를 소중하게 안고서 할머니 집으로 걸어갔다.
우리에게 택시는 아주 비싼 값을 내야만 탈 수 있는 고급진 차였다.
그 시절 엄마에게 그렇게 돈을 쓴다는 건 허용되지 않았다.
튼튼한 다리와 씩씩한 용기로 무장한 우리에게 뚜벅이는 당연한 일이었다.
할머니 집은 읍내에서 30분~40분을 걸어가야 하는 시골마을이었다.
아이 걸음으로 30,40분은 멀고도 먼 길로 기억된다.
도로를 따라 한참을 걸어가야 하는 길을 언니랑 나는 나무도 툭툭 건드려보고
길가의 돌멩이도 차면서 지루한 길을 한참을 걸어갔다.
지나가는 차를 향해 고함을 지르면 차가 지나가는 소리와 함께 내 목소리도 함께 사라졌다.
그게 재밌어서 까르르 웃기도 하면서 계속 걸었다.
마을 초입에 다다르면 냇가를 가로지르는 작은 다리가 나오는데
거기에서부터 30여 호의 집이 모여사는 동네 끝 자락에 할머니 집이 있었다.
아버지가 어릴 적부터 지내오신 곳으로 평생을 그 근처 논밭을 일구며 살아오셨다.
https://m.blog.naver.com/jewbe/220211390268 방학은 이렇게 시골 앞마당을 달려가는 모습으로 시작되었다.
여느 농가와 다름없이 시골의 아침은 이른 새벽부터 시작된다.
아이들은 눈도 뜨지 않은 새벽에 할머니는 밭일하러 길을 나서고
할아버지는 불을 지펴 소죽을 끓이셨다.
쿰쿰하지만 역하지 않은 소죽냄새가 온 집안을 휘감을 때쯤,
여름 햇살이 방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하면 언니와 나는 잠에서 깨었다.
할머니는 그새 집으로 돌아오셔서 아침을 준비하고 계셨다.
부엌에선 맛있는 된장냄새와 밥냄새가 올라오고 있다.
할아버지는 새벽에 끓인 소죽을 듬뿍 퍼 소에게 먹이시곤 대청마루에 앉아서 우리를 반겨주셨다.
언니랑 10살 차이 나는 막내 고모와 시집 안 간 셋째 고모, 할머니, 할아버지, 언니, 나
이렇게 여섯 이서 소박한 아침을 준비하는 시각이다.
수저를 놓고 고모가 퍼준 밥그릇을 날라 각자 자리에 놓고
몇 가지 밑반찬을 늘어놓으면 할머니표 진한 된장과 호박잎이 중앙에 놓인다.
간식으로, 먹다 붙여둔 껌이나 뽀빠이가 최고였던 시절,
고기반찬은 제사나 생일상 아니면 구경하기 힘든 때라 밥상 위 반찬은 단출하기 그지없었다.
흔한 소시지도 , 햄도 , 멸치 볶음도 구경하기 힘든 할머니 밥상에서
된장은 매일 올라오는 단골 반찬이었다.
여름이면 호박잎, 겨울이면 동치미를 독에서 꺼내 와 쑹쑹 썰어 먹는 게 그 시절 최고의 반찬이었다.
된장에 뭐가 들었었는지는 생각도 안 난다.
단지 무지 짰다는 기억과 어린 내가 먹기에 다소 매웠던 청양고추의 맛.
알싸한 그 맛에 적응하기까지 시간은 걸렸지만, 밥으로 잠재운 매운맛은
호박잎쌈의 풍미를 더해주었다.
찐 호박잎에 된장을 넣고 한 입 두 입 먹다 보면 된장 국물이 줄줄 새고 손에 남은
그 냄새는 오랫동안 없어지지 않을 만큼 강했다.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생각나는 된장찌개의 맛과 색과 냄새.
그렇게 맛난 호박잎 쌈은 더 이상 식탁에서 볼 수가 없다.
맛난 고깃집 된장찌개의 먹음직한 노란 색도 아니고
들큼하며 구수한 된장 냄새도 아닌
할머니 된장찌개는 시커멓고 짜디짰다.
갓 쪄낸 호박잎이랑 찰떡궁합인 그 된장찌개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찌개맛이었다.
나이가 들면서는 더 이상 할머니 댁으로 보내지지 않았지만
매년 방학 때마다 할머니집으로 갔던 우리에게
뜨거운 여름날 ,
된장찌개와 호박잎은 세상에 없는 진수성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