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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risol Mar 27. 2024

만복! 행복! 돈까스 파워!!!

나의 맵쓴 일본 유학시절 이야기

일본에서 처음 먹어본 돈까스


 학업을 위해 외국에 유학을 떠난 유학생들 중, 부모가 유복해서 돈 걱정 없는 금수저를 제외하면 모든 유학생들은 생활에 여유가 없다. 경제적 여유는 물론, 생활비를 벌기 위해 수업이 끝나면 시간을 쪼개 아르바이트를 해야 하니 시간적 여유도 없다. 그러니 당연히 정서적 여유도 없을 테다. 


 일본으로 떠나가기 전, 독실한 천주교 신자이신 할머니는 외롭고 고달플 때에는 천주님과 성모님을 찾아가 기도하라고 하셨다. 나는 태어나자마자 할머니에 의해 유아세례를 받았다. 말도 못 하는 갓난아이였으니 종교의 자유를 달라고 외칠 틈도 없이 천주교 신자가 되어야 했던 것이다. 성장하면서도 특별하게 저항할 의지도 없었고 그렇다고 성실하게 성당에 다닌 것도 아니었다. 


 일본에 유학 중에도 외롭고 힘든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외롭다고 멍 때릴 시간도 없었다. 유학 생활에 어느 정도 익숙해져서 시간을 나름대로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을 때 할머니의 말씀이 생각이 났다. 성모님께 기도를 드린다고 가난한 유학생 생활이 나아질 리는 없겠지만 성당에 한번 가볼까 하는 마음으로 어느 뜨거운 여름 일요일 아침에 집을 나섰다. 한인 성당이 롯폰기 역(六本木駅)에서 걸어갈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친구에게 들었다. 


 롯폰기 역에서 내려 파출소에 들어가 한인 성당이 어디에 있는지 물어봤다. 모른다. 오히려 ‘롯폰기에 한인 성당이 있습니까?’ 하며 나에게 물었다. 헐. 전화번호도 주소도 몰라서 지나는 동네 사람들에게도 물어봤는데 다들 모른다고 했다. 우리나라는 멀리서도 뾰족한 지붕에 솟아있는 십자가를 찾으면 백이면 백, 교회나 성당 건물이라고 알 수 있는데 일본에 온 지 몇 달이 되었어도 십자가가 달린 건물을 보지 못한 것 같았다. 


 결국 오전 미사 시간이 끝나도록 성당을 찾지 못하고 땡볕에 옷이 땀으로 젖어 물에 젖은 솜이불처럼 무거운 몸을 뒤척이며 한숨 쉬면서 뒤돌아 가려하는데 한국말로 떠들면서 우르르 사람들이 나오는 것을 보았다. 미사가 끝나고 돌아가는 한인 성당의 신자들이었다. 회색빛 건물에 성당이라는 것을 알리는 손바닥만 한 간판이 붙어 있을 뿐, 십자가는 보이지 않았다. 그때, 어떤 여성이 나에게 물었다. ‘성당에 오신 거예요?’ 한인 성당은 그 건물의 지하층에 있었다. 그러니 경찰이나 동네 사람들이 알 턱이 있나.


 그다음 주 일요일부터 성당에 다녔다. 신앙심은 투철하지 않았지만 나름의 여유로운 유학 생활을 즐기기 위해서라고 하겠다. 


 나에게 성당을 찾느냐고 물었던 여성은 유학생인 남편을 내조하기 위해 온 사람이었다. 성당 사람들이 그 여성을 ‘방배동 언니’라고 불렀다. 본가가 방배동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신혼이었고, 아들을 낳은 지 얼마 안 됐고, 그 아들을 한국 본가에 보내고 오로지 남편의 유학 생활을 내조하고 있다고 했다. 남편이 학교에 가 있는 동안은 심심해서 한국인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고, 집에서는 남편하고 한국말로 대화하며, 한국 비디오 대여점에서 빌려온 한국 영화, 한국 드라마, 한국 코미디 등을 보며 지내고, 한인 성당에서 만난 지인들 외에 일본 사람하고는 만날 기회가 없었다고 한다. 그 바람에 일본에 온 지 4년이 됐는데도 일본어를 익히지 못하고 있었다고 멋쩍어했다.


 어느 일요일, 미사가 끝나고 방배동 언니가 나에게 시간이 있냐고 물었다. 달리 학교 과제를 끝내는 일 밖에 없던 터라 왜 그러냐고 물었다. 아들에게 보낼 옷을 사려고 하는데 같이 가서 통역 좀 해달라는 부탁이었다. 남편은 친구들과 모임이 있어서 혼자 가게 되었다고. 평소에 소소한 도움을 자주 받았기 때문에 보답 차원에서 흔쾌히 가겠다고 했다.


 신주쿠 이세단(新宿伊勢丹) 백화점 아동복 매장을 몇 바퀴나 돌면서 쇼핑백을 둘이서 양손에 바리바리 들어야 할 정도로 한국에 있는 그리운 아들을 위한 옷, 장난감 등을 사면서 언니는 마냥 행복해했다. 도와줘서 고맙다며 맛있는 것을 사주겠다고 했다.


 신주쿠 번화가를 벗어난 골목에 있는 「三金」이라는 돈까스 전문점으로 들어갔다일본에서 처음 먹는 돈까스였다한국에서는 친구들과 함께 ‘명동 돈까스 먹으러 명동까지 가곤 했었는데 ‘돈까스의 발원지’라고 하는 일본에서 처음 먹어본 돈까스 맛도 그렇지만 돈까스의 두께와 육질이 한국의 명동 돈까스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볼륨감 있고 맛이 특별했다실같이 얇게 채 썬 양배추 샐러드는 무한 리필이었다. 세 번 리필을 부탁해서 마구마구 먹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일본에서 그렇게 배부르게 먹어 본 것이 처음이었다. 유학생의 식사는 그저 패스트푸드점의 햄버거나 편의점에서  삼각 주먹밥과 컵라면이 고작이니  정도로는 배가 부를 리가 없지 않겠나굶지 않으면 다행인 것을.


 나를 처음 위장에 가득 찬 만복감 배가 불러 만족 행복감 선물한 돈까스는 지금까지 평생 잊을  없는 고마운 음식이다 음식을 사준 방배동 언니도 잊을 수가 없다지금 어디에 살고 있는지 언젠가 만나게 된다면  나에게 만복감과 행복감을   언니와 내가 만든 돈까스를 먹으면서 그때의  마음을 이야기하면서 보답하고 싶다.


 그리고그때 먹었던 '만복과 행복의 돈까스 파워'로 내 유학 생활은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는 말을 꼭 전해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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