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비가 밤사이 하늘을 깨끗이 씻어놓아 유리처럼 맑은 9월의 어느 날 연천 호로고루성에 해바라기를 보러 갔다. 날은 더워도 하늘은 높고 푸르다. 가는 길에 넓은 들녘에 벼들이 보인다. 가을이 깊지 않아 이제 막 익기 시작한 벼는 고개를 숙이고 있지만 황금색보다는 초록색에 가깝다. 시골 들녘은 언제 봐도 기분이 좋다. 도시의 생활이 그만큼 건조했다는 반증이리라.
호로고루성에 도착하니 우뚝 솟은 성과 해바라기 밭이 보인다. 강렬한 햇볕이 내리쬐는 주차장에 뽀얀 흙먼지가 연무처럼 날아오른다. 흙먼지 사이로 차를 대고 벤치에 앉아 화가인 동생과 주먹밥으로 간단히 점심을 먹었다. 찬은 없어도 점심은 꿀맛이다. 혼자 여행하며 먹을 때 보다 훨씬 맛있다. 이래서 음식은 함께 먹어야 더 맛있는 것 같다.
혼자 여행하는 누나가 걱정돼 가끔 동행하는 동생. 혼자가도 괜찮다고 해도 기어이 따라나선다. 남들이 보면 부부인 줄 안다. 주먹밥은 못 먹겠다는 동생에게 배부르면 먹지 말라고 협박을 하며 주는 대로 먹으라고 윽박지르기도 한다. 밥을 사 주겠다고 해도 안 먹고 주먹밥을 먹는 누나가 불편해 따라오지 않을 만도 한데 그래도 따라오는 동생이 예쁘다. 언제 또 이렇게 동생과 여행을 하겠는가.
넓은 해바라기 밭을 지나 호로고성에 올랐다. 평일인데도 사람들이 많다. 평일에 돌아다녀보지 않은 동생이 주말도 아닌데 웬 사람들이 이리도 많으냐고 의아해했다. 필자도 처음엔 그랬다. 학생들이 학교에 갈 시간에 길거리에 있는 것을 보면 저 애는 왜 학교에 안 갔을까 하고 궁금했다. 고정관념이라는 것이 사람의 정신세계를 이렇게 장악하고 있으니 문제해결 능력이 떨어지는 것은 아닌지.
호로고루성은 6세기 중엽 고구려와 신라의 국경하천 역할을 했으며 임진강 북안에는 배를 타지 않고 도강할 수 있는 여울목이 있다고 전하지만, 어느 곳인지 잘 모르겠다. 배를 타지 않고도 이 넓은 강을 건널 수 있었다니 뱃삯이 부담스러운 서민들이 이용하지 않았을까.
호로고성에 올라 하늘을 보니 높고 푸른 가을 하늘이 더 가까이 보인다. 하얀 뭉게구름이 뭉실뭉실 떠있다.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다. 성 아래엔 유유자적 흐르는 임진강도 보인다. 임진강 물줄기는 북쪽 함경남도 덕원군 마식령에서 발원하여 남서쪽으로 흘러 굽이굽이 먼 길을 돌아 한탄강을 지나 강화를 거쳐 바다로 흘러간다.
임진강에 왜가리가 날아간다. 국경도 없고, 경계도 없는 새들, 자신이 가고 싶은 곳은 마음대로 갈 수 있으니 좋겠다. 임진강 강물은 그렇게 자신의 몸을 낮추며 흘러간다. 긴 여행길에 모래와 자갈도 데려간다. 가다가 힘들면 때로는 머물다 가고, 쉬어가기는 하지만 흐름을 멈추지는 않는다. 우리들의 인생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