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의 세대는 한마디로 격변기를 겪으며 자랐다. 지금의 중년인 기성세대들은 다 그렇게 자랐다. 농업 사회에서 탈공업 사회로 걸어가던 사회다. 도시와 시골의 격차도 심했다. 우리들의 부모님들은 못 배운 것이 한이 되어 자식들만큼은 결코 자신과 같은 삶을 살게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뼈를 깎는 고통을 견디며 소 팔고, 논 팔고, 남의 집 품팔이와 막노동을 해서 자식들을 힘들게 교육시켜 도시로 보냈다.
보리죽도 먹기 힘든 세상을 살면서도 자식은 가르쳐야 한다고, 월사금 낼 돈이 없어서 집집마다 돈을 빌리러 다니기 일쑤였다. 농업사회엔 가을 추수가 끝나고 곡물을 내다 팔아야만 돈을 손에 쥘 수가 있었기 때문에 현금이 없는 것은 당연했다. 그 시대는 다 그랬다. 개중엔 돈을 빌려주는 이웃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이웃들도 있었다. 주제도 모르고 돈도 없으면서 자식을 가르쳐서 뭐 하느냐고 대놓고 핀잔과 멸시를 하며 농사일이나 거들라고 훈계도 했다.
그렇게 공부시킨 자식들은 도시로 떠나갔다. 개천의 용이란 훈장을 달고. 그 용들이 지금의 우리들이다. 개천에서 올라온 용들은 도시의 용들을 보면서 열등감에 시달렸다. 도시의 용들은 모든 인맥을 등에 업고 승승장구하며 개천의 용들 위에 군림했기 때문이다. 부모님께는 내색도 못하고 개천의 용들은 도시 생활이 외롭고 힘들었다. 부모님과 동네가 자랑하는 개천의 용들은 그렇게 이중고에 시달렸다.
어쩌면 이청준 작가가 말하는 항상 젖은 속옷을 입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축축한 젖은 속옷을 입고도 개천의 용들은 오기로 버티며 부모님 은혜에 보답하고 경제발전에 이바지했다. 썩어도 준치라고 개천의 용들은 열등감에 자존감이 바닥일 때도 내색하지 않았다. 왜? 개천의 미꾸라지가 아니고, 개천의 용이니까?
우리들 부모님 세대의 개천의 용들은 더 많은 열등감에 시달렸다고 한다. 한국문학통사를 보면 대한민국의 용들은 힘든 유학길에 올라 영문학을 전공하고 와서도 영어를 가르치지 못하고, 국문학을 가르쳤다고 한다. 외국 문학을 받아들이면서 겉으로는 찬사를 보내도 속으로는 심한 열등감에 시달렸다고 전한다. 필자의 부친도 일본 유학파인데 그들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어쨌거나 우린 그렇게 지금까지 굳건히 버티며 살아왔다. 필자가 작가가 되고 보니 모든 것이 새롭게 보였다. 혜안까지는 아니지만, 세상을 보는 시야가 달라졌다. 감사할 일도 많고, 사물이나 세상을 볼 때 깊고 자세히 보며, 감성적이고 연민으로 바라보게 된다. 그리고 작가가 되면 심사를 볼 일이 많다. 모든 작가가 다 심사를 보는 것은 아니지만, 예를 들어 시에서 시행하는 백일장이나 여러 글짓기 행사 등등.
얼마 전 필자는 문해교육 심사를 봤다. 우리가 생각하는 문해란, 부모님 세대엔 나라가 가난했으므로 나이 든 어른들만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가 않다. 필자보다 십 년이나 나이가 어린 사람도 있었고, 더 어린 사람도 있었고, 남성도 있었다. 심사를 보면서 많이 놀라웠다. 그들의 용기에 놀랐고, 그들이 바라보는 세상은 원망과 분노보다는 아름다움으로 가득했다. 지금까지 살면서 자신의 이름 석 자도 쓰지도 읽지도 못했던 그들은 당당하게 세상 밖으로 나와 글짓기까지 했다. 이 얼마나 대견하고 훌륭한 일인가. 그동안 은행이나 관공서 같은 데서 글을 모르니 마음을 많이 조였을 것이다. 그들의 글을 읽으면서 필자는 가슴이 뭉클해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어느 설문조사에서 사람들에게 살면서 가장 후회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들이 하나같이 대답한 것은 그때 공부 좀 더 할 걸, 공부도 때가 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 가장 후회가 된다고 말했다고 한다. 아무리 돈이 많아 집과 몸을 명품으로 휘감아도 가슴 한쪽이 채워지지 않는다고. 인간은 본능 다음으로 앎에 대한 욕구가 강하므로 물질로도 채워지지가 않는 것이다.
많이 배웠든 적게 배웠든 글을 읽고 쓸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세상을 보는 방법을 알 수 있고, 스스로 길을 찾아갈 수 있으니 부르주아가 아닌가. 필자도 문해교육 글짓기 심사를 보면서 반성했다. 많은 혜택을 받았으면서도 그동안 왜 부모님께 감사하지 않고 원망만 했을까. 그것은 욕심 때문이었다. 남들처럼 부모님이 오래 살아계셔서 뒷바라지를 더 많이 해주셨다면 더 좋은 대학에 가고, 더 좋은 환경에서 누리며 살 수 있었을 텐데 하는 그럼 욕심. 이 정도면 충분한데 말이다.
어쨌든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젠 나라가 부강해져 더 이상 개천의 용은커녕 미꾸라지도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므로 개천의 용들의 시대는 끝났다. 그동안 개천의 용들은 무거운 짐을 지고 어둡고 추운 긴 터널을 지나오느라고 몸은 노쇠하고 영혼은 피폐해졌다. 이제는 그들이 짊어진 짐을 내려놓고 당당하게 편히 쉬어도 된다. 개천의 용들도 할 만큼 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