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 좁은 며느리의 투덜거림
추석 연휴 마지막날, 드디어 노트북을 켜본다.
연휴 내내 책 한 줄도 글 한 줄도 읽고 쓰지 못했다.
명절이 되면 안 보던 텔레비전을 시어머니와 함께 본다. 명절 음식 만들고 나들이를 다녀오고 나면 딱히 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이번엔 큰 아이가 고3이어서 시동생 식구들은 오지 마라고 했다. 대신 동서네 친정에 가서 푹 쉬라고 큰 며느리 권한(?)으로 이야기해서 어머님만 함께 했다.
우리 어머니는 혼자 사신다. 연세는 70대 중반이시고 아버님 돌아가시기 전이나 후나 상관없이 바깥일에 바쁘시고 늘 배움에 목말라계신다. 항상 새로운 것을 도전해 보는 것을 좋아하시고 친구들과 놀러도 잘 다니시고 언제나 자기 자신을 최우선으로 하신다. 그 연세면 어려워하는 컴퓨터도 하나하나 물어가면서 배우시고 초등학교만 졸업한 것에 대해 한이 맺혀 뒤늦게 중고등학교를 졸업하시고 지금은 첫 번째 대학에 이어 두 번째 대학에 다니시는 중이다. 우리끼리 우스갯말로 대한민국에서 제일 바쁜 분이라고 이야기할 정도다.
본인의 삶에 바쁜 분이어서인지 간섭도 잘 없으시고 전화를 자주 안 드려도 서운해하시지 않고 오히려 자주 연락하는 것을 귀찮게 여기신다. 본인 치장과 스스로 꾸밈에도 신경을 많이 쓰셔서 겉으로 보면 친구분들보다 매우 젊게 보이시는 장점도 있다.
어머니는 원래 일을 하시다가 그만두시고 연금과 조그만 가게에서 나오는 월세를 수입으로 생활하신다. 시누이, 시동생과 우리가 매달 모으는 돈으로 관리비나 큰돈 들어갈 일이 있을 때 따로 드려서 혼자 생활하시기에 부족함은 없으시다.
거리가 있어 어머니를 일 년에 자주 뵙지는 못하지만 명절과 아버님 제사 때 만나면 언젠가부터 늘 마음이 긴장 상태가 된다.
이번엔 또 무엇을 사달라고 하실까...
만날 때마다 드리는 용돈과는 별개로 항상 생각해 오시는 것이 있어서 필요하거나 갖고 싶은 것을 큰 아들에게 넌지시 말씀하시면, 큰 아들은 곧바로 알아듣고 바로 실행이다.
본인 엄마가 갖고 싶어 하시고 필요하다고 하시는 것은 당장 움직인다.
안 그래도 우리 남편은 별명이 '소비요정'인데 말이다.
그것뿐이랴..
'장남병'에 걸려서 자기가 아니면 안 되는 줄 알고, 자기가 아무리 힘들어도 어머니나 누나, 동생 앞에서는 절대 티 내지 않고 너무 잘 나가는 큰 아들이나 큰 형이자 동생인 것처럼 보이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지난 설에는 최신 정수기가 필요하다 하셔서 제일 비싼 걸로 사드렸고 그전 추석엔 최신 핸드폰이 필요하다 하셔서 문 열린 마트 찾아 돌아다니며 겨우 사드렸고... 어쩔 때는 남들이 모두 부러워할만한 독특한 디자인의 팔찌가 사고 싶다 하셔서 그땐 겨우 형제들 모은 돈으로 사드렸다.
사실 작은 것부터 큰 것까지 용돈과는 별개로 큰 아들만 만나면 말씀을 하신다.
시동생한테는 안 그러시면서...
우린 맞벌이고 시동생네는 외벌이라서?
이번 추석에도 식탁에서 즐겁게 이야기 나누던 중 어머니가 갑자기 말씀하셨다.
친구분 중 한 분이 우리 아들이 준 '카드'라면서 식사값을 내시고, 그 뒤로도 몇 번 그 모습을 보셨던 건지 그게 너무 부럽고 샘이 나셨던 거 같다.
"내가 어떻게 기를 죽이지. 어떻게 하면 코를 납작하게 해 주지 생각했는데, 나는 우리 며느리가 카드 주더라라고 할 거야. 그러니까 **야 니 카드 한 장 내한테 도"
헐...
순간 이번에는 '내 신용카드구나' 싶었다.
남편도 살짝 당황해서 대충 웃고 얼버무리고 넘어갔고 나도 그냥 하신 말씀이려니 넘어갔는데, 내려가셔서 전화 통화 때 다시 같은 말씀을 하시는 거였다.
"**한테 카드 빨리 보내라고 해라"
아니 이건 좀...
어머니 친구분 아들은 의사고 당신 아들은 그런 상황이 아닌데..
저녁 먹은 게 꽉 막혀 내려가질 않는다.
우리 경제 상황은 알고서 저렇게 말씀하시는 걸까 싶어서 속이 상하다.
다른 것도 아니고 친구분들에게 자랑하고 싶어서라는 데, 왜 그런 게 그렇게 중요하신 건지..
내가 심드렁하게 있으니 남편이 하는 말이...
"저렇게 대놓고 달라고 하시는데, 안 드릴 수도 없고 어떡하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느냐는 표정으로 내가 쳐다보니 그다음 말이..
"그럼 카드 두 개 만들어서 장모님도 하나 드리까.."
속으로 욕이 나왔다. '미친~~' '말 같은 소리를 해야지'
화가 나기 시작하니까 또 그동안 서운했던 일들이 마구 떠올랐다.
그중 가장 서운했던 일이 제사다. 나는 큰며느리로 시집올 생각을 하면서 '제사'에 대해 불평불만이 없던 사람이었다. 당연히 내가 할 일이고 조상님 잘 모셔서 집안이 잘된다면야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고 특별한 생각이 없었다.
그런 나에게, 십 년 만에 둘째를 임신한 나에게 어머님은 제사를 넘기셨고 배가 만삭인 내가 설날 차례상부터 우리 집에서 지내기 시작했다. 주변에서 나이 40에 무슨 제사를 벌써 가져오느냐, 어머니께서 아직 젊으신데 왜 안 하시냐, 제사를 주시면 그래도 재산이라도 조금 나눠주시던데 무얼 받았냐 등등...
그때만 해도 내가 착하고 어렸었나 보다. 싫은 소리 하나 못하고 거절 못하고 내 남편을 사랑하니까 남편의 어머니께도 잘해드려야지 그런 생각만 가득했던 때였다.
그렇게 얼렁뚱땅 제사를 가져오고 제사와 명절을 우리 집에서 보내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나는 명절에 친정을 못 가는 신세가 돼버렸다.
지금이 무슨 조선시대도 아닌데 말이다.
솔직히 서운함이 가득하다. 결혼할 때도, 제사를 받으면서도 십 원짜리 한 장 받은 게 없는데...
이런 상황이 되면 자연스레 친정이 생각난다. 우리 엄마, 아빠가 보고 싶다.
친정 엄마는 넉넉하지 않은 살림에서도 늘 뭔가 해주시려고 하시고 더 못해줘서 미안하다 하시고 작은 걸 해드려도 고맙다고만 하시는데, 훨씬 더 경제적으로 여유로우신 시어머니는 왜 늘 우리에게 해달라고만 하실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