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4] 대한민국 자동차 수출의 시작
1976년 어느날, 그날은 평소와는 좀 달랐다.해양대학 졸업 10년만에 기관장이 되어 첫 출항을 앞두었기 때문인지, 오랜만에 탱커선(유조선)이 아닌 벌크선을 타서 기름냄새가 좀 덜해서였는지, 아니면 시내에나 나가야 겨우 구경할 수 있던 승용차를 그물로 끌어올리고 있는 이상한 광경을 처음봐서였는지 아무튼 그랬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범양상선(현재의 팬오션)은 탱커선 외에는 벌크선을 주로 운항하는 회사였다. 여기서 벌크선이란 말 그대로 포장(컨테이너)이 안된 화물을 싣는 화물선으로, 별도의 구조물 없이 격벽으로 구분되어 있는 화물창(hold)에 화물을 싣고 해치(hatch)를 닫으면 바로 운반이 가능한 비교적 단순한 구조이다. 그리고 그날 그물망을 이용해 끌어올린 승용차는 바로 그 해치 위에 묶여 바다를 건넜다. 국내 최초의 독자생산 모델 현대 포니가 태평양 너머로 수출되는 순간이었다.
"지금에야 자동차를 대량으로 수출하기 때문에 자동차 운반선을 사용하지만, 당시에는 자동차 수출이라는 개념자체가 생소한 시기였고 수출량도 적었기 때문에 일반 화물선 해치 커버 위 데크에 고박(선체에 화물, 차량 등을 고정하는 것)해서 운송하는 게 보통이었습니다. 그것도 1970년대 후반 포니가 출시되고 나서부터였어요. 그땐 선적하는 방식도 화물용 크레인에 그물망을 묶어 자동차를 싣거나, 조금 지나서는 흠집 방지를 위해 천으로 감싸서 싣는 정도였죠. 당시 일본 자동차는 이미 자동차 전용선을 사용하고 있었고, 우리는 일본에 비해 자동차 산업의 수준이 말도 안되게 작았습니다."
1972년 3등 기관사로 화물선에서 항해를 시작한 방극랑 전 기관장은 당시를 떠올리며 머쓱한 웃음을 지었다. 사실상 '자동차 수출'이라고 부르기가 민망한 수준이었기에 별로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을 것 같다는 말과 함께였다. 하지만 지금처럼 대형 자동차 전용 운반선으로 매년 수십만대의 자동차를 수출하는 시대가 올거라는 생각도 할 수 없었던 시절, 대한민국 자동차 수출의 시작에 대해 알아보는 것이 자동차 산업의 현재와 미래를 바라보는 일에도 의미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인터뷰를 이어갔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자동차는 선적 화물중에서도 고가품이기 때문에 특별 관리 대상이었습니다. 완전 초창기에는 해치 위에 고정할 때 체인을 통해 단단히 묶었지만, 바다를 건너는 중에 파도가 세게 치면 체인이 터지는 경우가 많아 이후에는 와이어를 사용했습니다. 타이어를 하나씩 묶어 고정하는 방식인데, 해풍과 파도로 인한 손상은 막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완전히 도장 마감이 된 차량을 싣는 것이 아니라 도착지에서 다시 도장을 마감하였던 기억이 납니다. 그럼에도 최대한 손상을 줄이기 위해 바다 위에서도 테크 파트에서는 매일 자동차 사이를 다니며 청소를 해주고 차가 긁히지 않도록 단추가 없는 점핑 수트만 입고 점검을 해야했습니다. 2만톤짜리 화물창에 해치를 닫으면 그 위에 고박할 수 있는 자동차는 4~5대 정도이기 때문에 큰 벌크선이라고 하더라도 겨우 40대 정도 싣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그때는 한번에 수출하는 자동차가 40대도 되지 않던 시절이었습니다."
현대 포니가 이제 막 호주, 미국으로 수출되기 시작하고 기아, 대우 자동차가 수출 태동기에 다가가던 시절, 거대한 화물선 데크에 와이어로 묶인 포니는 비싸고 관리가 귀찮은 화물에 불과했을지도 모르지만 태평양과 대서양 곳곳을 누비던 상선 승조원들은 몇대 안되는 자동차를 매일 닦고 점검하며 대한민국 자동차 수출의 시작에 각자의 자리에서 기여했다. 그러던 중 중동에서 포성이 울리기 시작하며 자동차 수출 시장에 큰 변화가 오기 시작한다.
이란-이라크 전쟁 당시 이란으로부터 군용 지프차를 수출을 수주한 효성물산은 아시아자동차에 당시 내수용 1/4톤 군용 지프를 수출용으로 개조해 공급해달라고 요청하였고, 이는 현지에서 구조의 단순함과 우직한 신뢰성을 바탕으로 큰 인기를 끌며 한국산 차량이 세계에서 통할 수 있음을 증명한다. 이를 통해 아시아자동차는 1981년 수출 1천만불탑, 1983년 수출 2천만불탑을 받으며 전쟁 특수를 누렸고 영국, 프랑스와 같은 선진국 브랜드들보다 오히려 더 좋은 반응으로 대한민국 자동차 산업이 국제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는 희망을 보였다.
이 시기 포니를 통해 조금씩 자동차 수출을 늘려가던 현대자동차는 1986년 포니 엑셀(현지 출시명 Excel)을 통해 미국 시장에 진출하며 출시 첫해에만 16만대를 판매해 본격적인 자동차 수출의 시대를 알렸다. 지난 로터스(로터스는 우리를 배신하지 않았다, [Vol3.] 무게를 줄이면 모든 구간에서 빨라진다는 진리) 편에서도 언급되었던 '21세기의 자동차 디자이너' 조르제토 주지아로의 디자인과 과감한 독자 생산 모델 개발을 통해 가격을 낮추고 품질을 개선한 현대의 노력이 빛을 보는 순간이었다.
"벌크선 데크에 자동차를 싣고 수출하는 방식은 자동차 수출 초기 5~6년 후부터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이후로는 수출량이 급격히 증가하면서 일본처럼 자동차 운반선을 사용하게 됐어요. 몇년 간 파도를 맞으며, 자동차 사이를 단추 없는 옷을 입고 청소하던 우리에게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자동차 산업이라는 단어조차 생소했던 나라에서 불과 5~6년만에 10만대가 넘는 수출을 하게 됐으니까요. 1986년, 미국에서 처음 봤던 엑셀을 귀국하자마자 구매해 탔던 기억이 납니다. 그만큼 충격적이고, 또 자랑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당시 미국의 일본 소형차 수출 규제 등 여러 호재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엑셀이 미국 시장에서 거둔 성공은 국내 자동차 산업의 미래를 바꿀만큼 놀라운 일이었다. 그 이후, 기아와 대우자동차가 유럽과 미국 시장에서 거둔 성공과 현재의 현대, 기아차가 세계 시장에서 보여주고 있는 성과는 이미 글로벌 자동차 시장에서 TOP5에 위치한 회사를 보유한 우리에게는 별로 대단할 것도 없는, 당연한 일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겨우 포니 6대를 화물차 테크에 싣고 태평양을 건넜던 이들에게는 여전히 자랑스러운 일일 것이다.
2024년 현재, 현대자동차는 아이오닉, 제네시스 등으로 글로벌 자동차 시장에서 '올해의 차'를 매년 수상하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자동차 산업은 반도체와 함께 대한민국을 이끌어가는 기반이 되었고, 매년 수백만대의 자동차를 실은 자동차 운반선이 오대양을 항해해 전세계로 수출되어 나간다.
글로벌 전기차 수요가 정체되고, 경기침체로 인해 자동차 시장이 경색된다는 이야기가 매일 뉴스를 장식하는 요즘 대한민국 자동차 수출의 시작을 함께 했던 이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보여준 최선'은 우리가 여전히 희망을 품을 수 있는 힘이 되어준다. 자동차 시장이 부침을 겪고, 자동차 산업 자체가 격변을 겪더라도 우리는 겨우 테크 위에 5대씩 묶은 자동차를 수출하던 시절부터 가졌던 산업 각 분야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꿈과 최선을 다하는 자세를 지켜간다면 여전히 흔들림 없이 자동차를 한가득 싣고 바다를 건널 수 있을 것이다.
그물로 끌어올린 자동차를 싣고 수개월을 항해해 이역만리 땅에 내렸을 때, 우리는 현지에서 그 몇 대 안되는 자동차를 기다리던 이들의 눈을 봤다. 자동차를 운반해본 경험이 없어 분명 외관이 많이 상했을 것이고, 해풍과 파도에 부식된 부분은 그들이 감당해야할 부담으로 다가왔을텐데. 그 청년들의 눈에는 기대와 환희만이 가득했다. 반짝이는 그 눈을 보며 생각했다. 바다가 저들을 부르고 있다고, 상선 위에서 삶의 절반 이상을 보내는 우리가 그들의 항해가 고단하지 않게 함께 해야겠다고.
- 방극랑(前 범양상선, 한진해운 기관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