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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사요 Oct 16. 2023

제로의 영역

배움은 비움에서 출발한다

한번도 가보지 않은 길은 누구에게나 막연한 두려움을 준다

 1999년에서 2000년으로 넘어가는 세기말의 시기는 새천년에 대한 희망과 기대에도 불구하고 누구에게나 막연한 두려움을 가질 수 밖에 없는 분위기였다. 이미 우리의 삶에 깊이 들어와 있던 컴퓨터가 오작동을 일으켜 지구가 멸망할 거라는 Y2K 문제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나도 유명하고, 온갖 종교단체는 물론미디어에서도 암울한 분위기를 풍기는 디스토피아적 세기말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콘텐츠가 쏟아졌다. 


 1999년 당시 대우 로얄즈 소속으로 K리그 사상 최초의 비우승팀 MVP에 올랐던 안정환에게도 2000년의 새로운 시작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대우그룹의파산으로 구단을 인수한 현대 산업개발에서 기존 구단과의 계약 사항이던 MVP 달성 후 유럽 진출에 대해 무효를 주장하면서 결국 반시즌을 더 뛰는 것으로합의했고, 임대라는 불안정한 신분을 감수하면서 이탈리아 세리에 A의 AC 페루자로 이적했지만 첫 경기에서 54분, 두번째 경기에서 18분을 뛴 게 전부였다. 이후 안정환은 출전 명단에서 조차 들락날락하면서 11경기 동안이나 그라운드를 밟지 못했다.


막연했던 두려움이 현실로 보이면 그것은 공포가 된다

 새로운 시작이라는 것은 항상 그렇다. 설레는 마음을 갖게도 하지만, 막연한 두려움이 현실로 다가올 때 그것이 공포가 되는 것은 순식간이다. 당시 대우자동차에 입사해 처음 세일즈를 시작한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매일 이곳저곳에 있는 빌딩들을 옮겨 다니며 낯선 사무실의 문을 열고 “안녕하십니까! 대우자동차 최용민입니다!” 라고 외쳤다. 무일푼에 인맥도 없는 나는 그렇게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세일즈는 곧 사람을 만나는 일이라고 배웠고, 스스로도 그렇게 믿었기 때문에 신념을 가지고 매일 부딪혔지만 현실에서 이어지는 문전 박대와 거절, 심지어는 하대와 무시까지 겪으면서 나 역시도 거절에 대한 두려움을 느껴야만 했다. 심할 때에는 그 두려움이 사람에 대한 공포로 이어지기까지 했을 정도였다. 


 안정환이 세리에 A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시즌이 거의 절반쯤 지난 14 라운드 경기였다. 그 날도 안정환은 후반 교체 출전하여 단 8분을 뛰었지만 감독은 무언가 가능성을 본 것인지 그를 바로 다음 경기에 선발로 출전 시킨다. 상대는 지금도 세계 최고의 팀에 꼽히며 당대 최고의 선수 지네딘 지단으로 대표되는 슈퍼스타가 우글거리던 유벤투스 FC였다 


 무언가를 배우기 위해서는 먼저 가지고 있던 것들을 비워내야 한다. ‘세일즈는 곧 사람을 만나는 일’이라는 간결한 원칙을 배우기 위해 나는 우선 어제의 나를버리고 그 명제 자체를 완전하게 믿었다. 당장 고시촌 쪽방을 탈출할 돈이 급했지만, 고향에선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나를 도와줄 사람이 곁에 늘 있었기에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서울살이가 너무나 고독했지만, 나는 절실했고 그렇기에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내가 일어날 수 있는 길은 오직 ‘사람’이라는 것을 신념으로 받아들였다.


유벤투스 FC와의 홈 경기에 선발 출전한 안정환은 완전히 다른 선수가 되어 있었다

 후일 안정환은 이탈리아 시절에 대해 “축구를 처음부터 다시 배웠다.”고 회고했다. 이미 K리그 MVP에 오르며 국내에서는 최고의 자리에 올랐고, 국가대표팀에서도 활약하던 그가 낯선 땅에서 겪은 인종차별과 임대 선수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발전한 이유가 아닐까 생각한다. 


 유벤투스 FC와의 경기에서 그는 비록 득점은 없었지만 그동안의 설움을 씻어내기라도 하듯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모습을 보이며 평점 6.5점을 받는 활약을 보여주었다. 특히 그를 마크하던 유벤투스 FC와 우루과이 대표팀의 레전드 수비수 파올로 몬테로가 경기 중 구토를 한 장면은 그 날 안정환이 얼마나 뛰어난 플레이를 보여줬는가를 확인 시켜준다. 


 결론적으로 ‘사람’과 ‘사람’ 중심의 세일즈에 대한 가르침을 향한 나의 믿음은 옳았다. 단지 내가 그동안 쌓아온 화려하다면 화려한 기록과 성과가 증명해주기때문만은 아니다. 나는 시간이 흐르며 성공을 경험하면서도 늘 그랬고, 솔직히 지금까지도 고객이 어렵다. 단지 관록이 붙어 남들이 보기에는 자연스럽게 느껴질 뿐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사람’에 대한 두려움을 유지해왔기에 원칙을 잊지 않고 ‘사람’을 중심에 둘 수 있었고, 늘 그 ‘사람’을 통해서 결과를 만들수 있었다.


영광의 시간 뒤에는 ‘비법’이나 ‘기술’, 같은 게 아닌 제로에서 배울 수 있는 용기가 있다

 안정환은 이후 2000/2001 시즌 후반기가 되자 팀의 주전 선수로 자리 잡았고, 4골과 1개의 도움을 기록했다. 그리고 그 다음 시즌에는 경기 후반 흐름을바꾸는 조커의 역할과 등번호 10번을 맡았고, 2002년 월드컵에서는 모두가 아는 그 골을 이탈리아 최고의 선수들로 구성된 대표팀에게 넣으며 극적인 승리를 이끌었다. 


 새로운 일을 시작 하는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은 본인의 편견과 습관을 신념이라고 믿고 배움을 거부한다. 다른 많은 분야도 마찬가지겠지만 자동차 세일즈를처음 시작하는 신입 사원의 50%는 1년을 채우지 못하고, 3년이 지나면 10%도 그 자리에 남아 있지 못한다. 그들 중 대부분은 떠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배움을 위해 자신을 비우지 않는다. ‘비법’ 같은 것을 염탐하고 배우라는 말이 아니다. 안정환이 이탈리아에서 배웠다는 것 역시 축구의 ‘기술’ 같은 게 아니라 축구 그 자체였다. 적어도 새로운 세계에 들어갔으면 그곳에 대해 이전의 나를 버리고 완전히 제로에서 시작해 배우고 익혀야 한다. 


 나 역시도 지금 ‘카사요’를 통해 플랫폼 서비스에 도전하면서 매일 새로운 것들에 대해 배운다. 경험과 노하우를 녹이면서도 다시 제로의 영역에서 배워 나간다는 게 쉽지만은 않은 일이라는 것도 안다. 하지만 자신을 비우지 않으면 아무 것도 배울 수 없다. 물론 그 가르침이 틀렸을 수도 있지만, 그것도 온전히 배우고 난 뒤에야 판단할 수 있는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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