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8년 11월 10일 금요일, 날씨 맑음
치익- 딱!
시원한 맥주캔을 따는 소리가 미리 청량감을 더한다. 반신욕 후 맥주 한잔. 목까지 올라온 피로를 쌉쌀하면서 보글거리는 탄산기포가 한방에 발끝까지 내려주는 것 같다. 한 모금이면 충분하다. 하루의 끝에 맥주캔을 따는 행위 이 자체만으로도 자유의 신호탄을 울리는 듯한 해방감을 느낀다. 8시간의 비행으로 피곤하지만 오랜만의 영국방문과 내일 있을 낭독회로 마음이 두근거려 잠을 이룰 수가 없다. 5년 전 브런치를 시작으로 매일 무얼 쓸까 글감을 찾고 어떻게 써야 하는가 하며 글쓰기 고민을 했던 때가 엊그제 같기만 하다. 물론 지금도 같은 고민을 매일 반복하고 있지만 그런 날들이 하루하루 쌓이고 쌓여 책으로 출간되었다. 이런 기쁨을 누리게 되다니 감사한 마음이 든다. 누군가 그랬다. 책을 내는 건 아이를 낳는 출산의 고통과 맞먹는다고. 정말 그랬다. 하나의 글을 쓰면서 꼭지를 완성하는 성취감을 맛보면 그 점들이 이어져 내 인생도 뭔가 그럴듯하게 점을 찍으며 완성해 가는 느낌을 받는 것 같다.
8년 만에 방문한 영국이다. 어느덧 6번째. 20대 후반에 가본 영국의 따뜻한 경험은 나를 방학 때마다 인도했다. 꿀 같은 방학을 매번 같은 곳으로 여행 가니 주변에서 물었다. 거기 숨겨둔 애인이 있냐고. 숨겨둔 애인은 없었으나 진짜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도 종종 하곤 했다. 또 기차를 탈 때도 영화 <비포선셋>에 나오는 영화 주인공들처럼 대화하다가 사랑에 빠지는 그런 로맨스도. 현실은 음. 말 하나 거는 사람도 없었지만 그래도 그곳이 좋았다. 이번 방문엔 특별히 영국왕실의 초대를 받았다.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를 초대회 낭독회를 연다. 해리포터를 쓴 JK롤링스 작가도 온다고 한다. 과연 어떤 시간이 될지 벌써부터 두근 거린다. 덕분에 전용 비행기를 타게 되어 가족 모두 함께 호사를 누린다. 비즈니스석도 건너뛰고 바로 전용기 클래스. 영화에서 본 듯한 느낌의 넓고 깨끗한 복도가 펼쳐진 전용기 안에는 개인별 부스로 나뉘어 누워 쉴 수 있는 좌석과 칸칸이 가지런히 꽂혀있는 매거진, 스코틀랜드 양모로 만들어진 블랭킷, 견과류와 음료가 손만 뻗으면 닿는 곳에 마련되어 있다. 부스를 나와 복도로 걸어 다음 칸으로 가면 주방이 보인다. 메뉴판에서 고른 음식을 바로 요리해서 준다고 한다. 회의실과 널찍한 화장실. 비행기가 이렇게 넓어 보일 줄이야. 다닥다닥 붙어 앉은 이코노미석에서 화장실 가기도 어려워 늘 복도 쪽 좌석을 예매했던 예전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그 나름대로의 추억이다 싶어 미소가 지어진다. 취재하는 기자분들과 방송국 카메라 감독 몇 분도 함께 동행하게 되었는데 그분들과 수행원분들은 회의실 뒤쪽으로 이어진 비즈니스석에 자리했다. 우린 하루 예정된 정식 낭독회 일정을 소화한 뒤, 각자 일정을 보내고 런던 히드로 공항에서 만나기로 했다. 총 7일간의 시간이 주어졌다.
8년 만에 다시 온 영국은 예전 그대로다. 런던 히드로 공항에 내려 환승한 후 뉴캐슬에 들렀다가 남은 3박 4일을 보내고 런던으로 돌아올 예정이다. 뉴캐슬에서는 출간기념으로 영국 친구가 마련해 준 다국어 도서관에서 티타임을 함께 갖기로 하였다. 예전 한국어 책을 몇 권 기증한 것이 인연이 되었다. 한국어에 관심을 갖는 대학생들이 많이 늘었다. BTS의 영향이 지금도 여전하다.
"한국에서 온 류작가입니다. 영국에 방문하게 되어 영광이에요. 낭독을 시작하겠습니다."
낭독회. 한 사람씩 차례로 나와 10분간 낭독을 한다. 로터리 방식으로 그 자리에서 추첨으로 고른 시구와 책 구절을 낭독한다. 꽤나 낭만적이고 재밌는 방식이었다. 간단한 소개를 하고 낭독을 시작하는데 떨림이 숨소리에 전해지는 것 같았다. 모두 내 목소리에 주목하는 고요함에 마음을 가다듬고 낭독했다. 약 10명의 작가들이 돌아가며 낭독했다. 버킹엄 궁전에서 낭독하는 공간은 생각보다 아담하게 느껴져 서로의 목소리가 잘 들렸다. JK롤링스는 다정하게 인사하고 반갑게 나를 안아주었다. 즐거운 시간이었다. 차세대 시인을 초청한 시간이기도 해서 영국 대학생들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한국의 문화에도 관심을 많이 갖고 있었고 이미 한국에 다녀온 작가도 있었다.
"출간회에 이렇게 저를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뉴캐슬 방문. 다국어 도서관. 출간한 책을 10권 정도 준비해 갔는데 11분이 오셨다. 친구 거는 택배로 보내주기로 했다. 어떤 내용인지 궁금해했고 그중엔 한국어를 아는 분도 있어서 같이 읽으시는 분도 계셨다. 반가운 언어 소리. 내 책에 관심을 가져주는 타국의 분들과의 만남. 따뜻한 홍차와 스콘은 너무나 반갑고 맛있었다. 인도, 멕시코, 이탈리아에서 오신 분들도 있었다. 이분들을 만나서 더 각국에 대한 관심도 생겼고 책을 내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했다.
문화에 관심을 갖고 한국에 관심을 갖는 시간에 나도 모르게 애국심이 더해졌달까? 외국에 나오면 나타나는 심리 같다. 친구의 따뜻한 배려에 너무 좋은 사람들과의 작은 출간회를 아주 즐겁게 보냈다. 언젠가 꼭 한국에 오겠다는 약속을 받고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 런던행 비행기를 타러 이동했다.
런던 히드로 공항. 즐거웠던 7일간의 시간이 마무리되었다. 5년 전 브런치를 안 했다면 오늘 같은 날이 왔을까? 그때 글을 쓰기 정말 잘했던 것 같다. 그리고 함께 시작한 동기분들 모두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한국에 돌아가면 소모임과 각종 강연이 기다리고 있다. 작가님들과 함께할 시간도 기대된다. 비행기 안에서 강의 내용과 이번주 있었던 일들을 정리해서 브런치에 올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