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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판도 Aug 18. 2024

장막을 걷어라

민둥산의 억새풀을 심장에 꽂다

  긴장일까 설렘일까. 새벽 4시 반에 맞추어 둔 알람이 울리기도 전 저절로 눈이 떠졌다. 식욕 없는 억지 식사 탓인지 혀에 닿는 이물감이 불편하다. 며칠 전, "같이 갈래?" 생각 없이 던진 남자의 치렛말을 여자는 "응." 하고 덥석 물었다. 지친 나를 돌아보겠노라는 당초의 가을 혼행 계획은 빠르게 머릿속을 맴돌다 사라진다.


  '그래, 너도 나처럼 가을이 그리웠구나.'


  우리, 사진 많이 찍자. 카메라와 간단한 장비들, 그리고 트래비와 대추와 초코바 따위의 먹거리를 주섬주섬 챙겨 집을 나선다. '산은 바라보는 것이지 오르는 것이 아니다'는 지론을 가진 내게 있어서, 악산은 아니지만 백팩에 혹까지 단 상황에서의 이번 민둥산 산행이 쉽지 않을 것은 명약관화다.


  새벽 5시 55분, 강원도 정선의 신고한행 6시 시외버스를 탄다. 10월 초순의 가을 속으로 치닫는 새벽은 아직 어둡기만 하다. 버스는 정각 6시에 출발하여 바로 실내등이 꺼졌다. 실내는 어둡지만 바깥은 조금씩 환해지고 멀리 차머리 쪽 하늘은 동이 틀 준비를 하고 있다. 6시 반이면 해가 뜬다.


  여자는 눈을 감았다 뜨길 반복하며 쉽게 잠들지 못한다. 세 시간 가까이 걸린다니 한참을 더 달려야 한다.

징검다리 연휴 틈새의 첫차는 드문드문 빈자리도 보이고 단체 등산객이 없어서인지 사람들 모두가 점잖다. 잠시 편한 잠을 청하고도 남을 시간 동안 나의 상념은 좁은 버스 안을 맴돌 것이다.


  얼마를 갔을까.

  안개다.

  서울로 돌아와 잊고 지내던 안개...

  아, 그냥 멍 때리는 이 순간이 좋다.

  시간을 멈추고 싶을 만큼 참, 좋다.


  쾌변의 욕심에 족히 1리터는 넘을 물을 마시고, 덕분에 시원하게 집을 나섰지만 또 다른 복병이 도사리고 있을 줄은 몰랐다. 버스를 멈추라 소리치는 내 속 좁은 방광. 어떡해...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얼굴이 노래지도록 참기를 한참일 무렵, 버스가 섰다. 화장실을 나서는데 가을바람이 상쾌하다. 하늘도 파랐다.



  민둥산도 산은 산이더라.


  초입의 평지를 걸으며 이렇게만 걸어 정상까지 가면 좋겠다, 기도한다.

  웬걸, 경사지고 좁다란 산길을 몇 번이나 미끄러지며 허약한 내 몸뚱이 하나 주체를 못 하는데, 혹은 역시 혹이더라. 손 안 잡아준다고, 어지럽다고 투덜대는 나의 여자여! 정말 어지럽고 토할 것 같은 거는 바로 너의 남자인 걸 왜 모르니?


  우여곡절 끝에 엄마 손 잡고 가는 어린 꼬마보다도 한참이나 늦게 정상에 도착했다. 물론 참새가 방앗간 들르듯 오르는 길목 곳곳에서 저질 체력을 보충하고 사진도 찍었다. 그렇게 비 오듯 땀을 쏟으며 오르니 좋은 건 더욱 좋더라. 파란 하늘과 녀석이 심심할까 봐 가끔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구름들. 물론 오늘의 주인공은 바람에 살랑거리는 억새꽃, 바로 너다. 정상에 오르는 수고를 한 번에 씻어 날려준 억새 군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그래 너를 보러 나는 수 시간 차를 타고 또 수 시간을 걸어 올라온 거야. 환희와 탄성은 이럴 때 지르는 거다. 인증샷을 찍고 간단한 식사를 한다. 민둥산 막걸리, 너도 빼놓을 수 없지.


  꿈속을 거닐듯 정상의 능선을 오가다가 아쉬운 하산을 시작한다. 체력은 이미 방전되었고 풀려 버린 다리는 내 것이 아닌 듯 퍽퍽하기만 하다. 집에 돌아와 사진을 본다. 짧은 산행이었지만 심장에 이식한 가을 억새 바람이 불 때마다 하늘하늘 흔들리며 반짝거릴 것이다. 비록 나를 되돌아보는 시간은 못 되었지만 나의 여자를 바라다볼 수 있는 가을 속의 산행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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