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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캡틴판양 Sep 02. 2024

채움의 중독, 비움의 해독

풍요 속의 빈곤, 단순함 속의 충만


글을 쓰고 싶었다.

30년 동안 이어온 내 일을 글로 남기고 싶었다.

30년이라니, 정말 긴 시간이다.


그 세월 속에서

나는 수많은 시련과 고난을 겪었고,

이를 통해 경력과 실력 또한 쌓아 올렸다.

그 과정에서 얻은 성취감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문득, 이 이야기를 글로 풀어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긴 여정을 걸어온 나 자신이 대견하고 자랑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자기애가 아니다.

내가 해온 일에 대한 깊은 자부심에서 비롯된 감정이다.




글을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혼자서 시작하기에는 막막해서

글쓰기 클래스를 찾았다.

비슷한 고민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하는 클래스라면, 나에게도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그곳에서는 내가 왜 글을 쓰고 싶은지부터 시작해서 차근차근 배워나가야 했다.


수업은 여러 단계로 나뉘어 있었다.


1단계: 나는 누구인가? 내가 쓸 책의 고객은 누구인가?
2단계: 메시지와 주제 찾기
3단계: 메시지 정하기
4단계: 목차 구성하기
5단계: 글쓰기의 기본기 익히기
6단계: 소제목 원고 쓰기 (일명 꼭지 쓰기)
7단계: 독자를 유혹하는 책 제목 정하기
8단계: 서문 쓰기
9단계: 출간 기획서, 피칭, 마케팅




그런데, 첫 단계부터 막혔다.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내가 쓸 책의 고객은 누구인가?"라는 질문 앞에서,

내가 글을 쓰고 싶다는 이유가 이렇게나 막연했나 싶었다.


그동안 내가 느꼈던 자부심도

갑자기 흔들리는 것 같았다.


‘내가 누구냐니…’


누구나 이런 질문 앞에서

한 번쯤 주춤해 본 적이 있지 않을까?


4단계에서는 목차를 구성하는 작업을 하게 됐다.

내가 쓰고 싶은 글의 소제목,

일명 꼭지를 60개나 작성해야 했다.


처음엔 머리가 하얘지더니,

조금씩 기억의 조각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마침내 60개를 겨우 채우고 나니,

뭔가 해낸 것만 같았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었다.

여기서 10개를 지우라는 거다.

 '뭐? 처음부터 50개만 쓰라고 하지...

얼마나 생각해서 만든 건데..

'순간 속으로 투덜거렸다.


하지만 정말 힘든 건 그다음이었다.

10개를 지우고 나니,

또 10개를 더 지우라는 게 아닌가.

애써 채운 꼭지들이었기에,

하나하나가 다 소중하게 느껴졌다.


아무리 고심해도 무언가를 지운다는 건 생각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었다.

처음에는 내 생각을 채우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비워내는 과정에서 진짜 중요한 것들이 무엇인지 깨닫게 됐다.

마치 채우는 데 익숙해진 내 마음이,

비우는 걸 통해 다시 균형을 찾는 듯한 기분이었다.


우린 살면서 비워내야 할 때,

무언가를 놓아야 할 때가 있었을 것이다.

그때마다 얼마나 어려웠는지 기억날 것이다.


결국, 60개의 꼭지 중 절반인 30개를 남기고

30개를 지워냈다.

이런 심오한 작업이 있을 줄이야.

나는 점점 더 나 자신을 들여다보게 되었고,

하나를 비워낼 때마다 조금씩 더 내 이야기가 명확해지는 것을 느꼈다.


글을 쓴다는 건 결국,

나 자신을 비워가는 과정이었다.

30년 동안 채워온

내 인생의 기록을 남기려는 이 여정은,

내가 무엇을 비워내고,

무엇을 남길 것인지를 선택하는 과정이었다.


이 작업을 통해

나는 비로소 진정한 나를 만나고 있었다.


지금 당신은 어떤 채움에 중독되어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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