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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Ro Switzerland Pt.3

Bizarre but favorable, Switzerland

by DONE

3[Do]Ro: Switzerland

내가 누빈 세상의 모든 도로들: 스위스 편

Pt.3 스키가 타고 싶어서 체르마트로 갑니다.



동네 뒷산에서 스키 타는 곳, 체르마트


Day 3: Grindelwald Out, Zermatt In

2023.01.03 07:30 @ First Lodge, Grindelwald

이른 아침부터 분주히 짐을 싸는 소리가 방을 채웠다. 은근히 덤벙거리는 성격을 소유한 나로서는 짐을 싸는 순간이 가장 긴장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다행히 조립은 분해의 역순이라고 했다. 용도별, 일정별로 당장 필요한 물건들만 꺼내 쓴 덕분에 금세 더플백 지퍼를 잠글 수 있었다.


07:30에 숙소 커먼룸에서 집합한 후 어제와 메뉴는 같지만, 어제와 같이 만족스러운 조식시간을 가졌다. 이틀간 따뜻한 추억을 만들어준 숙소를 뒤로하고 그린델발트 역으로 향했다.


이날의 목적지인 체르마트까지 이동소요시간은 약 3시간으로 꽤나 긴 여정이었기 때문에 발걸음을 재촉했다. 많은 이들에게 토블레론 초콜릿 겉포장지 속 산으로도 알려진 마테호른(Mattehorn)의 발치에 자리한 작은 마을이다. 이 마을에는 여러 가지 수식어가 붙는데 '스키마을'과 '청정마을'이 대표적이다.


매년 2백만 명의 스키어와 보더들이 찾는 이곳에는 53개의 리프트, 스위스와 이탈리아를 넘나드는 장정 200km의 (겨울시즌 기준) 슬로프들이 상시대기 중이다. 한 가지 더 특이한 점은 체르마트 안에는 자동차가 없다는 점이다. 환경보호를 위해 법적으로 자전거나 전동카트와 같은 친환경적 이동수단만 허용되어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체르마트에 있는 동안 ‘클린 앤 깔끔’한 공기로 폐 양쪽을 가득 채웠다.


체르마트.zip


기차에서 내려 바라본 체르마트의 첫인상은 "여기서 스키를?"이었다. 형형색색의 스키와 스노보드들이 수많은 인파의 머리 위를 둥둥 떠다니긴 했지만 정작 스키를 탈만한 슬로프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대한민국의 스키 리조트라 함은 대형 가로등이 양옆으로 쭉 늘어선 광활한 눈 (어쩌면 얼음) 비탈길이 떠오르게 한다. 그런데 체르마트는 아니었다.


관광객들과 스키 관련 용품샵이 즐비하다는 점을 빼고는 그린델발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중앙에 넓은 도로를 중심으로 골목길들이 뻗어져 나간 골목길들의 사이 블록들을 거주공간이나 음식점, 펍들이 채우고 있었고, 중앙에 위치한 광장에는 큰 아이스링크와 꽤나 본격적인 아이스 하키장도 잘 구비되어 있었다.


아이스 하키장에서는 동네 주민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한창 경쟁을 즐기고 있었다. 어림잡아 15살 정도 되어 보이는 금발 머리소년의 유려한 스케이팅 실력이 세 남자의 눈길을 끌었다. 그 친구도 우리의 시선을 느낀 걸까, 기대에 부응하듯 연달에 득점을 성공시켰다. 그렇게 남들 재미있게 노는 모습을 구경한 지 십여분쯤 흘렀을 때 문득 내가 운동장에서 공 차며 놀듯이 여기 사람들은 하키 퍽을 치며 노는 것이 '일상' 이겠구나 싶었다. 스위스에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순간이었다.


하키보이.mp4


스위스에는 가볼 만한 도시가 무지 많고, 각 도시들에는 도무지 하루 안에 다 정복할 수 없을 정도로 보고 즐겨야 할 것들이 많다. 다양한 경험들로 채워진 목적지도 좋지만 항상 숙소로 돌아오면 무엇을 봤었는지 가물가물하고, 어디는 못 가봤고, 또 어떤 건 못 해봐서 아쉬웠던 기억이 많다. 체르마트는 '스키마을'. 즉 본질이 마을인 이곳은 우리들에게 '스키'와 '일상' 딱 두 가지를 던져주고 즐길 것을 강제했다. 많은 것들에 휩쓸리는 여행이 아니라 확실한 콘셉트를 가지고 느긋하게 보내는 일상 속에서 소소한 재미를 발견하는 여행을 해보고싶다면 체르마트를 리스트에 적어두어도 좋을 거 같다.


Day 4: Zermatt 101

2023.01.04 06:00 @ Airbnb, Zermatt

본편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여기서도 숙소 자랑을 해야겠다. 우리는 지긋한 인상의 할머님이 운영하시는 에어비엔비를 예약했는데 우리가 묶은 플랫은 5층 건물의 맨꼭대기였다. 넉넉한 투룸에 마을 외곽 쪽에 위치했지만 오히려 쿱(Coop)세권을 보장했고, 힘들게 올라온 계단의 수에 대한 보상으로 마(Mattehorn)세권을 선물했다. 무엇보다도 야밤에 신라면 그런데 이제 마태호른을 겯들인을 먹겠다는 우리를 위해 손수 물도 끓여주신 호스트도 우리 숙소의 특장점이었다.




체르마트 숙소 예약 노하우는 빨리하는 거다. 정말 '빨리'하는 거. 더 좁은 면적에 더 많은 인파가 몰리는 곳이다 보니 숙소가 그린델발트나 타 여느 지역보다 일찍 차버린다고 보면 될 거 같다. 우리는 약 7개월 전에 거의 체르마트 마지막 숙소 방문을 닫아버렸으니 1년 전부터 예약한다고 해도 유난은 아닌 거 같다.


자, 그럼 이제 우리가 체르마트로 온 궁극적인 목표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스키란 종종 추억 속 어딘가에 존재하는 친숙한 종목이지만 오랜 기간 동안 꾸준히 타 온 사람이 아닌 경우가 다반수다. 나도 그런 사람들 중 한 명으로, 죽지 않고 탈 수 있는 딱 그 정도 수준이다. 스위스에서 즐기는 겨울 익스트림 스포츠에 대한 걱정을 없어버리기 위해 여러 사이트와 블로그를 참고했다.


[슬로프 난이도]

스키 꽤나 타보신 분들의 블로그를 보면 체르마트의 슬로프 난이도는 한국 스키장의 상, 최상급 코스 난이도라고 한다. 그러나 포기하긴 이르다. 본인의 경우 급정거용 대문자 A 자세, 심각한 경사용 소문자 a 자세, 그리고 완만한 경사용 S 자세를 탑재하고 있다. 그리고 이 글을 쓰고 있다는 건 살아남았다는 거다.


Zermatt Slopes Map

일단 체르마트 슬로프들은 난이도 별로 나뉘어 있다. [파란색]-[빨간색]-[검은색] 순으로 어렵다. 나는 파란색 코스들에서 상주했다. 개인적으로 파란색 코스들은 국내 스키 슬로프 중, 상 정도 수준이라고 느꼈다.

파우더 스노우로 덮인 슬로프를 활강하면 "가가각" 하는 무서운 소리가 아닌 "뽀드득" 소리가 나는 점이 심리적으로 묘한 안정감을 주었다. 또 슬로프의 길이뿐만 아니라 넓이가 매우 넓은 탓에 사람의 밀도가 적어 오히려 마음에 여유가 생길뿐더러 나 빼고 다 잘 탔다. 믿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6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들도 스키를 타는데 '잘'탔다. 모든 분들이 알아서 피해 가셨기 때문에 오로지 나 자신에게만 집중하면 되었다. 마지막으로 스키를 타면 보이는 마테호른 절경은 웬만한 리스크를 상쇄시킬 정도로 가치가 있다고 단언한다.


[리프트 티켓]

리프트 티켓의 경우 아래의 사이트를 참조하는 게 가장 편하고 확실하다. 특정 난이도의 슬로프만 탈 수 있거나 시간대별, 또는 이탈리아 쪽으로 넘어갈 수 있는 티켓 등 다양한 상품들을 비교해 보고 본인의 기호와 여건에 맞는걸 마음속으로 정하면 된다. 티켓팅은 당일날 매표소에서 해도 전혀 문제가 없다.



사이트: https://www.matterhornparadise.ch/en/information/tickets-prices



[장비 렌털]

장비 렌털의 경우 크게 세 가지 옵션이 있다.

1. 숙소 근처 렌털샵 방문.

2. 숙소와 연계된 렌털샵 있는지 확인.

3. 온라인 렌털.

불확실성을 배제하고 싶은 J는 온라인 렌털을 선택했었다. 여러 렌털샵이 있었는데 리뷰도 많고, 시설도 크고, 합리적인 가격으로 정찰제를 운영하고 있는 아래의 렌털샵을 선택했다. 실제로 직원들도 상당히 친절했고 매장에 방문했을 때 사이즈 피팅부터 상담, 수령까지 디테일하게 챙겨줬다.



사이트: https://www.bayardsport.ch/en



Day 4: Skiing, but also searching...

2023.01.04 08:30 @ Ski Lift, Zermatt

숙소에서 리프트 입구까지 가는 방법은 구글링을 해도 좋고 주변 군중들을 따라가는 것도 꽤나 정확한 방법이다. 일찍이 준비를 마친 우리는 전날 사두었던 아침을 먹고 숙소를 나섰다. 걷기를 10여분쯤, 전기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전기버스 안은 리프트로 향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중에서도 소속 스키 클럽 단체복으로 보이는 짙은 파란색의 몽클레어 하드쉘을 입고 스키를 타러 가는 남매(추정)가 기억에 남았다. 마치 뒷산에 마실 나가는 것처럼 여유로우면서도 단호한 눈빛을 보자 하니 미래의 올림픽 스타의 스키 조기교육 현장을 목격한 것은 아닌가 싶었다. 리프트 입구에서 미리 정해두었던 티켓을 구매한 후 웅장한 터널을 지나 박스형태의 리프트를 타고 또 한 번 한참을 올라가고 나서야 광활한 슬로프로의 입장이 허락되었다.


워낙 오랜만에 타는 데다가 이렇다 할 펜스도 곳에서 얇고 긴 판때기 두 개에만 의지해야 한다는 생각에 준비운동을 철저히 하기로 했다. Willy's Park라는 초초초보자용 시설에서 감을 조금 익힌 후에야 본경기에 투입할 수 있었다.


첫 활강의 기억은 주변 경치보다는 흰색 눈밭과 내 처절한 A의 꼭짓점이었다. 급커브 라든가 급경사 등 여러 가지 변수들을 극복하는 데에 온 신경을 집중했던 탓이었다. 두 번째 탈 때는 완만한 공간에서 거대한 마태호른을 바라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고, 세 번째 즈음되자 타고 내려가다 식당에 멈춰 물도 마시고 풍경과 그 안에 함께 있는 사람들도 구경할 수 있었다. 네 번째 라이딩을 위해 리프트를 타고 올라가면서 눈앞에 펼쳐진 장관을 카메라에 담으려 애썼다. 스키도 점점 재미있어지고 사진도 찍기만 하면 작품이라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싶을 정도였다.


고마워요 H씨.mp4


아마도 그래서, 너무 행복해서 그랬던 걸까? 불행은 항상 예고 없이 찾아왔다.


정신차려 과거의 나.zip


리프트에서 내리려 하는데 아뿔싸, 오른쪽 손목에 걸려있어야 할 스키폴대가 없었다. 머릿속이 마터호른의 눈밭처럼 새 하얘졌다. 슬로프를 천천히 타고 내려가며 스캔, 다시 리프트를 타고 올라오며 스캔, 스키부츠 신고 타라는 스키는 안 타고 하이킹하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위에서 리프트 타고 가는 친절한 사람들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보이지가 않았다.


무겁고 딱딱한 스키부츠가 선사하는 도트 대미지에 곧 상당한 멍청비용을 제출해야 한다는 생각에 짜증이 밀물처럼 몰려왔다. 다행히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선택한 다른 코스에서 눈밭에 꽂꽂하고 굳건히 꼽혀 나를 기다려주고 있는 폴대를 만났다. 참 고마운 일이었지만 이미 몸도 마음도 지칠 때로 지쳐버렸었기에 그대로 숙소로 복귀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더 타기나 할걸 하는 생각도 들지만, 이 날의 체르마트는 나에게 좋은 교훈을 주었다: '스키폴대 끈은 꼭 손목에 두번감아 매듭 지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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