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1시. 피곤한 몸을 뉘었다. “하이 빅스비, 오늘 오전 5시 30분 알람 맞춰줘.” 운 좋게 바로 잠이 든다면 4시간은 잘 수 있을 것이다. 벌써 오늘이 되어버린 내일 아침, 나는 안동 가는 KTX를 탈 예정이다. 그러고 보니 안동은 꽤 오랜만인데, 예전에 지인과 동행하여 몇 번 여행을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별생각 없이 뒤를 따랐던 탓인지 하회마을과 병산서원 정도가 기억에 남아있을 뿐이다. 갑작스럽게 여행을 떠나게 된 것은 순전히 날씨 때문이었다. 계절의 여왕이라는 5월, 집에만 머물기엔 햇살이 너무 아깝지 않은가. 인근 기차역에서 출발해 한 번에 가닿을 수 있는 멀지 않은 곳을 찾다가 나는 덜컥 안동행 티켓을 예매하였다.
오전 9시 30분 안동역에 도착해 관광안내소에 들러 지도와 주요 관광지로 가는 버스 시간표를 받아 들었다. 혼자 떠난 여행은 서두를 일이 없어 좋다. 무엇을 하든 내 속도에 맞춰 선택하면 그뿐. 느긋하게 아침을 먹고 차를 마시며 목적지를 정하기로 했다. 친절한 안내원의 설명으로 예전에 재미있게 보았던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촬영지인 만휴정이 안동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극 중 남녀 주인공이 ‘러브’를 시작했던 장소이다. 풍경도 장면도 인상적이었던. 그래, 그곳으로 가자!
묵계리에 있는 만휴정은 안동역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1시간을 더 달려야 한다. 중간 경유지인 길안 정류장에서 버스를 갈아타기 위해 잠시 내렸다. 대합실에 들어서자 안에 계시던 한 어르신이 불쑥 혼자 들어선 여행객이 궁금했는지 어디서 왔느냐, 어디로 가느냐 물으신다. 당신이 살아온 이야기며 경치 좋은 마을 자랑을 하다가 종국에는 정류장 처마 밑에 집을 짓고 있는 제비 두 마리까지 소개해 주었다. 새들이 얼마 전부터 둥지를 틀고 있는데 사람은 한 채도 갖기 힘든 집을 나란히 두 개나 짓고 있다며 웃으시다가는, 혹시 어느 날 뱀이 벽을 타고 오르지 않을까 걱정이라는 말씀을 덧붙이셨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제비들이 부지런히 집 짓는 모습을 함께 지켜보았다. 햇살 눈부신 날, 시골의 작은 정류장에서 처음 만난 이들이 한마음으로 제비 가족의 안녕을 바라고 있자니 마음이 훈훈해졌다.
만휴정은 버스에서 내린 후 10분 남짓 더 걸어야 한다. 5월인데도 기온은 벌써 25도를 웃돌았다. 입고 있던 얇은 점퍼를 벗어 들고 셔츠의 소매도 쓱쓱 걷어 올렸다. 더운 날씨에 ‘아이고, 뚜벅이 여행도 이제는 힘들겠구나.’ 생각하며 슬슬 발걸음이 무거워지려는 때, 매표소가 있는 산 들머리에 도착했다. 신기하게도 주변의 온도가 서늘하게 확 바뀌었는데 땀 흘리며 찾아온 여행자를 애썼다 환대하는 듯했다. 산뜻한 기분으로 산길에 들어서자 곧 깎아지른 바위에서 힘차게 낙하하는 폭포가 나타났다. 깊은 산세가 아님에도 이런 계곡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고 놀라웠다.
계곡을 가로지르는 좁은 다리 건너편에 만휴정이 있다. 작은 정자지만 단아하고 용마루에서 흘러내리는 내림마루의 곡선은 우아하다. 나지막한 담 안쪽 의자 옆에는 주먹만 한 하얀 꽃이 주렁주렁 매달린 불두화가 탐스럽게 피어 있었다. 드라마 속 남녀 주인공의 자취를 따라 이곳에 왔을 연인들이 눈을 맞추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아름다워 보였다. 계곡과 정자가 그림같이 어우러진 곳에서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나도 한 자리 차지하고 오래 머무르고 싶었으나 아쉽게도 버스 시간이 가까워져 돌아서야 했다. 부리나케 정류장으로 돌아오니 두세 명의 승객을 태운 시내버스가 대기하고 있었다. 버스에 올라 다시 지도를 꺼내 들었다. ‘이제 어디로 갈까.’
나는 어린 시절에도 걷는 것을 좋아했다. 처음엔 큰길을 따라 걷다가 이내 작은 샛길에 마음을 빼앗겼다. 저 길은 어디서 오는 것인지, 저 너머에는 무엇이 있는지 궁금하여 길에서 벗어나곤 했다. 지금도 여전히 그런 여행을 즐긴다. 자유롭게 내키는 대로 걷고 길 위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난다. 이런 것들이 나의 여행을 풍성하게 한다. 다음 코스로 들렀던 메타세쿼이아의 반영이 아름다운 낙강물길공원과 안동댐 아래 낙동강에 걸친 월영교, 월영정도 인상적이었다. 월영정에 서서 시원하게 펼쳐진 물길을 바라보았다. 석양이 물들어 가는 따뜻한 빛깔도 그대로 풍경이 됐던 하루. 내 발로 꼭꼭 밟으며 천천히 여행한 덕에 안동에서의 추억이 하나씩 더해져 간다. 나의 5월에 또 하나의 이야기가 채워졌다.
(2023. 5.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