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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Sep 25. 2023

일상으로 떠나는 여행

2023년 3월, 기온이 20도를 훌쩍 넘겼다. 입춘은 이미 지났다지만 아직은 찬 공기가 오히려 자연스러운 계절이 아닌가. 연일 계속되는 고온의 날씨에 꽃들만 분주해졌다. 보통 2월에 매화와 목련이 피는 것을 시작으로 개나리 진달래가 뒤를 잇는다. 삭막했던 풍경에 들어온 노란색, 분홍색 고운 빛깔이 스러질 때쯤 벚꽃이 만개했었다. 매너 있게 순서를 지키며 찾아오는 꽃들에게 “잘 가, 안녕!, 어서 와, 안녕?”하는 인사를 건넸었는데 올해는 들이닥치듯 한꺼번에 피어 버렸다. 무채색의 풍경이 며칠 사이에 봄이 낼 수 있는 모든 색깔을 폭발시켜 버린 것이다. ‘지구가 너무 아파’ 걱정이 되던 마음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희귀한 장면을 즐기려는 욕심에 밀려나고 말았다. 이런 마음을 가진 것이 비단 나뿐만은 아닌 건지 주말이면 상춘객들로 인근 도로가 가득 찼다.


나도 봄을 만끽하러 떠나고 싶었다. 꽃들의 화려한 군무가 오래 기다려 주지 않을 듯해 마음이 조급해졌다. 매일 산책에 나서면 하루하루 달라지는 꽃망울의 자태가 어서 길을 나서라고 재촉하는 듯했다. ‘어디로 가볼까’ 고민하며 오늘도 산책에 나선 길, 평소에는 한적하던 우리 동네 산책로가 꽤 많은 사람으로 붐비고 있었다. 언뜻 보아도, 익숙한 동네들이 아니다. 아마도 서둘러 피어버린 산책로의 아름드리 벚꽃 나무가 그들을 이곳으로 불러들였으리라. 내가 매일 걷던 이 길이 즐거운 여행길인 듯 어울려 사진을 찍는 표정이 행복해 보였다.    


내가 사는 양평은 벚꽃 피는 계절이 아름다운 곳이다. 봄이 되면 드라이브를 즐기거나 아껴가며 천천히 걷고 싶은 멋진 길이 곳곳에 있다. 그중 ‘물소리길 4코스’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이다. 이 길은 갈산공원에서 시작되는데 초입에서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강을 따라 걷는 오솔길(물소리길)이고 다른 하나는 양쪽으로 벚나무가 늘어선 자전거 도로이다.

나는 보통 오솔길에서 걷기 시작한다. 강가에는 버드나무가 싱그러운 새순을 달고 긴 나뭇가지를 늘어뜨리며 서 있고 새들은 햇빛 부서지는 강 위에서 자맥질을 한다. 호젓하게 강변을 걷다가 중간중간 설치된 계단을 통해 언제든 벚꽃 나무 길(자전거 도로)로 합류할 수 있다. 벚꽃이 피면 모든 구간이 아름답지만, 특히 이 길의 끝에서 만나는 앙덕리가 정점이다. 그곳의 벚나무는 수령이 오래되어 가지가 풍성한 덕에 멋진 나무 터널을 만들어 낸다. 하늘에 촘촘히 박힌 꽃별 아래를 걷노라면 탄성이 터져 나온다. 올해는 이 길을 조카와 걸었다. 대학생인 조카의 중간고사 기간이 매번 벚꽃 개화 시기와 맞물려 아쉬웠는데 올봄엔 꽃들이 일찍 핀 덕분에 같이 볼 수 있었다. 꽃만큼이나 고운 아이가 웃는다. 꽃도 젊음도 빛나던 4월, 이곳으로 여행을 온 사람들 속에서 나도 여행자가 되어 함께 웃었다.


작년 가을, 서울에서 진행된 한양도성 투어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혜화문에서 시작해 산성을 따라 걸으며 숭례문까지 가는 코스였다. 당일 출발점에 집결해 보니 맙소사, 과거에 내가 몇 년간 살았던 동네가 아닌가. 바로 집 앞에 그리 멋진 곳이 있었는데 그때는 영 모르고 살다가 정작 멀리 떠난 후에야 여행지로서 다시 찾아가게 되다니. 돌아보면 지금껏 나의 시선은 항상 먼 곳을 향해 있었다. 일상이라는 이름으로 내 곁에 있는 것들을 무심히 흘려보내면서. 어쩌면 우리는 미지의 어딘가에서 출발해 지구별에 도착한 여행자가 아닐까? 그렇다면 내가 있는 곳이 어디든, 그곳이 곧 나의 여행지일 터. 이제라도 익숙함 속에 감춰진 보물 같은 핫플레이스를 찾아 일상을 탐색해야겠다. 더군다나 지금은 아름다운 자연이 등을 떠밀어주는, 무엇을 하기에도 좋은 계절이 아닌가.          


                                                                                                                                                       (2023. 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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