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무 Sep 29. 2023

나를 만나러 갑니다

더는 견딜 수 없었다. 멈춰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렇게 했다.


오랫동안 그림을 가르쳐 왔다. 내게는 제일 쉽고 제일 잘하는 일이라 어려울 것은 없었다. 그림 그리기를 그만둔 지는 십수 년이 지났고 그림을 그린 세월은 그 이상이지만, 한순간 붓을 꺾어 버렸다. 계속 새로운 것을 고민하고 시도하며 작품을 하는 일이 짓눌릴 만큼 피로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느 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버렸다. 이후로는 남을 그리게 하는 일을 했다. 조금 무료지만 특별히 나쁠 것은 없었다. 그럼에도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이유를 알지 못한 채 지쳐갔다. 무언가 견디기 힘든 압박이 커지던 중에 문득, 그림을 배우고 있는 사람들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작업에 몰입해 있는 눈동자는 빛이 났고 수업 시간이 다 끝나도록 그들은 손에서 연필을 놓지 못했다. 나에게는 고통스러웠던 일을 하며 그들은 행복해하고 있었다. 무엇이 그들을 웃게 하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2020년부터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일을 쉬어야 하는 상황이 많아졌다. 친구들도 만나기 어려워지고 여행을 다니지도 못하면서 비자발적 칩거 생활이 시작되었다. 종일 티브이를 틀어 놓은 채 하루를 소진했고 무력감에 책은 펼칠 수도 없었던 시간들. 다시 일을 시작하게 된 후에도 무력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삶에서 ‘재미’가 사라진 것은 대체 언제부터였을까. 일 년만이라도 하고 싶은 일을 하며 놀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익숙한 일상을 멈춰버렸다. 희미해져 버린 자아가 원하는 것들로 나의 시간을 채워주고 싶었다.

     

우선, 좋아하는 여행을 잘할 수 있도록 ‘여행작가학교’에 등록했다. 나와 비슷한 관심을 가진 이들과 교류하며 신나게 글을 쓰고 사진을 찍었다. 그 과정에서 글쓰기의 즐거움을 알게 되었고 이는 수필창작 수업을 듣는 것으로 이어졌다. 여행 작가가 진행하는 여행 기사, 여행 에세이 쓰기 과정도 연달아 수강을 신청하여 계속해서 관련 글을 쓰고 있다. 잠잘 시간을 줄여가며 공부하던 시절은 이미 20여 년 전에 끝이 났는데, 지금 그런 삶을 다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시간을 낼 수 없어 미루기만 했던 도예 작업과 시 낭송도 병행하고 있으니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이 이어진다. 신기한 것은, 너무 많은 일정으로 피곤하긴 해도 지금이 나쁘진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나는 예전보다 생기가 있고 활기차졌으며 조금씩 성장하고 있다고 느낀다. 무엇보다도 글을 마감하고 도예 작품을 완성하는, ‘결과를 내는 행위’ 자체가 큰 의미가 되고 있다. 이 과정을 통해 깨달았다.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 삶이, 나는 오랫동안 참을 수 없을 만큼 힘들었구나.


예전엔 끊임없이 창작하는 것이 버거워 떠나 버렸는데, 지금은 어떤 결과도 내지 않는 삶이 너무 무료해 견디기 힘들어지다니. 그렇다고 이제 와 지난 시간을 후회하진 않는다. 살아온 인생 중 어느 구간에서의 선택이 비록 아쉬움은 있을지언정 옳고 그름은 없으니 그저 지금 움직이는 것으로 족하다. 행동하지 않으면 생각만으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비워야 채워지는 것들이 있다. 멈춰야 시작되는 일들이 있다.


시간이 흐른다. 6월이 끝나간다. 그때는 정신없이 몰아치는 일들이 어느 정도 마무리될 것이다. 그러면 바빠서 놀아주지 못했던 반려견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낼 것이고, 가족과 더 자주 식사할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일을 시작해야지. 나는 다시 그림을 그려보려 한다. 어쩌면 그림을 배우 사람들처럼, 이제는 나도 작업의 과정을 즐길 수 있지 않을까. 신명 나게 살고 있는 2023년이 끝날 때쯤, 나는 어떤 태도와 모습을 갖게 될그날의 내가 궁금해진다. 그날의 나를 만나기 위해 오늘도 재밌고 신나게 하루를 산다.

   

(2023. 6. 14.)

작가의 이전글 어느 5월의 하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