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 없는 식물원
나는 그림을 그리는 일을 업으로 하고 있다. 몇 년 전 모 창작 사이트에서 ' 주인 없는 식물원 '이라는 채널 아래에 여러 가지 작품들을 게시했었다. 이유는 모르겠다. 단지 그 이름에 사로잡혔던 탓이다. 3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생각을 해보면 난 어릴 적부터 식물을 좋아했었고 그 초록빛을 좋아했었고 꽃에서 나는 향을 좋아했다. 어떤 식물은 아름답지만 어떤 식물은 신기했다. 그 모든 것들이 무의식 중에 ' 식물은 신비롭다 '라는 인식을 주었던 것 같아서 문득 그런 이름을 떠올린 것 같다.
주인이 없다는 의미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어떠한 것에 얽매이는 것이 싫다는 의미이다. 물론 식물이 자라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누군가는 관리를 한다. 물을 주고 진딧물을 제거하고 온습도를 조절해주어야 하며 햇볕의 영향을 많이 받는 까다로운 아이들을 위해 여러 조건을 맞춰주어야 한다. 이러한 면에서 주인은 결코 나쁜 사람이 아니다. 이처럼 주인이 없는 식물원이 있다면 점차 식물은 관리가 안되고 생명의 유지가 어려워진다. 관리 대상이 아니었던 이름 모를 잡초들이 불청객처럼 자라나 공간을 잠식해 버릴지도 모른다. 이건 어디까지나 현실적인 문제이다.
수국은 한 가지 꽃에서 세 가지 색의 꽃을 피운다. 과학시간에 배운 산성 용액과 염기성 용액을 떨어트려 관찰했던 리트머스 시험지처럼 수국은 자신이 흡수한 물의 산도에 따라 다른 색 꽃을 피운다. 산성일 때에는 푸른 꽃, 염기성일 때에는 붉은 꽃, 중성일 때에는 하얀 꽃. 또한 비료성분에 따라서도 꽃의 색이 변한다. 질소 성분이 적으면 붉은색, 질소 성분이 많거나 칼륨성분이 부족해도 파란색이 된다. 이 조건을 바탕으로 계란껍데기를 말리고 곱게 갈아 화분에 뿌려두어 파란색 수국을 붉은색으로 바꿀 수가 있는 것이다. 내가 마음만 먹는다면.
나는 주인이 없는 식물원의 식물들이 더 이상 누군가의 손길에 의해 길들여지길 원치 않는다. 원하는 방향대로 어디까지나 가지를 뻗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색을 만들었으면 좋겠다. 글이든 그림이든 계속해서 추구하는 그대로 나아갔으면 좋겠다. 나는 이곳에서 글을 쓰는 사람이겠지만 동시에 내 글을 읽는 독자이며 관찰자이다. 그래서 내가 쓰는 글들이 누군가에겐 보이겠지만 그것이 경직되어 다듬어진 모습이 아니길 빈다. 가지치기를 하지 않은 나무들과 담장을 넘어가는 담쟁이넝쿨, 사람들의 발길에 휩쓸리고 차여 길을 덮어버린 마른 잎사귀들처럼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이지만 난 이제 그 모습들을 인정하고 사랑하고 싶다. 이곳에 있는 하나의 이름 없는 식물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