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실에서 아파트 외벽 도색 공사가 진행 중이니, 창문은 닫고 커튼을 치라고 한다. 입주 11년이라 외벽 안전 검사를 하더니 페인트칠까지 하나보다. 난 방들과 거실 블라인드를 내리고, 부엌 창 쪽으로 갔다. 시작하려면 30분 정도 남았는데 벌써 동아줄이 창틀을 때렸다. 창문을 닫으려다 창밖에 줄을 타고 내려오던 내 새끼손톱만 한 검은 거미와 눈이 마주쳤다. 난 ‘저리 가’라는 손짓을 하며 창문을 닫았다. 눈동자를 돌리던 거미는 줄을 타고 위로, 난 블라인드 줄을 아래로 당겼다.
위로 올라갈수록 사람들은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데. 거미는 위급하다 느끼면 위로 가는 걸까.
이곳은 아파트가 들어서기 전까지 하천을 끼고 있는 나대지였다. 잡초가 무성한 하천과 나대지가 만나 벌레들의 천국이 되었을 거다. 그런 곳에 1,600 가구가 넘는 건물 숲이 들어서면서 벌레들은 터전을 잃었다.
입주 후 창문을 굳건히 지키고 있는 방충망을 뚫고 불빛을 향해 돌진하던 날벌레 떼. 하얀 벽지 위에 덕지덕지 붙어있던 지긋지긋한 것들. 커튼을 치고 전등을 켜도 날아왔다. 심지어는 텔레비전 불빛에도 날개를 퍼덕거리며 거실 벽을 찾았다. 평온한 자기들 세상으로 갑자기 날아든 인간들에게 계속 시위를 했다. 그런 벌레들에게 관리실과 입주민들은 방역으로 대응했다.
잡초 무성하던 하천은 아이들 물놀이 장소가 되었다. 어른들은 물을 바라보며 아이들도 돌보고 쉬는 시간도 가졌다. 창틀에 실 뭉텅이처럼 있던 벌레 사체들이 차츰차츰 사라졌다.
우리 집은 정남향 27층이다. 거실 창 쪽으론 여수 가는 길이 보인다. 내가 출근하던 길이다. 퇴직 후 가끔 눈을 가늘게 뜨고 그 길을 바라봤다. 출근 시간에 쫓겨 운전하던 내 모습이 떠올라 여유로운 지금이 고맙기도 했다. 거실과 일직선인 부엌 쪽 창문 오른쪽으론 골프장. 창 맞은편 하천, 4차선 도로를 건너면 5~6년 된 아파트. 해가 져도 집이 밝은 이유 중 하나다. 이런 집 벽을 타고 거미가 살고 있다니.
부엌 블라인드 사이로 외벽 페인트칠을 위한 줄이 흔들거린다. 한 손엔 페인트 통을 든 남자분이 줄을 타고 내려온다. 30층에서부터 내려오는 중일 텐데 거미는 만났을까. 줄을 타고 바삐 올라가던 거미는 내려오던 저분을 만나 무슨 말을 전했을까. 27층엔 ‘저리 가’ 손짓하는 대범한 여자가 있으니 눈 마주치지 말라 경고했을까.
난 오래간만에 거미와 눈을 맞췄다. 블라인드가 내려진 집안은 캄캄하다. 어둠 속식탁에 앉아 문득 나비, 개미, 거미의 먹거리를 위한 행동이 떠올랐다. 나비는 먹이를 찾아 이리저리 날다가 암술과 수술을 만나게 해 꽃, 열매를 맺게 한다. 부지런한 개미는 자신 덩치보다 큰 먹이를 발견해도 끌고 가 동료들과 나눠 먹는다. 게으른 거미는 거미집을 만들어 놓고 걸려들 먹이를 기다린다. 시간이 지나도 먹을 게 걸려들지 않으면 자리를 옮겨 새집을 짓고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고 한다.
이 셋 중 난 어디에 속할까. 나를 훨훨 날고 싶게 하는 나비. 불평불만 없이 자신보다 더 큰 먹이도 끌고 가는 개미. 사람들 눈에 띄면 곧 거둬질 거미집을 만들어 놓고 가는 목을 길게 빼고 기다리는 거미.
모르겠다. 혼자 앉아 별 희한한 생각을 했다. 그저 난 나일뿐인데. 블라인드 사이로 보이던 분은 보이지 않고 줄만 계속 흔들거린다. 외줄을 타고 고개를 쳐든 채 색칠을 하고 계실 저분은 아래쪽을 내려다볼까. 바닥을 내려다본 순간 줄이 더 흔들거릴 것만 같다. 어서 외줄을 동여매야겠다. 난 블라인드를 올려 창문을 열었다. 27층 벽 모서리에 있을 거미집을 향해 소곤거렸다. 외줄 주변에 거미집을 만들어 움직이는 줄을 잡아 달라고. 내 손사래에 삐진 거미는 아는 체도 하지 않았다. 색칠된 아파트 외벽에 앉아있던 까치가 거미 대신 날개를 퍼덕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