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 - 『삶은 도서관』(인자 작가)
'소용이 다한 듯한 책을 버리지는 못해서 안 보이는 곳에 대충 쌓거나 끈으로 묶어두는 일.'
그 행위를 누가 떡하니 ‘보존’이라 이름 붙이면, 흠 확실히 뭔가 이상하다. 두 번 죽이는 서글픔이랄까.
서글픈 책들이 말없이 포개져 쌓여 있는 공간. 거기를 도서관의 폐가식 책 창고, 일명 보존서고라 부른다. 대개 지하에 있다.
공공도서관은 규정에 따라 일정 권수의 책을 폐기할 수 있다. 버려야 새 책을 꽂을 수 있으니까. 매년 소장 권수의 7% 이내에서 버릴 수 있다. 근데 대부분 이런저런 이유로 잘 버리지 못한다.
새로 출간된 책이 밀려들고 반납 도서들이 돌아오면 따스한 햇살의 자료실 서가도 점점 빽빽해진다. 서가 칸에서 눈칫밥을 먹으며 로테이션을 돌다 결국은 보존서고로 밀려나야 할 책들이 생긴다. ‘3년 내 대출 이력’ 같은 기준에 미달되거나 재수 없는 민원에 걸려들거나 하면 ‘소용이 다한 책’으로 묶여 빛도 바람도 닿지 않는 지하로 권고사직되는 것이다. 이제는, 겨우 존재하는 법을 익혀야 할 책들.
빛나게 정렬됐으나 어느덧 서글프게 밀려나는 게 어디 책들뿐일까. 변두리의 소도시들이 그렇고, 그보다 더 작은 지역도서관 속 시시콜콜한 업무 같은 것도 그래 보인다. 뭣보다 그런 도서관에서 마주치는 이용객들 역시 세상의 중심에서 비켜 선 채 겨우 숨 쉬는 엑스트라처럼 보인다.
지역도서관 도서대출 업무를 담당하는 포도송이(인자) 작가의 시선은 그렇게 간신히 존재하는 것들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그것들의 역주행을 꿈꾸는 유쾌하고 따뜻한 사연을 들려준다. 에세이 『삶은 도서관』이다.
깔끔한 시설, 사서의 기획력, 내실 있는 독서행사, 혹은 알찬 소장도서가 도서관 실적을 좌우할 거라는 말들은 십중팔구 있어 보이려고 하는 말들이다. 부동산 가격이 ‘기-승-전-대치동 접근성’으로 귀결되듯 도서관 실적도 결국은 입지다. 번쩍번쩍한 야경 따라 이용률과 대출 실적도 번쩍인다.
낮에는 온통 파밭이었으나 밤에는 맵싸한 흙냄새만이 그곳의 좌표를 알려주었다. (…) 내가 사는 동네에서는 삼십 분을 걸어야 겨우 20년도 넘은 햄버거 가게 간판 하나가 보였다. (…)
작은 도시의 출퇴근길은 단조로웠다. 배 과수원과 샌드위치 패널 창고, 서너 개의 주유소를 지나면 옛 지명이 붙은 사거리가 나왔다. H빔 뼈대만 앙상한 공사장과 장례식장, 유소년 축구장을 지나면 도서관에 도착한다.
40대 중반까지 대도시에서 교육기업 홍보부장을 지내다 권고사직한 그녀에게 도서관 대출 업무는 어쩌면 사소하다. 데스크에 앉아 책을 대출하고 반납 받는 일, 매일 수백 권의 책을 서가에 꽂는 일, 반납 독촉 전화를 돌리는 일, 그 외 소소한 민원을 처리하는 일이다.
어쩌면 사소하고, 누구라도 할 수 있으며, 그저 규정대로만 하면 되는 일들. 중년이 된 나는 그 일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렇게 나는 완전한 작은 도시의 사람이 되었다.
이 도서관으로 찾아든 이들 역시 그렇다. 정수기 컵이 너무 작다며 반짝이는 ‘스뎅 사발’을 고집하던 어르신, 혼자 보겠다며 만화책을 엉뚱한 서가에 숨기는 아이들, 글을 모르시는데 거꾸로 들고서도 책을 보려는 할머니의 초롱초롱한 눈빛. 1년 넘게 쓰던 사물함을 연장하지 않았는데 취업이 된 건 또 아니었던 취준생…. 중심에서 비켜 있지만 매일 같이 쓰고 고치고 도전하는 간절한 눈빛들.
유모차를 끌고 책을 빌리러 오는 할머니들, 여든이 넘어서도 매일 시와 시나리오를 쓰며 신춘문예에 도전하는 어르신들, (…)
정체를 알 수 없는 수험서에 머리를 파묻은 취준생들, 늦은 나이에 자격증 시험에 몰두하는 중년의 남녀들. 이 모든 사람이 작은 도시에서 살아남기 위해, 혹은 언젠가 이 작은 도시를 벗어나기 위해 도서관을 찾는다.
깊고 먹먹한 보존서고의 책은 곰팡이가 피고 눅눅해지기도 한다. 그냥 두면 눅눅해지거나 곰삭은 냄새가 날 지 모를 변두리 도시 속 초라한 도서관, 빛나는 야경과는 동떨어진 시시콜콜한 노동, 그리고 차마 잊히지 못한 사람들. 그들에게 건네는 인자 작가의 관심은, 보존서고의 온기와 습도를 지키려는 항온항습기처럼 애틋하고 따뜻하다.
별밤지기 이문세가 들려주던 사연처럼, 가장 따뜻한 도서 대출은 마음 한 조각을 함께 건네는 대출이라 믿으며 이용자들의 작은 온도 변화를 기억하고 안부를 묻고 싶어 한다. 도서관 이용자들도 마찬가지다. 꿈을 향한 끈질긴 열정과 기꺼운 고독, 그리고 위대한 투지들이 들숨과 날숨을 내쉬며 삶이 여전히 살아 있다고 아우성친다.
작은 도시의 불빛은 뜨겁지 않지만, 나는 이 온기 어린 불빛 아래서 진짜 소중한 것들을 발견하며 살아간다. 도서관에 모여드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일. 아침마다 창틀에 붙은 날벌레를 조심스레 털어주는 일, 그리고 그 모든 순간을 조용히 기록하는 일. 이제는 그 모든 것이 나의 사랑법이 되었다.
‘삶은 도서관’이라는 제목을 들었을 때 흠, 묘하네, 그랬다. 오랜 기억과 묘하게 엮였기 때문이다.
대학 때 학교 중앙도서관의 서가와 서고에서 1년 남짓 근로장학생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그 시절엔 서가조차 직원만 출입할 수 있는 폐가식 운영이 일반적이었다. 쥐 죽은 듯 인적 드문 62만 권의 서가 바닥에 홀로 퍼져 앉아 우연히 펼쳐 든 책에서 그 강렬한 독일어 문구를 접했었다. 오스트리아 언론인 페르디난트 쿨른베르거의 말 칼. “삶이 살아 있지 않다”(독일어를 영역하면 The Living is not alive)
움직여야 움직임이듯 살아 있어야 삶이니 살아 움직이지 못함은 무덤이다. 소용이 다하는 것들을 다시 깨우려는 소중하고 따뜻한 마음 조각들 덕분에 만약 도서관이 살아 움직이는 것들의 만남의 공간이 될 수 있다면, 그렇다. 삶은 도서관이다.
한때는 맨 앞줄에서 빛나던 이들이었지만, 지금은 조용히 밀려날 자리를 걱정하는 나의 남편, 내 친구, 내 친구의 남편들. 하지만 뒤로 물러선다고 해서 존재의 가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삶의 무게를 온몸으로 감당하며 얻게 된 품격은, 오히려 그들의 자리에서 더욱 깊은 빛을 발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