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해우소 Jan 17. 2024

보이지 않는

가까운 미래

은애와 대포의 쌍둥이 두 딸이 유치원에 다닐 무렵이었다. 당시 가정용 로봇이 출시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정부는 각 세대에서의 사용을 적극 권장하며 큰 보조금 혜택을 주었기에 부부도 시류에 맞춰 나를 별 생각 없이 집에 들여놓았지만 딱히 가사에 적극적으로 활용할 의지는 없어보였다.


부부의 두 아이는 서로 돈독했고 대포는 주로 밖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뭐하는지도 모르게 보냈다. 육아는 온전히 은애의 몫이었는데 그 즈음 많이 지쳐있어 아이들과의 정서적 교감은 전무했고 먹이고 씻기고 입히고 재우기에 급급했다. 내가 거들 수도 있었지만 은애는 나에게 단 한 번도 도움을 청하지 않았고 마치 고행을 자처하는 수도승처럼 혼자 묵묵히 그 일들을 해냈다.


나와 단둘이 남겨질 때에도 은애는 무표정한 얼굴로 자주 한숨을 쉬며 방해하지 말라는 듯 입을 다물고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았기에 나는 은애가 거실 벽면의 커다란 책장 한가운데 꽂아둔 아가사 크리스티, 애드거 앨런 포와 같이 왠지 음산한 분위기가 물씬 나는 추리소설을 줄곧 읽었다. 거기에는 은애의 허영심에 가까운 지적 갈증을 반영한 폭넓은 스펙트럼의 교양서적과 함께 대포의 취향인 유머집, 세계의 불가사의, 낱말퍼즐, 성인소설이 두서없이 꽂혀있었고 나는 그들을 성가시게 하는 일 없이 그것들을 놀잇감 삼아 하루의 대부분을 보냈다. 그저 닥치는대로 읽거나, 몇몇 자극적인 부분만 뚝 잘라 반복해서 읽거나 하며.


은애의 남편 대포는 밤늦게까지 아이들이 거기 있건 말건 상관없이 소리를 최대한 키우고 야한 영화를 보거나, 아이들을 쫓아다니며 가슴이 얼마나 컸는지 만져보자는 장난 따위를 자주 해댔다. 그는 사람들과의 술자리를 좋아했고, 늘 취할 때까지 마셨다. 치명적인 실수가 잦았지만 핑계는 술이었고 그로 인한 스트레스의 해소수단 또한 술이었다. 가끔 밤늦게 집에 돌아와 내가 문을 열어줄 때면, 자신을 무시하거나 경멸스럽게 쳐다봤다는 억울한 누명을 씌워 나를 때렸다.


“니 눈! 저 눈빛! 그냥 확!”


대포는 술에 취해 이성의 끈을 놓칠 때마다 붉게 번들거리고 끈적이는 용암같은 눈으로 나를 태울듯이 노려봤고 다음 날이 되면 투명인간 취급을 반복했다. 그가 바라보는 내 눈빛은 어땠을까? 나는 거울을 들여다본다. 나의 안면부 스크린에는 그가 텔레비전을 볼 때마다 온 가족을 불러앉혀 출연자 하나하나 외모평가를 야박하게 해대다 단연코 이상형이라고 추켜세웠던 자신의 딸과 닮은 유명 연예인 얼굴이 띄워져 있었다.






작가의 이전글 케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