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정을 말하면 극대노였던 그녀...
나는 일을 하다가 일이 정말 하기 싫을 때면, 자기계발 전문가들이 치를 떠는 미국 범죄 시리즈 영상들을 틀어놓는다. 또다시 일을 하던 도중, 켜둔 유튜브 범죄 영상에 나온 내용 하나가 그녀에 대한 기억을 불러일으켰다.
나의 나르시시스트 엄마는 내가 자취를 시작하거나, 취업 후 그녀로부터 완전한 경제적 독립을 한 이후에도 나에게 매달 두 번씩은 본가에 방문하라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나의 외할머니, 즉 그녀의 엄마가 매주 방문하라고 해서 자취를 시작한 이후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집에 갔다고 말했다.
그녀가 나와 가까이 살았냐 하면, 그렇지 않았다.
나는 여의도에서 자취를 하는 중이었고, 그녀는 발령을 받아 지방 도시에서 거주 중이었다. 취업 후 발버둥 치는 나에게 그녀는 매주 내려오지는 못하더라도, 2주에 한 번은 왕복 네 시간이 걸리는 그녀의 집으로 오라고 들들 볶았다.
볶은 정도가 아니었다. 절규에 가까운 울음을 토해내며 나를 맹비난할 때가 더 많았다.
그럴 필요도 없었지만, 가스라이팅 당한 아이였던 나는 그녀가 말한 두 번을 채우지 못한 달에는 심한 죄책감에 빠지기도 했다. (매 달 그렇지는 않았다.)
지친 몸을 이끌고, 그나마 차가 막히지 않는 금요일 저녁 시간에 내려가면, 몇 시간의 화기애애한 시간 이후 나는 그녀가 쏟아내는 나에 대한 맹비난과 분노를 버티지 못하고 새벽에 차를 몰아 서울로 올라오기를 수십 번 반복했다.
그때 차 안에서—
“내 엄마는 왜 저런 사람인가. 내가 정말 잘못한 건가. 왜 나는 이토록 힘들게 주말마다 살아야 하는가.”
피로감에 쩌든 채, 운전석에 앉아 듣던 플레이리스트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나는 내가 그래도 착한 딸이라고 생각했다.
그 새벽, 그녀가 뱉은 말들에 상처받은 채 눈물을 흘리며 아무도 없는 낯선 지역에서 차에 몸을 싣고 집으로 향하던 중, 그래도 혼자 낯선 지역에서 발령받아 살고 있을 엄마가 외로울 거라 생각하며, 서울로 향하던 고속도로 진출로 직전에서 다시 그녀의 집으로 운전대를 돌린 날도 많았다.
집으로 돌아온 나를 보며 좋아하던 그녀의 웃음. 그 웃음 뒤에는, 안도감과 기쁨보다 “역시 넌 나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나르시시스트의 승리감이 숨어 있었을 것이다.
그때는 몰랐다. 그녀가 내가 집을 박차고 나오기 전, “부모에 대한 고마움과 사랑 따위는 없는 나쁜 년”이라는 말을 내뱉으며, 내가 다시 집으로 핸들을 돌리도록 만들었던 거라는 걸.
나는 내가 나쁜 딸이라고 생각했다.
엄마가 내뱉는 심장을 베는 말을 듣고도 다시 집으로 돌아간 이유는, 엄마를 자주 보러 내려가지도 않으면서 엄마의 말에 대꾸하고 화를 낸 몇 분 전의 기억이, 엄마가 이미 난도질해놓은 내 마음의 상처들보다 더 아프게 내 마음을 찔렀기 때문이다.
내가 주말에 소개팅하는 남자들 중 의사, 변호사가 있다고 넌지시 말한 이후로 그녀의 이런 압박은 줄어들었다.
정말 단순했던 나의 나르 엄마.
그녀는 아마도 전혀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더 이상, 시간에 의해 희미해져 버린 그녀와의 기억 때문에 쓸데없이 그녀를 추억하지 않는다. 연을 끊은 이후에 좋게 미화된 그녀에 대한 내 기억을 믿지도 않는다.
이제는 실수로라도 그녀에게 안부 인사를 보낼까 하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나는 원래 모든 사람이 본디 좋은 사람이고, 누구나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실수 이후에도 몇 번의 기회만 주어진다면 나아질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녀와 연을 끊기 전, 이후, 그리고 지금까지 그녀와의 일들을 통해 나는 세상에는 절대로 변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강하게 믿는다.
나르시시스트.
바로 내 엄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