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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angerine Aug 19. 2024

군대 기다려준 여자친구

호구의 맛을 알아야 호구 신세를 면하지


나는 늘 사랑에 대해 깊이 고민했다. 고등학교 시절, 가끔 코스모폴리탄 잡지의 연애 섹션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심장이 두근거렸고, 내 미래의 사랑이 어떻게 펼쳐질지 상상하며 설레었다.

나는 진정한 연애를 꿈꿨다. 단순한 끌림이 아닌, 서로를 존중하며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그런 연애를.


대학교 2학년 때, 그 애를 만났다. 그 애는 같은 학교 학생이었고, 우리 사이는 순조로웠다. 사귄 지 200일이 되던 때, 그 애는 군대에 가게 되었다. 나는 모두가 "군대를 왜 기다려 바보야?"라고 말했지만, 그 애를 기다렸다. 어쩌면 미련한 짓이었을지도 모르지만. 그 애가 훈련소에 있을 때는 매일 인터넷 편지를 쓰고, 틈날 때마다 손 편지를 적어 보냈다. 꽉 막혀 몇 시간이 걸리는 고속도로와 낯선 길을 운전해 면회를 갔다. 복학생 들과 주변 남자 애들은 "미련하게 굴지 말고 군 필자를 만나"라고 조언했다. 어떤 애들은 "앞으로 우리도 너 같이 의리 있는 여자를 만나야 하는데. 근데 네 남자 친구 전역 해 봤자 고마운 마음 금방 잊을걸?"이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그때는 그 말이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18개월이라는 긴 시간이 흘렀다.


그 애는 전역하는 날, 나에게 금반지를 건네며 말했다. "나는 의무여서 간 군대지만, 너는 내가 군대에 있는 동안 아무런 의무도 없는데 나를 기다려줘서 정말 고마워. 앞으로 내가 정말 잘할게." 그 말에 나는 감동했다. 그 이후 모든 것이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듯했다. 그 애는 나의 배려와 자상함에 감동했고, 나 역시 그의 따뜻한 마음에 깊이 감동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모든 것이 변하기 시작했다. 그 애는 내가 보여주는 모든 사랑과 배려를 당연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내가 하는 일들은 이제 더 이상 그 애에게 특별하지 않았다. 그는 점점 자신의 일에만 몰두했다. 게임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친구들과 놀러 다니며, 나와의 시간을 점점 소홀히 했다.


취업 준비와 대학원 준비로 바쁘던 난, 그의 그런 모습에 실망할 정신도 여유도 당시에는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와 대화하면서 폰 게임을 틀어 놓고 게임을 힐끗 쳐다보는 그의 모습을 보았다. 그 순간, 나는 결심했다. 이 관계는 끝났다고. 나는 더 이상 그 애가 귀엽게도, 잘생기게도, 좋게 보이지도 않았다. 그가 나를 얼마나 당연하게 여겼는지 깨닫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 애가 나를 당연하게 여긴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나자, 내가 호구라는 사실도 인정하게 되었다. 그동안 내가 희생했다고 생각하며 붙잡고 있던 과거의 시간이 더 이상 아깝지 않았다.


그 애에게 나의 에너지를 더는 조금도 소비하고 싶지 않았다.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는 이유에 대해 이야기하며 이별을 고하자 그 애는 내 말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내가 투정을 부리는 줄 알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 늘 다툰 이후에 먼저 사과하던 내가 연락하지 않자, 그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연락을 받지 않는 나의 집 앞에 많이 찾아왔다. 10번 정도 넘게 찾아온 것 같다.


그 애의 모습은 이전과 달랐다. 필사적이었다. "미안해, " 그 애가 말했다.

"내가 정말 미안해. 내가 정말 미쳤었나 봐. 너가 나 군대도 기다려줬는데, 내가 그 소중함을 잊었어. 내가 미쳤었나 봐."


그 말을 듣고 있자니 한숨이 나왔다. 이미 그 말을 몇 번이나 들었던지 모르겠다. 한때는 그가 진심으로 사과하는 줄 알았고, 내가 그의 군대를 기다려준 것이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몇 번이고 기회를 줬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었다.


"술은 마시지 말고 오지 그랬어?" 내가 말했다. "그랬다면 네 말이 조금 더 진정성 있게 들렸을 텐데."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차갑게 말했다. "집에 가. 그리고 다시는 여기 오지 마. 나는 너랑 더 이상 사귈 마음이 없어. 내가 너 군대 기다린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야? 나한테는 이제 그냥 지난 시간일 뿐이야."


마지막 말을 듣고 어깨를 들썩이며 그 애가 울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우는 그 애와 나를 쳐다봤다. '아 짜증 나네. 피곤해 죽겠는데 쉬지도 못하고 이게 뭐냐.'  분노가 치미는 것을 참으며 그 애를 집에 돌려보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생각했다.


'예전 같으면 우는 모습을 보고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겠지.'


1주일 뒤, 연구실에서 논문과 프로젝트로 정신없이 일하고 집에 오던 길에 익숙한 실루엣이 로비에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그 애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빠르게 다가가 나에게 인사하려는 그 애의 귀에 대고 말했다. "또 왔니? 꺼져."


충격으로 굳은 그놈을 뒤로하고 나는 집으로 들어왔다. 그날 이후, 그놈은 더 이상 나에게 연락하지도 나를 찾아오지도 않았다. 4년의 연애가 비로소 그놈에게도 끝이 났다.


이후로도 나는 여전히 가까운 사람들을 배려하고 호의를 베풀었다. 그러나 그들이 나의 배려를 당연하게 여기기 시작하면, 나는 그들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조용히 멀어졌다.


상대가 손절당했는지 모르도록 손절하는 것이 가장 안전한 손절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4년 덕분에, 나는 나를 우선으로 하는 연애를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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