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만의 재회
'일상의 글쓰기' 글감 - [왜]
“이번 주 토요일이 상용이 형 30주기 추모제라네. 한번 같이 갈까?” 저녁 먹고 쉬는데 느닷없이 남편이 물어 왔다. “뭐?” 잠시 머리가 멍해졌다. 남편은 “허허 참, 세월이 이렇게 흘렀네. 30주년 행사한다고 추모사업회에서 연락 왔더라고. 30만 원 후원금으로 냈는데 너무 적은가?” “아니, 적당한 것 같아. 같이 가자. 끝나고 지원이 자취방도 둘러보고.” 짧게 대답하고 얼른 휴대폰으로 눈길을 돌렸다.마음이 복잡했다.
교대에 합격하고 2월 말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선배를 처음 만났다. 5호관 잔디밭에 둥글게 앉아서 사회과 예비 신입생들과 선배들이 미리 친목을 다지는 자리였다. 고등학교를 벗어나 이제 자유로운 대학생이 된다는 설렘으로 모든 것이 새롭고 재밌기만 했다. 종합 대학만큼 교정이 크지 않아서 잠시 실망했지만 금방 잊어버렸다. 가운데서 행사를 진행하던 그는 또래보다 두 살쯤 많은 우리 과 회장이었다. 키가 훌쩍 크고 얼굴이 가무잡잡한데, 군복 소재 옷을 입고 있었다. 웃으면 반달눈이 되고, 결정적으로 ㄹ 발음이 안 돼 가끔 혀 짧은 소리를 내는 바람에 바로 친근하게 느껴졌다. 군인 아저씨처럼 생긴 것과는 다르게 친철하고 한없이 다정하고 착한 사람이었다. 나 말고도 신입생들 중에 팬이 많이 생겼다.
선머슴같이 활달했던 나는 수업이 다 끝나고도 동아리 활동이나 모임을 하느라 기숙사에 빨리 들어가는 날이 거의 없었다. 별일 없으면 선배가 있는 학생회실에서 놀았다. 순수하고 마음이 넓은 선배가 인간적으로 좋았다. 선배도 날 귀여워했다. 점호 시간이 다 되어서야 기숙사 현관에 아슬아슬하게 들어갈 때가 많았다. 가끔 선배가 자전거로 데려다 주었다. 열 시 즈음이 되면 기숙사로 향하는 길이 손을 잡고 뛰어 들어가는 커플들로 진풍경을 이루었다.
2학년이 되자, 처음으로 치러질 임용고시가 다음 해로 다가오면서 전국 교대에서 임용고시 반대 투쟁이 더욱 심해졌다. 교육대학교는 초등학교 교원을 양성하는 특수 목적 대학교여서 졸업생은 순위 고사로 전원 채용되어 왔었다. 하지만 일시적으로 학생 수가 급감하자 정부는 교육대, 사범대 졸업생을 우선 채용하는 교육공무원법이 위헌이라며 공개 전형을 하겠다고 발표했다. 학생들은 주한 미군 주둔 비용은 늘리면서 나라의 미래인 교육 재정은 오히려 삭감하며 졸속으로 밀어부치는 정부 정책을 규탄했다. 수업을 거부하고, 전국 교대 연합으로 교육개혁, 임용고시 철폐, 주한 미군 철수 등을 내세우며 시위 횟수를 늘려 갔다.
9월 어느 날, 윤리과 이경동 열사가 교육개혁을 외치며 분신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너무나 혼란스러웠다. 바꿀 수 없는 대세인 것 같은데 그냥 임용고시 보고 교사 되면 되지, 왜 그렇게까지 해야 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전국 교대의 시위는 더욱 격렬해졌고 나만 편하게 빠질 수 없어 간간이 시위에 참여했다. 선배가 보였다. 어두운 표정이었고 말수가 더 없어졌다.
11월 10일, 친구들과 오랜만에 패밀리랜드에 가자고 약속을 잡은 날 오전이었다. 교대 앞 은행나무 가로수 길은 온통 노란색으로 가을의 아름다움을 뽐내며 사람들의 감탄사를 불러오고, 길 위에는 떨어진 샛노란 잎들이 밟고 지나가기 미안하게 예쁘게 쌓여 가고 있었다. 친구 서넛과 찐빵을 뜯어 먹으며 교문을 막 돌아서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중이었다. 내리는 은행잎을 맞으며 선배가 학교 쪽으로 걸어 오고 있었다. 반가워 달려가서, 아주 조금 남은 찐빵 한 조각을 입에 넣어 주었다. 밥은 먹었냐, 우리는 오늘 놀러 간다고 재잘거렸다. 찐빵을 다 먹어서 조금밖에 못 줘서 속상하다고 하니 하하 웃으며 괜찮다고 했다. 그 순간 그 웃음이 왜 쓸쓸하고 슬퍼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을까. 왠지 버스 타지 않고 따라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아쉽게 헤어지고 난생 처음 바이킹을 타면서 기분 나쁜 심장 떨어지는 느낌을 경험하고, 가끔 오락가락 떨어지는 보슬비를 맞으며 놀이동산에서 시간을 보냈다.
돌아오는 길, 버스 맨 뒷좌석에 나란히 앉아 오는데 라디오 뉴스에서 분신, 투신 어쩌고 하는 소리가 언뜻언뜻 나오는 것 같았다. 친구들은 잘 못 들었다고 했다. 한순간 불길한 생각이 스쳤지만 별일 아니겠거니 하며 학교에 들어왔다.
학생들이 모여 있었다. 믿을 수 없는 현실을 마주했다. 전남대 병원으로 달려갔다. 기도하고 또 기도했지만 운명을 바꾸지 못했다. ‘이게 뭐지?’ 눈물도 나지 않았다. ‘도대체 왜!’ 원망만 들었다. ‘그때 학교에 따라 들어갔으면 달라졌을까?’ 자책감도 자꾸만 들었다. 이경동 선배도 미웠다. 스물한 살이 감당하기엔 벅찬 일이었다. 선배랑 친했다고 학생 대표로 추모사를 준비하라고 했다. 장례식이고 뭐고 아무도 없는 곳에 숨어 있고 싶었는데 다들 너무 슬픔에 빠져 있어 거절하지도 못했다. 3일 뒤, 시민장으로 치러진 장례식에서 추모사를 읽고 있는 내 모습이 잔인하게 느껴졌다. 망월동이 사람들로 가득 찼다. 광주 사람들이 다 온 것 같았다. 11월인데도 햇볕이 뜨거운 날이었다. 어지러웠다.
“30년 동안 한 번도 못 와 봤네. 그때 망월동에서 상용이 형 매년 올게요. 꼭 올게요. 하고 마음속으로 몇 번이고 말했는데…….” 행사가 끝나고 망월동을 떠나면서 남편이 말한다. 매년 꾸준히 추모제를 해 왔고, 10년 주기로 추모 행사도 크게 열고 있었다. 검은 옷을 입고 진행을 돕고 있는 어린 대학생들, 중년이 된 동기와 선배들, 서울에서 근무한다는 사회를 보는 젊은 교사까지 추모사업회를 계속 이끌어오고 있는 사람들에게 고마움과 함께 빚진 마음이 든다.
남편은 고작 스물다섯밖에 안 됐던 젊은이들이 어떻게 그런 신념을 품고 자신을 희생했는지 놀랍고 대단하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그때와 같은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들의 희생으로 세상은 달라지지 않았고 그 용기와 신념으로 살아서 더 싸워야 했다고. 선배는 반미, 반제, 민주주의를 외친 학생운동의 마지막 세대였다. 개인주의적인 성향의 나는 그가 어떤 가치와 도덕관념으로 그런 선택을 했는지 감히 알지 못한다. 모든 관계를 뒤로하고 죽음을 결정한 그의 예민하고 섬세한 마음을 짐작만 해 볼 뿐이다. 조그만 섬마을의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그 작은 꿈을 말했던 그는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을 감당하지 못했을까? 신영복 교수가 ‘나눔’은 우산을 접고 ‘함께 맞는 비’라고 했는데 우리 선배는 자신의 목숨까지 접어 교육의 방향을 다시 생각해 보게 하는 것으로 나눔을 실천했을까?그가 우려했을 교육 현실이 펼쳐지는 것을 보며 다시 씁쓸해진다.
세월이 흐르긴 했나 보다. 입에 올리기도 어려웠던 이름을 이제야 비로소 글자로 써 본다. 찬란한 은행나무 길 풍경을 다시 보는 것과 우습게도 찐빵을 입에 한가득 넣어 주지 못한 것이 그렇게 가슴 아팠던 것도 담담히 꺼낸다. 우리에게까지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알려 주고, 떠올리면 스무 살로 돌아가게 만드는 사람, 다시 은행잎이 거리를 황금빛으로 물들일 때 또 만나러 가기로 지금은 남편이 된 친구와 약속했다.
※ 1년 전 작성한 글입니다. 글을 내놓기 머뭇거려져 1년이나 묵히다 발행합니다. 31주기 기일에 추모의 마음을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