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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향 May 25. 2024

욕 박사와 소개팅을

일상의 글쓰기 - 글감[욕]

근사한 남자가 나타났다. 스물다섯 살, 교직 2년째 여름 방학이었다. 3학년 교과목에 처음으로 영어가 들어와서 방학하자마자 쉬지도 못하고 2주간 연수를 받았다. 더위와 지루한 수업이 이어져 스멀스멀 짜증이 오르던 참이었다. 천장에서 돌아가는 선풍기 바람으로 그럭저럭 버티는데, 교실 앞문을 열고 2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훈훈하게 생긴 남자가 들어왔다. 눈이 시원해졌다. 괜찮은데? 흐트러졌던 자세가 저절로 고쳐진다. 옆 반 연수생인가 싶었는데 강사란다. 근처 학교 교사이기도 하고. 오, 똑똑하기까지.


두 시간 만에 그 남자에게 홀딱 반했다. 겉모습은 둘째치고 예의 바르고 단정하면서도 부드러운 말투와 뚝뚝 흐르는 지성미까지 겸비했다. 여자 친구는 있겠지? 있으나 마나, 며칠 뒤 강의가 한 번 더 있으니 그때까진 행복하겠군. 학창 시절에 하이틴 로맨스 소설 덕후였다. 만화방에 있는 수백 권을 거의 빠짐없이 섭렵했을 뿐 아니라 신간의 첫 장만 훑어봐도 재미있을지 없을지 알아내는 경지에 이르렀다. 거기에 사는 남자 주인공들은 멋진 외모와 재력에 지성과 섹시미를 갖춘 데다 겉으론 차가워 보이지만 자기 여자만 끔찍이 사랑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물론 그 사실을 마지막에 가서야 알아차리는 예쁘고 순수하지만 바보 같은 여자 주인공도 있어야 하고. 내가 연애를 못 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로맨스 소설 주인공처럼 눈에 확 띄는 잘난 남자는 나 따위에겐 관심 없고, 호감을 보여 오는 남자는 양에 차지 않으니 잘 될 턱이 있나.  남자는 전자에 가깝다.


갑자기 온 우주의 기운이 모인 건가? 일사천리로 일이 이루어졌다. 어떤 힘에 이끌렸는지 옆에 앉았던 학년 부장님이 “너희 둘이 잘 어울리겠다. 영우야, 우리 학교 신규 쌤인데 둘이 한번 만나 봐.” 호들갑을 떨며 내게 물어보지도 않고 강의실을 나서는 그를 붙잡은 것이다. “토요일 열두 시에 금정역 근처 카페 ‘공감’에서 볼까요?” 뭐랄까, 그의 목소리는 감미로우면서도 다정하다. 그윽한 분위기가 흐른달까?


지각생의 후광 효과를 노리고 약속 시간보다 조금 늦게 카페에 들어갔다. 둘러봐도 그가 보이지 않는다. 이런. 같은 연애 비법 책을 읽은  거 아냐?. 예상했던 전개는 아니지만 뭐 그럴 수 있지. 창가에 자리를 잡고 기다렸다. 30분이나 지났다. ‘확 박차고 나가 버려!’ 속에서는 시키는데 몸이 말을 안 듣는다. 미련이 있는 게 아니고 강력한 중력이 작용하는 걸 거야. 진짜로 막 나가려고 엉덩이를 치켜드는데, 그가 들어왔다. 뛰어 들어왔으면 자존심이 좀 덜 상했을 텐데 여유롭게 미소 지으며. 일이 생겨서 좀 늦었단다. 나한테 긴장감이 하나도 없군. 지금 내가 ‘을’인 거 맞지? “하하, 그럴 수도 있죠. 별로 안 기다렸어요.” 커피를 마시고 나서, 교외에 맛있는 보리밥 집이 있으니 점심 먹으러 가잔다. 보리밥? 그건 좀. 먹고 나서 방귀라도 나오면 어쩐담? “그러죠. 뭐.” 에라, 모르겠다.


“씨발이 무슨 뜻인지 알아?” 최근에 본 사람 중에 내가 제일 밝고 귀엽다며 말을 놓아도 되냐고 해서 그러라고는 했지만 이건 너무 급발진이다. “네?” 보리알이 목에 컥 막혀 안 넘어간다. "‘씹’은 여성의 성기를 말하고, '씹하다'는 성관계를 비속하게 이르는 말이거든. 씨발놈은 자신의 어머니와 씹할 정도로 나쁜 사람이라는 걸 강하게 욕하는 말이고.” 뭐야, 뭐야? 눈이 번쩍 뜨인다. 또라이인가? 당황해서 표정을 살피니 나를 놀리려는 건 아닌 것 같다. 처음 만난 자리에서 저토록 진지하고 서슴없이 낯 뜨거운 주제로 읊어 대는 남자, 어떻게 해석하고 반응해야 할지 참말로 난감하다. 이어서 예의 그 다정다감한 말투로 ‘존나’, 염병’, '지랄', ‘제기랄’, ‘우라질’의 숨은 뜻을 조근조근 늘어 놓는다. 무슨 욕 박사님이 나신 줄. ‘제발 그만하라고, 개새끼야!’


이 만남은 오늘로 끝이겠구나. “난 학생들과 ‘욕’ 수업을 해. 아이들이 뜻을 모르고 함부로 욕하는데, 수업이 끝나면 거의 안 쓰거든. 자기 입이 얼마나 더러워지는지 알면.” ‘네네. 당신의 철학, 존중합니다요.’ 그래, 야기수 있지. 그런데 굳이 오늘이어야 해? 지금 내가 여자로 안 보인다는 거지? 아니면 이래서 저 훤칠한 외모를 지니고도 여자 친구가 없는 건가? 내가 끌렸던 분위기 있는 남자는 어디서 찾아야 할지. 욕 강의와 함께 가슴을 채웠던 설레는 감정이 안개가 물러나듯 서서히 사라졌다. 시간이 너무 늦었다며 헤어졌는데, 해는 아직 이글대고 있었다.


 달 지나서 제주도에서 열린 군포 지역 보이 스카웃 연합 행사에서 재회했다. “우리 이쁜이도 술 한잔 따라 줘야지.” 여전한 입담으로 친한 척한다. 이렇게 느끼했었나? 스쳐 지나간 인연으로 남았지만, 나랑 맞지 않았을 뿐이지 그렇게 싫은 기억은 아니었나 보다. 반가운 마음이 들어 ‘짠!’ 술잔을 마주친 걸 보면.


우영우인지 이영우인지 성이 기억나지 않는 그 남자를 ‘욕’ 때문에 실로 오랜만에 떠올리며 노트북 앞에서 실실거리고 있다. 남편이 만들어 놓은 딸기잼을 요거트에 섞어 떠먹으면서. 추억이 삶을 달콤하고 다채롭게 만든다. 꺼내어 그 안으로 들어가 보니 마치 두 번 사는 듯하다. 다시 청춘이 된 것 같은 기분도 들고. 히히. “아주 광대가 승천하셨네. 날 보고 좀 웃지?” 꼴이 웃기는지 남편이 지나가며 한마디 한다. 어휴, 깜짝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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