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아반떼 같은 사람
일상의 글쓰기 - 글감[비교]
“너는 뭐 그리 인생이 쉽냐?” 오늘처럼 아침저녁으로 쌀쌀했던 날, 서울 사는 대학 친구가 거의 20년 만에 찾아와 내게 말했다. 당황스러워라. 쉽다고? 헤헤 웃고 다니니 내 인생이 남들에게는 그렇게 보이나?
친구는 우리 대학교 3대 미녀로 불릴만큼 예뻤다. 해초 비빔밥이 유명한, 바다가 보이는 식당에 앉은 그녀의 크고 맑은 눈이 쓸쓸해 보였다. 늘 돋보이고 싶어 했던 그녀가 담담하게 자기 삶을 이야기했다. 또 이혼할 거라고. 우여곡절 많았던 첫 결혼에 실패하고 새로운 인연을 만나 재혼하자마자 휴직하고 남편과 유학을 다녀왔는데 오랫동안 아이가 생기지 않았단다. 원인이 그녀한테 있었고 남편과도 관계가 좋지 않아 남처럼 지낸 지 꽤 된 듯했다. 시댁에서도 이혼을 바란다고 했다. 장학사 시험에도 여러 번 도전했으나 번번이 떨어졌다고 한다. 욕망도 큰 사람이 많이 의기소침해 있었다. 뜻대로 안 되는 그녀의 삶이 안타까웠다.
“너는 남편이 속 안 썩이고, 얘들도 잘 크고 얼마나 좋니? 힘들이지 않고 승진도 척척 하고 말이야. 네가 걱정이 뭐가 있겠냐.” 나를 부러워한다. 그저 평탄해 보이나 보다. ‘힘들이지 않았다고 누가 그래? 속 안 썩이는 남편은 또 어디 있겠어.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고 아이들에, 시댁에, 친정에, 신경 쓰고 잠 못 이루는 밤이 수두룩한 걸. 나처럼 자기애 강하고 지기 싫어하는 사람이 ‘나’를 포기하고 누르고 내려놓은 것이 얼마나 많은지 알기나 해? 인내를 갈아 넣었다고!’ 속으로만 뇌까렸다. 내게도 버거웠던, 절대 깨질 것 같지 않은 벽, 빠져나오기 어려운 크고 작은 수렁, 슈퍼우먼처럼 누비면서 해결해야 했던 미로들, 칼에 베이듯 아프고 외로웠던 순간들이 스쳤다. 인생이 쉬운 사람이 어디 있을까.
텔레비전에 그녀가 나왔다. 이비에스(EBS)에서 교육 대담을 하는데 유명한 대학 총장 옆에 패널로 앉아 있다. 장학사 된 것보다 멋져 보여 반가웠다. 차분하게 의견을 잘 말한다. 잘 봤다고 문자를 보냈더니 바로 전화가 왔다. 이혼은 안 했노라고. 서울 외곽에 텃밭이 있는 작은 2층 전원주택을 지었는데 1층에는 그녀가, 2층에는 그녀의 남편이, 그렇게 서로 간섭하지 않고 산다고. “잘했어. 부부 관계도 겁나게 세련됐네. 멋지구먼.” 했더니 언제 한번 놀러 오란다. "네가 평안한 것 같아서 좋아." 내가 말하자, 머뭇거리더니 돈 좀 꿔 달란다. 급하게 필요해서 한 달만 쓴다고. 얘가 왜 이러지? 나한텐 그만한 큰돈이 없다고 했다. 그러면 300만 원이라도 부탁한단다. 마이너스 통장에서 받을 수 있는 대출이 꼭 300만 원쯤 남아 있었다. 아는 사람과 돈거래는 안 한다는 원칙을 어겼다. 오랜 세월 값이 있는 법이다. 다 긁어 보냈다.
우려했던 대로 갚지 않는다. 못 받아도 그만이라는 마음이어서 독촉하지 않았다. 저도 염치가 없는지 연락도 못 한다. ‘나는 너처럼 전원주택이 있기는커녕 살고 있는 집도 전세야. 얘들은 셋이나 되고 친정어머니까지 모시니 돈 들 일이 얼마나 많겠어? 양쪽 어머니들께 달마다 용돈까지 드리느라 10년째 아반떼 타고 있다고. 네 차는 보나 마나 엄청 비싼 거겠지? 프로필 사진 보니까 골프며 문화생활이며 잘 즐기는 것 같더구먼. 난 운동 좋아해도 돈 안드는 배구밖에 못 하는데.’ 이 말도 속으로 삼켰다. 솔직히 돈은 쓰는 사람이 다 따로 있더라고. 나는 아끼느라 홈쇼핑이나 뒤지는데 말이지. 뭐 어때, 누구에게라도 도움 됐으면 좋은 거겠지. 아, 사람이 넉넉하지 못하고 왜 이리 구질구질하냐. 멀리 내다 던져 버리고 싶은 내 속에 들어 있는 좀스러운 것들이여!
학교 주차장에 지 80(G 80)과 비엠더블유(BMW) 사이 당당하고 귀여운 내 차가 끼어 있다. 내 하얀 아반떼는 옆에 아무리 비싸고 좋은 차가 있어도 거리낌 없다. 아담하고 실용적인 데다 밝고 경쾌하게 잘 나간다. 전면에 센서가 없어서 앞쪽 범퍼에 여기저기 긁힌 자국이 많다. 열심히 달려온 흔적이다. 왠지 강단져 보인다. 얼굴에 칼자국 길게 난 남자처럼. 2년째 차 없는 동료의 출퇴근하는 발이 되어 주고, 필요한 사람에겐 언제나 열려 있어 퇴근길엔 만석일 때가 많다. 고급스럽진 않아도 다가가기 쉬워 편안하고 다정하다. 겸손한 내 아반떼처럼 구차한 것 내색하지 않고, 있는 것에 만족하고 고마워하면서 자신 있게 살고 싶었다. 지닌 게 많지 않아도 조용히 찻값을 내고선 잘난 체하지 않는, 다른 사람까지 밝게 해 주는 그런 사람. 가끔 성공했고, 때론 실패했다. 그래, 누군가에게 내 인생이 쉽게 보였다면, 어쩌면 해 내는 중일 수도 있지. 좀 더 여유를 품고 걷던 방향으로 흔들리지 말고 가자.
1년 반 만에 그녀한테서 문자가 왔다. 10만 원씩 매달 갚는다고. 문장에 고맙다는 단어가 반복된다. 어려운 사정이 있었나 보다. 돈보다 인연이 안 깨져 다행이다. 더 단단해지겠지. “까톡!” 현대차 파는 친구한테서도 영업 메시지가 도착했다. '2025 현대 자동차 안내' 으이그, 내가 언제 차 바꾸나 그것만 기다리고 있구나. 아직 멀쩡하다고! 옆에 내 품위를 엄청 걱정해 주는 친구 하나도 “너, 궁상맞다고 남들이 욕해. 교장 돼서도 아반떼 끌고 갈래?” 하며 빨리 새로 장만하라고 성화다. 교장 선생님이 밀크커피를 호로록 마시며 퇴직 때까지 타려면 제네시스로 뽑으라고 거든다. 너무 비싸다고 했더니 “그래? 그럼 그랜저로 해. 요샌 그랜저가 국민차여.” 딱 정해 준다. 솔깃하네. 국민차라잖아. 친구가 돈도 갚고 있는데 한번 보러 갈까? 어, 이러면 이야기가 산으로 가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