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이 많이 웃길
햇볕이 무슨 뜨거운 레이저 광선 같다. 오후 다섯 시인데 한여름 대낮 같은 땡볕이다. 교문을 나와 손차양을 하고 좀 떨어진 공영주차장까지 걸었다. 이러고 다니면 얼굴은 절반쯤 지키겠지만 손등은 까맣게 그을리는 거 아녀? 안 그래도 손이 특별히 쭈글쭈글하고 못생겼는데 차라리 손을 보호해야 하나, 그래도 얼굴이 중심인데 그걸 조금이라도 더 가려야 하나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갔다. 딱 적당한 온도의 청량한 날씨를 좀 누리려나 싶었는데, 6월에 들어서자마자 성질 급한 여름이 달려들다니. 계절도 계단처럼 진행되나 보다.
차 안은 바깥보다 더 심하다. 가마솥에 들어앉은 것 같다. 창문을 내리고 에어컨을 최대로 올린 후 조수석에 아무렇게나 늘어져 있던 손수건을 집어 들었다. 목덜미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떼어 긁어모아 하나로 묶었다. 조금 살 것 같다.
이제 어디로 가지? 오늘은 집에 가지 않아도 되는 날이다. 아침에 당당히 짐을 싸서 나왔기 때문이다. 누구랑 싸워서 집 나온 건 아니다. 내겐 정당하게 외박할 곳이 또 하나 있다. 사실 이게 짐덩어리이기도 하지만. 새 발령지가 차로 50분 거리라 통근이 가능한데도 관사를 꼭 써야 한단다. 관리비가 아까워 일주일에 하루씩은 여기서 자기로 했다. 마침, 목요일에 듣는 시 수업이 밤늦게 끝나니 그날이 딱이었다. 그런데, 이번 주는 사정이 생겨 수요일인 오늘 자유의 시간을 보내기로 한 것이다. 아침에 남편이랑 빠이빠이를 했고, 막내에게도 날 기다리지 말고 알아서 할 일 하라고 말해 두었다. 오늘은 시 수업도 없으니 시간이 무지하게 많다. 야호! 이제 즐기기만 하면 된다.
이상하다. 출근길 운전하면서는 고즈넉한 사찰을 걸을까, 조용한 카페에서 책을 읽을까, 지인을 만나 수다를 떨까, 설레는 고민을 했는데, 막상 발길을 옮기기만 하면 되는 순간이 오자 즐겁지가 않고 찝찝하다. 해가 너무 중천에 떠 있어서? 날이 너무 뜨거워서? 혼자라 외로워서? 지쳐 쉬고 싶어서? 집이 눈에 밟혀서?
가시지 않은 열기 속에서 지끈거리는 머리를 시트에 기대고 한참을 앉아있었다. 그리고는 액셀을 밟았다. 익숙한 마을을 거쳐 과속방지턱에 덜컹거리며 농로를 통과한다. 길의 양 옆으로 어린 모가 심긴 넓은 논이 푸릇하니 싱그럽다. 하얀 구름이 흐르는 시원한 강을 가로지른다. 매일 마주치는 짙푸른 동백과 멀구슬나무 가로수들이 어김없이 반가워한다. 드디어 정겨운 초록을 뒤로하고 아파트가 즐비한 회색의 도시로 들어섰다.
딱 맞춰 휴대폰이 울린다. 막내딸이다. "주차장인데 내려와. 분식 먹으러 가자." "와! 엄마 안 자고 왔어? 나 피곤해서 누워있고 싶긴 한데, 엄마랑 밖에서 저녁 먹는 거 드무니까 나갈게." 목소리가 가볍게 찰랑인다.
기껏 도착한 곳이 도로 집이라니. 어제 다이슨 드라이어까지 야무지게 챙겼는데. 에휴. 둘이서 떡볶이와 잔치국수를 먹고 들어왔다. 한숨 자고 일어나서는 아파트 뒷길로 산책을 나갔다. 딸과 저녁에 걷는 게 얼마만인가. 게으름 피우고 유튜브나 보며 누워있기 일쑤였는데. 하얀 울타리 사이로 길게 늘어진 빨간 장미가 가로등 불빛을 받아 요염하다. 팔과 다리를 만지는 밤공기는 상쾌하다. 낮에는 뜨겁지만 저녁엔 시원한 게 아직 여름은 아니라고 주고받았다.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이들. 부부가 함께 걷는 이들, 달리는 이들이 많다. 내가 누워있는 동안 사람들은 생동감 있게 살고 있었구나. 이제 매일 나와야겠다. 딸이 올해 개명한 사람들 이름 목록 캡처한 것을 보여주었다. 둘이 깔깔대고 웃었다. 작년부터 이름 불릴 때 얘들이 웃어 '초원' 이라는 제 이름이 맘에 안 든다며 개명 노래를 부르더니, 이걸 보니 자기는 개명할 급이 아니란다. 방구년, 오상년, 노 예, 남 창, 연고추, 추추추, 남궁뚱, 정필통, 나거지, 고로나,... 그네도 탔다. 힘껏 굴러 높이높이 날았다. 배와 허벅지가 기분 좋게 뻐근해졌다.
씻으러 화장실에 들어갔던 딸이 급히 부른다. "엄마, 내가 예전에 충치 생긴 것 같다고 했잖아. 근데 지금 이렇게 됐어. 봐봐." 머리에 토끼 귀 세안 밴드를 한 딸이 한 손에 칫솔을 들고 입을 쩍 벌리고 들이댄다. 잘 안 보인다니까 휴대폰 손전등까지 켜 비춘다. "엇! 이게 뭐야? 충치가 심하게 생겼네? 너 지금까지 이 제대로 안 닦았어? 엄마가 칫솔 돌려가며 사이사이까지 잘 닦으라고 했잖아." 어금니 홈마다 검은 줄이 거미줄처럼 뻗어 있다. "어떡해?" 울상을 짓는다. "방학 되자마자 치과 가야지, 뭐. 엄마 힘들게. 이제부터 진짜 꼼꼼하게 잘 닦아!" "알았어." 시무룩하게 다시 화장실로 간다.
"엄마. 다시 봐." "어? 없네?" "우히히히. 블루베리였지롱" 배를 잡고 깔깔댄다. 웃음소리가 가득 찬다. 하루 한 번씩 막내 웃겨 주기 미션은 속아 준걸로 노력없이 클리어한 건가? 어린 아이처럼 좋아하는 게 어이없어 피식 웃음이 나온다. "엄마 골려 먹으니까 좋냐?" "블루베리가 끼어 있어서 딱 속이기 좋겠더라고. 하하하." 네가 웃는다면야. 나보다 키가 10센티는 큰 중2지만 가끔 귀엽다.
행사가 있다던 남편이 늦게 들어왔다. 나란히 누워 남편은 야구 하이라이트를 보고, 나는 휴대폰에 눈을 둔다. 건넌방엔 딸이 자고 있다. 평안하고 안정감 있는 밤이다. 딸이 실컷 웃었으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