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 내시경은 처음이라
배가 고프다. 내일 대장 내시경을 하는 날이라 오늘 아침과 점심은 흰 죽만 먹고 오후 두 시부터는 금식해야 한다. 오늘 뿐 아니라 이틀 전부터 제대로 못 먹었다. 김치, 고기, 나물, 버섯, 씨 있는 과일, 해조류, 고춧가루, 깨, 색깔이 있는 곡물과 가루, 커피, 착색음료... 도대체 뭘 먹으라는 건지. 찾았다. 흰 밥에 계란을 먹으면 된다.
어제저녁은 억울하게도 회식이 있었다. 오리불고기를 지글지글 맛있게 굽고 있는 데서 미역냉국 국물과 사이다만 마셨다. 미역 조각이 들어가지 않게 조심하면서. 다들 후식으로 냉면을 주문하자, 물냉면에 눈이 번쩍 뜨였다. 맞지? 면을 먹지 말란 말은 없었잖아. 면발의 색깔이 회색인 게 좀 거슬리긴 했지만 이쯤은 괜찮을 거라고 위안했다. 정말 먹는 재미가 없다면 무슨 낙으로 살까?
사무실에 혼자 앉아 점심으로 싸 온 흰 죽에 소금을 찍어 먹었다. 운반의 편리함 때문에 소금을 덜어왔더니 이게 골고루 녹지 않으니 짜기만 하고, 감칠맛도 없다. 눈쌀이 찌뿌려진다. 식어 빠진 흰 죽을 겨우 넘겼다. 후회막심이다. 귀찮더라도 간장을 가져올걸.
시계바늘이 두 시를 가리켰다. 이제부터는 물만 마셔야 한다고 생각하니 먹고 싶은 게 머리 위로 마구 떠다닌다. 사흘째 심심하게 먹어 고춧가루가 고프다. 무생채를 밥에 가득 올려 한 볼때기 크게 먹었으면.
무생채 생각에 침을 꼴딱꼴딱 넘기다 보니 어릴 적 가족과 함께 둘러앉아 먹었던 그 밥상이 떠올라 웃음이 났다. 평소엔 김치와 한두 가지 반찬, 국 정도였는데 그날은 유난히 상이 푸짐하고 특별히 맛있었다. 방금 무쳐 아삭아삭한 무생채와 고춧가루와 간장이 적당히 밴 무조림을 맛있게 먹고 있는데 아빠가 "뭐야, 반찬이 다 무시로 만든 거네?" 하며 하하핫 웃었다. 아빠의 재밌다는 듯이 터져 나오는 웃음을 나는 좋아했다. 그런가? 먹던 걸 하나하나 찬찬히 보니, 뜨끈한 무나물, 무를 썰어 넣은 된장국, 시원한 동치미, 깍두기도 자리하고 있었다. 분명 각각 맛이 다른 요리라고 생각했는데 배추김치 빼곤 모두 밭에서 뽑아온 무가 재료였다는 걸 알고는 무척 신기했다. 어차피 이거 다 먹어도 뱃속에는 무시밖에 없다고 아빠가 놀렸고 동생들까지 모두 깔깔거렸다.
무가 있었다는 건 겨울이었을 것이다. 가게도, 냉장고도 없던 시골의 겨울에 각종 채소나 고기, 생선은 귀했다.(섬이었지만 농사를 주로 하는 곳이라 생선도 부지런한 아빠를 둔 집에서만 먹을 수 있었다. 우리 아빠가 바다에 가는 건 거의 보지 못했다는 게 함정이다.) 엄마는 무 몇 개로 솜씨를 부렸고, 우리는 진수성찬을 받았다. 고기도, 생선도 들어가지 않은 단지 무만의 다양한 변신술이었지만 방금 만든 새 반찬들은 너무나 꿀맛이었다. 엄마는 손이 빠르지도 않고, 우아하고 근사한 요리를 만들지는 못했지만 뒤꼍에 가서 채소를 쓱싹 베어다가 고르지 않게 뚝뚝 썰어 겉절이나 무침, 나물 등의 밥반찬을 뚝딱 맛있게 해내는 재주가 있었다. 지금도 엄마가 요리하는 걸 보면 칼을 뺏어서 내가 하고 싶을 만큼 어설퍼 보이지만 막상 먹으면 간이 딱 맞고 입에 짝 달라붙으니 묘한 일이다.
아! 배고프다. 아빠도 눈물나게 보고프다. 그날 먹었던 멸치 우려 맛을 낸 무나물, 무조림이며, 큼직하게 채 썬 무로 끓인 깨소금이 둥둥 떠다니던 고소한 된장국이 먹고프다.
내일 건강 검진이 끝나면 무를 하나 사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