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죄책감이 덜 하다
일을 마치고 바람처럼 날아서 퇴근했다. 열흘간의 연휴가 시작되기 바로 전날이라 그런지, 적금 들어 놓은 걸 타서 두둑이 쟁여 놓은 것 같다. 야금야금 아껴서 써야지.
집에 오자마자 막내딸 방부터 노크했다. 늘 그렇듯 휴대폰과 한몸이다. 사춘기가 시작되기 전에 규칙과 습관을 확실하게 잡아놨어야 하는 건데, 후회가 막심이다. 이젠, 내 입만 아프고 관계만 나빠질 뿐 씨알도 안 먹힌다. 이번에도 시험공부를 하지 않은 채 중간고사를 치렀다. 점수가 바닥을 길 게 뻔하다.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건 아닌데, 막상 책상 앞으로 가는 발걸음은 바윗덩어리를 매단 듯 무거운가 보다. 내버려 두면 방치하는 것 같아 괴롭고, 간섭해서 부딪치면 그게 독이 될까 봐 걱정된다. 기쁘고 즐거운 일이 있어도 늘 한쪽 가슴이 답답하다. 우리 막내가 자기 인생을 주체적으로 살기만 하면 원이 없겠다. 무력한 걸 보는 것이 힘들다. 저도 편치는 않겠지. 맘이 쓰리다. 일단, 잠부터 자자.
일곱 시쯤,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 깼다. 광주에서 학교 다니는 둘째 딸이다. 얘는 주말이면 온다. 제 방에 캐리어를 놓아두고는 곧장 안방으로 들어와 의자에 앉는다. 교수님 이야기를 조잘거린다. 지난주 독서인문교육 연수를 받는데 둘째 딸 학교의 교수가 강사로 왔었다. 딸과 같은 학과길래 연수 끝나고 대화할 기회가 있어 "우리 딸이 ㅇㅇ대학교에서 교수님 수업이 제일 좋다던데요."하고 입에 발린 소리를 했다. 사실이긴 하지만. 딸 이름이 뭐냐길래 얘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 말 안했는데, 그 젊은 교수가 3학년이라는 단서만 가지고 아이를 찾아냈나 보다. 둘째는 교수님이 궁금한 건 밝혀내고야 마는 성격이라느니, 자기 강의에 자부심이 대단하다느니, 일곱 살인 딸아이 때문에 미국 대학 교수로 갈 기회를 버렸다느니, 교수의 개인사까지 끊이지 않고 이야기를 이어간다. 다행히 뭐 하러 쓸데없는 소리를 했냐는 타박은 안 한다.
얼마 전 남자 친구랑 헤어져, 살이 빠져 얼굴이 홀쭉하고 스트레스 때문인지 볼에 여드름이 심해져 안타까웠는데 마음이 조금 잔잔해진 건가 싶어 조금은 안심이 된다. 물어보는 것만 겨우 대답하고 자기 사생활 얘기는 잘 안 하던 아이였는데, 남친이랑 헤어진 날에도 오늘처럼 안방에 들어와 이별한 이유와 아픈 마음을 털어놓았다. 그만 만나는 게 맞겠지 하며 확인받는가 하면, 혼자 있으면 눈물만 난다며 힘들어하고, 보고 싶으면 어떡하냐며 울고, 엄마한테 말하고 나니 마음이 조금 편해진다며 한참 훌쩍이며 코맹맹이 소리를 하고 갔다.
그렇게 속 썩이던 아이가 철들어서 엄마에게 조언을 구하고, 깊은 이야기를 털어놓으니 기분이 묘했다. 가벼운 이야기든, 힘든 이야기든 엄마에게 내놓을 수 있다니. 그래도 내가 좀 괜찮은 엄마였나 하는, 일종의 뿌듯함이랄까.
여덟 시, 시흥에서 근무하는 큰딸이 기차역에 마중 나갔던 남편과 함께 들어왔다. 각자 방 문 닫고 들어가 조용하기만 하던 집에 별안간 생기가 돈다. 두 살 터울이지만 연년생이나 다름없는 둘째는 많이도 싸우며 컸지만, 언니를 퍽 의지한다. 가만 보면 부모 말은 귀담아듣지 않아도 언니가 하는 말은 자기 생각도 바로 바꿀 만큼 다 받아들이고 믿는다. 막내도 휴대폰을 내려놓고 슬그머니 거실로 나왔다. 자기만 대접받아야 하고 온 가족의 중심이어야 하는, 양보라곤 모르는 막내도 큰언니랑은 조금 대화가 되는 편이다. 실은 언니가 꾹 참고 저를 상대해 주는지는 알아채지 못하고 말이다. 막내가 빠져있는 '보이즈플래닛 2'의 남자 아이돌 이야기로 저녁식탁의 대화가 채워진다. 특별히 좋아하지 않아도 언니들이 맞장구치며 관심을 표현해 준다. 막내의 표정이 밝다. 수다가 길어진다. 오랜만에 완전체로 모여 식탁이 풍성하다. 남편도 기분이 좋은지 막걸리 한 잔을 곁들인다. 늘 불안을 안고 있지만 가끔은 이런 순간들 때문에 사는 거지 싶다. 이럴 땐 콕 박혀있던 근심도 안개처럼 사라진다.
피곤할 텐데 저녁을 먹자마자 큰 애가 보드게임 카페에 동생들을 데려간다며 나갔다. 듬직하고 고맙다. 막내도 마지못해 가는 척 새침한 표정을 지었지만, 발걸음에 즐거움이 묻어난다. 침대에서 뒹굴거리며 휴대폰만 들여다보는 꼴을 안 봐서 기분이 날아갈 것 같다. 나란히 나서는 세 딸의 정다운 뒷모습을 보니 뭉클하다.
오랜만에 마음이 가볍다. 평온한 집에서 난 넷플릭스를, 남편은 장편소설을 본다. 어제도 그제도 누워있었는데 오늘은 죄책감이 덜하다. 불안해하지 말자. 잘 되고 있다. 내 보물들은 모두 제 갈 길을 잘 걸을 것이다. 막내도 어느날 갑자기 '이제 열심히 해 보겠어.' 하며 실천으로 옮길 날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날이 늦어지지 않게, 나만 잘하면 된다.
게다가, 열흘의 연휴는 아직 시작되기도 전이다. 아! 느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