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친구가 준 영상을 혼자 보면서 참 많이 힘들었다. 충격적인 현실들을 마주하니 혼란스러웠다. 나는 왜 지금까지 몰랐던 걸까? 아마 알려고 하지 않았다는 표현이 더 맞는 것 같다. 그저 양털처럼 깎아 만든다는 나의 순수한 생각을 의심해 볼 시도를 하지 않았다. 영상을 본 후 나는 옷장을 서성였다. 겨울마다 샀던 포근한 앙고라 스웨터, 우아한 윤기를 가진 라마 코트, 손이 닿으면 사라질 것 같은 부드러운 캐시미어 카디건을 나는 좋아했다. 어떤 안정감을 느꼈던 것 같다. 생각해 보면 당연했다. 그 옷들에는 그들의 마지막 온기가 담겨 있었다. 속이 울렁거려 견딜 수 없었고, 그 생명들을 위해 애도의 시간을 가져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때부터 어떤 계시라도 받은 듯 비건 패션 제품들을 찾기 시작했다. 나는 디자이너로써 트렌드에는 민감했지만, 화장품이나 옷을 구매하는 데는 크게 욕심이 없는 편이어서 비건 패션은 마음만 먹으면 수월할 거라 믿었다. 그러나 그건 큰 착각이었고, 빈약한 비건 패션산업과 허울만 그럴듯한 비건 패션들도 많다는 걸 알게 되었다. 더군다나 믿었던 식물성 소재의 면(cotton)조차 미국에서 목화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과도한 살충제를 사용해 환경오염을 유발한다는 것까지. 태초의 아담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완전한 비건패션이 불가능해 보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죽어가던 생명들에 대한 애도의 마음은 점점 희미해졌고, 그들의 날카로운 비명과 멍한 눈빛들을 잊어도 될 만 그럴싸한 변명거리들이 하나씩 늘어갔다. 친구들은 비건 패션은 아직 우리나라 환경에서 어렵다며, 이것저것 다 따지면 입을 게 없다고도 말했다. 고기도 먹지 말아야 하는 거 아니냐며 비아냥대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가 물었다.
“비건 패션? 그거 그냥 여우나 토끼털 그런 거 안 입으면 되는 거 아냐? 뭐가 어려워?”
“엄마는 원래 그런 걸 안 좋아했으니까 쉽겠지만, 내 겨울옷에 동물 섬유가 없는 게 거의 없더라고.
그리고 엄마 가방에 달린 열쇠고리도 밍크야. 알고 있었어?”
“아, 저 쪼그마한 거? 저 정도는 괜찮지 않니?”
“아니, 엄마. 저 쪼그마한 하나도 괜찮지 않아.”
“딸, 그냥 살아라.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니?”
엄마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했다. ‘내가 언제부터 그랬다고.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나.’
호기롭게 시작한 비건 패션의 삶은 그렇게 무기력해져 갔다. 그러던 어느 날 백화점 진열대에 놓인 코발트블루 빛의 스웨터가 눈에 들어왔다. 촉촉하게 윤기를 머금은 그 영롱한 색. 간접 조명 아래 더욱 포근하게 빛났다.
‘아, 정말 너무 예쁘다. 정말.’
정신을 차려보니 단정하게 포장된 쇼핑백 하나가 방 한구석에 놓여있었다. 그 영상의 장면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철망에 거꾸로 매달린 채 죽음을 기다리던 작은 생명. 아직 숨을 쉬고 있던 생명에게서 가죽째 털을 벗겨내던 손. 둔탁하고 거칠고 거뭇거뭇한 그 손의 움직임.
‘아. 내가 그 손을 꼭 잡고 악수를 했구나.’
이전에 느껴 본 적 없는 깊은 수치심이 몰려왔다. 그렇게 나의 비건 패션 생활은 질풍노도의 시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비로소 안정기가 찾아온 건 반려견 ‘별이’를 만나고 난 후이다. 유기견이었던 별이의 따뜻한 체온과 심장박동을 느낄 때의 평온함. 매일 보송보송한 털에 얼굴을 비비며 살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들을 사랑하고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동물 털로 만든 제품들이 더 이상 매력적이지 않았고, 무가치하게 느껴졌다. 별이를 통해 세상을 보는 시선도 넓어지면서 환경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
어느 날 후배가 물었다.
“선배, 요즘 북극곰을 살리자고 하잖아요. 그런데 저는 좀 이상해요. 따지고 보면 결국 환경보호는 우리가 싼 똥을 우리가 치우는 일인데, 왜 불쌍한 북극곰을 팔아먹는 거 같죠?”
“그러게. 듣고 보니 네 말이 맞네. 어쩌면 당장의 위협이 피부로 느껴지지 않으면, 지구를 살리자는 말이 공허하게 들릴지도 몰라. 그래서 귀엽고 불쌍한 북극곰을 통해서라도 호소하려는 걸지도 몰라.”
“전 비건은 못 할 것 같아요. 고기는 포기 못 하겠거든요. 근데 플라스틱 줄이기 같은 건 하고 있어요. 선배는 비건패션 생활을 하면서 어때요? 좋아요?”
“지금은 좋다고 말할 수 있는데, 몇 년 동안은 정말 쉽지 않았어. 그런데 확실히 시야가 넓어진 느낌이 들긴 해.
좋은 점이 점점 많아지고 있는데, 이걸 주변에 어떻게 설명하면서 권유해야 할지는 아직도 어려워.”
“저는 모든 사람이 비건을 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하지만 고기를 먹는다면 인도적인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도 달걀은 동물복지를 먹고 있답니다.”
“멋지다! 너도 조금씩 변하고 있네. 근데 동물 복지 제품 사 먹으려면 돈 많이 벌어야겠다.”
“맞아요. 그래서 열심히 벌고 있습니다!”
환경보호나 동물보호가 좋은 일이라는 걸 사람들이 몰라서 못하는 게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다. 나 역시 비건 패션을 지금까지 할 수 있었던 건 인간의 선함이나 지성의 힘 때문은 아니었다.
니체는 인간을 '빨간 뺨을 가진 짐승'이라고 말했다. 동물 중에서 유일하게 수치심을 느끼는 존재라는 것이다.
진은영 시인의 말도 내게 위로가 되었다.
‘우리의 연민은 정오의 그림자처럼 짧고, 우리의 수치심은 자정의 그림자처럼 길다.'
코발트블루 빛 스웨터를 가졌던 그날, 수치심을 느낄 수 있었다는 사실은 지금의 나에게 큰 다행히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이 글을 마치며 지금은 하늘의 별이 된 우리 ‘별이’에게 고맙고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다.
별이가 없었다면 아마 생명과 환경에 대한 나의 마음은 시들어버렸을지도 모른다.